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90위~8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90위~81위

토르난테 2024. 7. 1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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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위 오투 글로리아

 


생년월일: 1917년 1월 9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삼바 출신의 축구 전도사'

 

브라질 출신이지만 자국 및 남미 무대보다는 유럽의 포르투갈과 아프리카에서 성공한 최초의 브라질 출신의 감독으로 특히 상대적으로 우승후보와는 거리가 먼 팀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는데 벨레넨세스의 타사 데 포르투갈 우승 및 포르투게자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이 대표적인 예다.

바스쿠 다 가마에서 지휘봉을 잡았지만 1954년, 포르투갈 무대의 벤피카에서 명성을 날렸는데 벤피카에서 프리메이라 리그 통산 4회 우승 및 타사 데 포르투갈 통산 3회 우승을 이뤄냈고 1959-60 시즌에는 벨레넨세스의 기적적인 타사 데 포르투갈 우승을 이끌었고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정규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벤피카 2기 시절에는 1967-68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도 이뤄냈다.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맡아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글로리아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격파한데 이어 우승후보 1순위로 평가받던 조국 브라질을 탈락시켰고 북한을 상대로는 0-3으로 밀리던 경기를 5-3으로 뒤집으며 3위에 올라 포르투갈 역사상 월드컵 최고순위를 기록했으며 말년에는 나이지리아 감독을 맡아 1980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을 이뤄내며 1990년대 황금기의 초석을 닦는다.

 

 

89위 칼마르 예뇌

 


생년월일: 1908년 3월 21일
국적: 헝가리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혼베드 여단장"

헝가리와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 축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헝가리 대표팀 감독 세베슈 구스타브와 함께 전 지역에서의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주장했던 소셜리스트 풋볼의 지지자로 빠른 패스와 적절한 스위칭 플레이를 바탕으로 팀을 지휘했다.

헝가리 대표팀 출신이었던 킬마르 예뇌는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첫 감독직을 시작했는데 첫 감독임에도 푸스카스 페렌츠 시니어가 만든 혼베드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내며 하나의 왕조를 세웠다.

헝가리 혁명 이후에는 외세의 힘을 빌려 국민들을 탄압한 정부에 실망해 스페인으로 떠나 라리가에서 감독직을 이어나가며 스페인 축구의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는데 약체 그라나다를 맡아 1958-59 시즌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이뤄내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88위 사보 요제프

 


생년월일: 1896년 5월 11일
국적: 헝가리
주 소속팀: 스포르팅 리스본

'바이올린 지휘자'

포르투갈 축구계의 태동기를 연 마자르인으로 당시 지미 호건을 위시한 다뉴브 학파에 의해 중유럽에서 유행하던 공격진 다섯 명의 유기적인 시스템을 선보이며 포르투갈 축구계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잉글랜드에서 배워온 고강도의 체력 훈련으로 자신이 맡았던 팀의 선수들을 강인하게 만들었다.

선수로 활약하던 1926년, 나시오날 데 마데이라로 이적해 포르투갈 축구계와 인연을 맺었고 1930-31 시즌, 포르투로 이적해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다가 1931-32 시즌부터는 전업 감독으로 팀을 크게 발전시킨 사보는 포르투에 머무는 동안 포르투 챔피언십 6회 우승을 시작으로 1931-32 시즌 타사 데 포르투갈 우승, 그리고 1934-35 시즌에는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포르투를 떠난 뒤에는 브라가를 거쳐 스포르팅 리스본에 입단해 활약했는데 이곳에서 다섯 개의 바이올린이라 불렸던 헤수스 코헤이라, 마누에우 바스케스, 페르난도 페이로테우, 주제 트라바수스, 아우바누의 5인조 공격 편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지도하며 리스본 챔피언십 6회 우승 및 타사 데 포르투갈 3회 우승, 그리고 정규리그 4회 우승 및 1943-44 시즌 타사 임페리우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87위 미하엘 야쿠신

 


생년월일: 1910년 11월 15일
국적: 러시아
주 소속팀: 디나모 모스크바

'소련 축구의 아버지'

1940년대 소련 축구계의 거두로 선수 시절인 1937년 소련 투어를 진행했던 바스크 대표팀이 선보였던 스위칭 플레이를 한층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소련식 스위칭 플레이로 이름을 날렸음은 물론 1950년대와 60년대 소련 대표팀의 대약진을 이끌었다.

1944년에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선수 은퇴를 한 직후에 감독직을 맡은 야쿠신은 소련식 스위칭 플레이를 도입했는데 1945년 11월 스템포트 브리지에서 벌어진 첼시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판정에서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3-3으로 비겼는데 대인방어에 익숙했던 첼시의 수비진을 완벽하게 혼란에 빠트리며 세계에 소련식 스위칭 플레이의 위용을 선보였다.

디나모 모스크바의 소련 탑 리그 6회 우승을 이뤄낸 야쿠신은 소련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1968 4위에 올랐으며 말년에는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서 활약하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축구발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86위 파티흐 테림

 


생년월일: 1953년 9월 4일
국적: 튀르키예
주 소속팀: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투르크 축구계의 황제'

갈라타사라이 구단과 튀르키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자 감독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선수단을 완벽하게 휘어잡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노련한 전술 운용으로 명성을 날리며 임파라토르, 즉 황제라고 불렸다.

독일의 명장 유프 데어발의 직계 제자였던 테림은 튀르키예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터키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1996년 튀르키예의 UEFA 유로 첫 본선행을 이끌었고 UEFA 유로 2008에서는 조별리그 1승 1패를 거둔 상황에서 체코를 상대로 0-2로 밀리던 경기를 3-2로 뒤집었으며 B조에서 3전 전승으로 올라온 크로아티아를 꺾고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뤄냈다.

갈라타사라이에서도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테림은 구단에 총 4회 부임해서 수페르리그 8회 우승 및 튀르키예 컵 3회 우승, 그리고 슈퍼컵 5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기 시절에는 정규리그 4연패는 물론 1999-2000 시즌 UEFA 컵에서 볼로냐, 도르트문트, 레알 마요르카, 리즈 유나이티드를 모두 꺾고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도 뱅거 체제의 아스날을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밀어내고 우승을 차지하며 튀르키예 구단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우승을 이뤄냈다.



85위 유프 데어발

 


생년월일: 1927년 4월 10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3백 시스템의 아버지'

이탈리아의 조나 미스타 시스템을 간결하게 개량한 3-5-2 시스템을 바탕으로 1980년대 축구의 흐름을 선도한 명장으로 특히 함부르크의 공격 루트인 윙백 칼츠의 크로스와 스트라이커 흐루베쉬의 헤딩이라는 공격 루트를 극도록 선호했으며 리베로 슈틸리케를 최후방 수비수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전진시켜서 수비형 미드필더의 위치에서 슈스터, 한지 뮐러와 볼을 순환하는 데 큰 역할을 맡게 했다.

1970년부터 8년간 헬무트 쇤의 휘하에서 서독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던 데어발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의 부진을 책임지고 사퇴한 헬무트 쇤의 뒤를 이어 서독 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는데 세대교체를 위해 노장들을 내쳤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라리가 소속 선수들을 적극 등용하며 세대교체에 성공하며 UEFA 유로 1980 우승과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UEFA 유로 1984에서는 비록 8강 조별리그애서 탈락했지만 자신이 주축으로 쓰던 선수 중 기량이 전성기에서 떨어진 노장들을 정리하고 그 자리를 마테우스, 푈러, 베어톨트, 브레메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발탁해 대체하며 다시 한번 세대교체에 성공하며 후임 감독 베켄바우어에게 세대교체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던 데어발은 터키의 갈라타사라이에 부임해 터키 축구의 발전을 도왔으며 피테르 테림을 후계자로 키웠는데 그 테림이 감독으로서 터키 축구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84위 미르체아 루체스쿠

 


생년월일: 1945년 7월 29일
국적: 루마니아
주 소속팀: 샤흐타르 도네츠크

'돈바스 아레나의 승부사'

감독으로 36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던 승부사로 동유럽식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와 남미식 테크닉을 활용한 공격을 혼합한 전술을 선호했고 중요한 고비에서는 적절한 승부수를 두며 이기는 경기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선수단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해 무려 6개 국어에 능통했고 선수단을 종종 극장에 데리고 갔음은 물론 선수들에게 독서와 대학 과정 수료를 요청해 지적 수준을 한층 더 올려 선수단의 전술 이해도를 올렸음은 물론 강단있는 성격으로 디나모 키이우 감독 재직 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도피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남아 팀을 이끌었다.

중유럽과 동유럽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루체스쿠는 초년에는 루마니아 대표팀 및 디나모 부쿠레슈티를 비슷한 루마니아에서 활약했는데 디나모 부쿠레슈티 시절에는 코파 로므니에이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9-90 시즌에는 코파 로므니에이에 이어 디비지아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공산당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활약했는데 브레시아 칼초를 이끌며 세리에 B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라피트 부쿠레슈티에서도 컵대회와 정규리그 각각 1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튀르키예의 갈라타사라이에서 테림의 대체자로 활약하며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고 2001-02 시즌에도 우승을 이뤄냈으나 터키 축구 협회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2004년에는 소련 해체 이후 철강 재벌인 리나트 아흐메토프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던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감독으로 부임한 루체스쿠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며 정규리그 8회 우승 및 우크라이나컵 6회 우승, 그리고 슈퍼컵 7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2008-09 시즌 UEFA컵에서는 4강에서는 라이벌 디나모 키이우를 밀어냈고 결승에서는 베르더 브레멘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0-11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 올랐다. 그러나 나중에는 제니트를 거쳐 디나모 키이우의 감독으로 부임해 2020-21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샤흐타르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83위 레몽 후탈스

 


생년월일: 1921년 10월 7일
국적: 벨기에
주 소속팀: 올림피크 마르세유

'과학자 레이몬트'

벨기에와 프랑스, 브라질 등지에서 뛰어난 경험을 쌓은 명장으로 우수한 전술안에서 나오는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으며 효율적인 팀 관리를 바탕으로 과학자 레이몬트라 불리기도 했는데 훌륭한 지도력과는 반대로 직설적인 화법과 특유의 브뤼셀 억양이 묻어난 발음으로 선수들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부리그의 여러 팀을 맡았다가 1968년에 벨기에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1970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고 UEFA 유로 1972 최종예선에서도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2-1로 꺾으며 본선에 진출해 3위에 오르며 벨기에 축구의 역량을 성장시켰음은 물론 벨기에의 명문 안더레흐트에서는 1977-78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및 UEFA 슈퍼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스탕다르 리에주에서도 정규리그 2연패를 이뤄냈다.

벨기에에서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마르세유에서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후탈스는 리그앙 2연패와 1990-91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 및 1992-93 시즌 리그앙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1993년에 팀을 덮친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되었으며 승부조작 가담 및 방조 혐의로 인해 수사를 받느라 감독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서야 그는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겨우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탈스 개인도 1990-91 시즌에 이탈리아 언론으로부터 판치나 도르에서 골든 벤치를 받았는데 이는 이탈리아 축구계와 관계가 없는 감독으로는 유일무이한 케이스였다. 이외에도 옹즈 몽디알이 선정한 올해의 감독을 2회 수상했으며 2019년에는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축구감독 47위에 올랐다.



82위 라몬 디아스

 


생년월일: 1959년 8월 29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미스터 뉴 라 마키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남미 무대를 호령했던 명장으로 1940년대 공격진에서의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바탕으로 남미 무대를 호령했던 라 마키나 군단을 50여 년 만에 다시 재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다.

1995년 J리그에서 은퇴한 뒤 바로 친정팀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직을 맡아 팀을 재건하며 1996-97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에서 모두 우승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및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으며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유럽 챔피언 유벤투스를 상대로 아쉽게 패했음에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남미 프로축구 무대가 아직 유럽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감독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2002년까지 리그 5회 우승을 이뤄낸 디아스는 산 로렌소에서도 전성기를 누렸으며 2012년에는 위기에 빠진 고향팀에 다시 부임해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능력을 다시 알렸으며 말년에는 알 힐랄의 지휘봉을 잡아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다.

 

 

81위 토마스 투헬

 


생년월일: 1973년 8월 29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첼시 FC

'광기의 승부사'

2010년대와 202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린 감독으로 보드진과의 잦은 불화로 한 팀에 오래 머물진 못했지만 UEFA A 라이선스 이론 시험에서 최초로 만점을 받았을 정도로 이론에 강했음은 물론 천재적인 전술안과 뛰어난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좋은 성과를 낸 명장이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유스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가 도르트문트로 떠난 위르겐 클롭의 뒤를 이은 욘 아르네센 감독이 시즌 초반에 사퇴하자 대신 마인츠의 지휘봉을 잡은 투헬은 사키가 항상 주장했던 수적 우위와 공간의 활용을 다양한 포메이션으로 구사하며 2010-11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얕은 선수층을 가진 마인츠에서 무려 0가지가 넘는 포메이션으로 상대의 허를 완벽하게 찔렀으며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했는데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지도력을 인정받아 2015-16 시즌 VDV 분데스리가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17 시즌에는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다.

파리 생제르맹에서는 리그앙 2연패를 이뤄냈는데 특히 2019-20 시즌 도메스틱 트레블은 물론 구단 역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첼시에서는 2020-2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펩 과르디올라의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우승했으며 UEFA 슈퍼컵과 클럽 월드컵도 제패했으나 그를 적극 후원하던 구단주 로만이 러우전쟁의 여파로 구단을 팔았고 새 구단주 보엘리와 구단에 대한 견해 차이로 사임했다. 다만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분데스리가 우승에 실패했음은 물론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비판받으며 밀려났기에 명예회복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0위~9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80위~7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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