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60위~5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60위~51위

토르난테 2024. 7. 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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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생년월일: 1943년 2월 27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다섯개국 감독으로 여섯번의 월드컵을 경험한 사나이.'

 

다섯 국가에서 여섯 번 월드컵을 나선 월드컵 역사의 산 증인이자 중동 축구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비선수 출신 감독 중 한 명으로 소위 '조가 보니토'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축구를 지향하는 브라질 축구계의 주류 사상과는 다른 이단아였는데 산타나가 활용하던 4-2-2-2 시스템을 수비적으로 재해석해 뒷문부터 튼실한 실리적인 축구로 성과를 냈지만 재미있는 축구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항상 팬들의 비판이 따라왔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물리치료사로 참가해 우승을 함께한 파헤이라는 플루미넨시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고 1978년 오일 머니로 축구붐을 일으키던 쿠웨이트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1980 AFC 아시안컵에서 아시아의 양대강호인 이란과 대한민국을 모두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1982 스페인 월드컵 본선진출에도 성공했으나 본선에서의 부진으로 사임했다. 플루미넨시에서 1984년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차지해 부활하며 UAE 감독을 맡았다가 사우디 아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1988 AFC 아시안컵 4강과 결승전에서 이란과 대한민국을 연달아 꺾고 재차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시 UAE 감독으로 돌아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19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파헤이라는 처음에는 공격적인 4-2-2-2로 나섰으나 주장이자 공격형 미드필더 하이의 부진으로 그를 벤치로 내린 뒤에 주장 완장은 둥가에게 줬고 주전 자리는 3선 미드필더에서 주로 뛰던 마지뉴에게 수비형 윙어 역할을 맡겼고 브라질은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브라질답지 못한 우승이라는 비판으로 그는 사임했고 중동 및 브라질의 여러 클럽 감독을 전전하다가 다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맡아 2004 코파 아메리카와 2005 컨페드컵 우승을 이뤄냈고 이전과는 다른 화려한 4-2-2-2 포메이션을 앞세웠으나 본인이 잘 운영하지 못하는 시스템과 무너진 밸런스 때문에 발목을 잡혔고 8강에서 탈락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59위 비센치 페올라

 


생년월일: 1909년 11월 20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

 

헝가리의 구트만 벨라와 함께 4-2-4 포메이션을 개발한 인물로 특히 그의 4-2-4 시스템은 기본적인 4-2-4 시스템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레프트윙에 전형적인 측면 플레이어인 페페 대신 인사이드 포워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자갈루를 배치해 그를 중원 싸움을 돕는 역할로 사용했음은 물론 좌측면 공격은 니우통 산투스에게 전담시키며 본인 말대로 4-2-4의 탈을 쓴 4-3-3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1937년부터 1958년까지 상 파울루의 지휘봉을 여섯 번 잡았던 페올라는 1940년대 후반에 노로냐-바우어-후이 캄포스를 조합해 룰러라고 불렸던 하프백 라인을 구성하며 압도적인 중원장악력을 보이며 1948년과 1949년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연패를 이뤄냈고 1957년 감독으로 부임한 구트만 벨라와 함께 4-2-4 포메이션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1년 전까지만 해도 중용되지 않았던 자갈루와 가린샤를 적극 기용했고 만 17세의 펠레를 기용하면서 브라질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다.

4-2-4 포메이션을 오랜 시간 동안 브라질 축구의 아이덴티티로 만들었으며 첫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기에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올라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무서워했고 경기 도중 잠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대비해 상파울루 시절에는 주장인 노로냐에게, 브라질 대표팀 시절에는 플레이메이커 지지에게 자신의 전술을 가르쳐뒀고 그들이 훌륭하게 지휘능력을 보여줬는데 이런 대비책과 용병술로 자신의 기면증을 완벽하게 대비하기도 했다.

 

 

58위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생년월일: 1948년 11월 9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손자병법 애호가'

손자병법의 애독자이자 강력한 규율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뛰어난 승부수를 바탕으로 통산 24회의 우승을 이뤄낸 감독으로 '조가 보니토'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축구를 지향하는 브라질 축구계의 주류와는 다른 이단아였는데 안정적인 수비 축구를 선호했고 테크닉의 화려한 선수보다는 우수한 피지컬의 선수를 선호했으며 공격 전개 부분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측면에서 빠른 역습 플레이와 크로스를 활용한 헤더를 중시하지만 중원과 수비라인에서 조직력을 중시 여기는 부분과는 다르게 공격 상황에서는 특별히 지시를 내리지 않고 해당 선수의 재량에 맡기는 성향이었다.

초년에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상술한 스타일 문제로 브라질 축구계에서 밀려나 축구 불모지였던 중동 무대를 전전하는 신세였으나 그레미우에서 199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파우메이라스에서 199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내며 남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해 주목받았고 결국 지역예선에서 최악의 부진을 보이던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직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팀 조직력을 갖춰 실리를 갖춘 용병술과 전통의 4-2-4 포메이션을 버리고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3-4-3 포메이션으로 전환하는 등 대규모의 개혁을 성공했고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전승 우승이라는 업적을 세웠음은 물론 스콜라리 개인도 남미 올해의 감독 및 IFFHS 선정 올해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 물러난 뒤에는 포르투갈 감독직을 맡았는데 과거 90년대 초반 골든 제너레이션이라 불리던 노장들을 대부분 정리했고 데쿠, 카르발류, 호날두 등 신예 및 귀화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등 리빌딩을 시도했고 그 결과 UEFA 유로 2004 준우승 및 2006 독일 월드컵 4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브라질 대표팀과 포르투갈 대표팀을 통틀어서 월드컵 본선 11연승과 12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을 세웠다. 그 뒤에는 하락세를 탔지만 그래도 광저우 헝다에서 중국 슈퍼리그 3연패 및 2015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명예회복을 했고 전성기를 누렸던 파우메이라스에서 2018년 캄페오나투 세리 A 우승을 이뤄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57위 돈 레비

 


생년월일: 1927년 7월 10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리즈 유나이티드


'리즈 시절의 감독'

자타공인 리즈 유나이티드 최고의 감독으로 남미의 오스발도 수벨디야와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상을 바탕으로 팀을 지휘했기에 상당히 거친 수비와 효율적인 플레이를 펼쳤는데 이때문에 과정주의자들의 반감을 사서 '더티 리즈'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나 잉글랜드 축구계에 실리주의가 뿌리내리도록 도왔다는 평가도 받는다.


리즈 유나이티드의 선수로 활약하다가 1961-62 시즌 선수 겸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돈 레비는 1962-63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감독 업무에 집중하며 1963~64 시즌 풋볼 리그 2부 우승으로 1부 리그에 승격한 것을 시작으로 1967-68 시즌 리그컵 우승, 1968-69 시즌과 1973-74 시즌에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우승을 이뤄냈고 1971-72 시즌에는 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인터시티 페어스컵 2회 우승을 이뤄내며 리즈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고 잭 찰튼, 빌리 브렘너, 조니 자일스와 같은 선수들을 유럽 초일류 선수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잉글랜드 대표팀 시절에는 대표팀 선수들이 '더티 리즈' 방식을 따르지 않았고 당대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서 가장 좋은 폼을 보이던 감독인 브라이언 클러프와 사이가 나빠 그의 소속팀 더비 카운티의 선수들을 소집하지 않는 등 순탄치 못한 커리어를 보냈는데 결국 축구협회 허락 없이 중동의 UAE 감독직을 맡으려고 접촉했고 분개한 FA에 의해 감독 자격 10년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리려다가 법원에 의해 취소되는 촌극이 벌이지기도 했다. 축구협회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돈 레비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는 신성불가침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리즈의 홈구장 '앨런드 로드' 외곽에는 그의 동상이 조각되어 있다.

 


56위 바비 롭슨

 


생년월일: 1933년 2월 18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입스위치 타운

'유능한 덕장'

영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을 논할 때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자 영국 축구사를 대표하는 덕장으로 적응력이 우수해 여러 나라의 다양한 리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스쿼드가 와해된 수준의 클럽을 맡아서도 뛰어난 선수관리와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단시간 내에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레벨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비숫한 실력이면 두툼한 사각형 하관을 지닌 선수를 중용했는데 실제로도 10대 초반에 부드러운 음식만 가려먹은 경우는 턱이 점점 뾰족하게 되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비되는 강인한 선수를 중용하는 통찰력을 보였다.

풀럼에서 첫 지도자 데뷔를 한 롭슨은 이듬해에 입스위치 타운의 지휘봉을 잡아 어려운 재정상황으로 13년의 재임 기간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을 영입했을 정도로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스 선수 위주로 실속 있게 팀을 육성했는데 1973년 텍사코컵 우승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1부 리그 5위권의 성적을 기록했고 1977-78 시즌 FA컵 우승 및 1980-81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79-80 시즌과 1980-81 시즌에는 2회 연속 준우승을 이뤄내는 뛰어난 업적을 세웠기에 시내 한복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1990 이탈리아 4강과 같은 성과를 내며 비록 우승컵이 없었음에도 잉글랜드 팬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잉글랜드 감독으로는 드물게 영국 밖에서도 꾸준하게 좋은 성과를 냇는데 PSV 에인트호번에서는 호마리우를 잘 컨트롤하며 에레데비시 2회 연속 우승을 기록했고 스포르팅 리스본을 거쳐 FC 포르투에서도 정규리그 2연패를 이뤄냈으며 FC 바르셀로나에서는 호나우두와 루이스 엔리케, 루이스 피구를 앞세워 1996-97 시즌 UEFA 컵 위너스컵과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1999-2000 시즌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돌아왔는데 전임 감독 뤼트 굴리트와 보드진의 실책으로 강등 위기와 재정난에 겪은 뉴캐슬에 부임해서도 팀을 빠르게 수습하고 부진에 빠진 에이스 앨런 시어러를 완벽하게 부활시켰고 우수한 선수들을 저렴하게 영입하며 2001-02 시즌 4위를 기록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뤄냈다.

 


55위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생년월일: 1922년 10월 27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유럽과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승부사'

'엘 토토'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명장으로 안정적인 리그 운영과 번뜩이는 승부수로 토너먼트를 돌파하는데 모두 능했던 지략가임과 동시에 개성 넘치는 선수들을 완벽하게 지휘하는 강력한 통솔력 또한 겸비했다.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유럽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스페인의 레알 마요르카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2부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산 로렌소의 지휘봉을 잠시 잡았다가 이탈리아 무대의 AS 로마로 이적해 1963-64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로마의 라이벌 라치오에서는 1968-69 시즌 세리에 B 우승을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켰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1973-74 시즌 라리가와 유러피언 컵에서 모두 준우승을 이뤄냈다.

로렌소의 커리어는 고국의 보카 주니어스에서 만개했는데 1976년 전력이 약화된 보카 주니어스의 지휘봉을 잡아 강호 인디펜디엔테와 리버 플레이트를 꺾고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조리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7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리버 플레이트, 페냐롤, 리베르타드, 데포르티보 칼리, 그리고 크루제이루까지 모조리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리버풀 대신 출전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격돌해 홈에서는 2-2로 비겼으나 원정에서 3-0으로 격파해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1978년에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다.



54위 스벤예란 에릭손

 


생년월일: 1948년 2월 5일
국적: 스웨덴
주 소속팀: SS 라치오

'북구 최고의 지략가'

북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뛰어난 적응력으로 다양한 리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탁월한 용병술과 적절한 교체 자원 활용을 앞세웠으며 특히 4-4-2 다이아몬드 포지션 구사에 능했음은 물론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부진하던 미하일로비치를 센터백으로 포지변을 바꾼 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도와줬다.

서로 다른 세 개의 국가에서 도메스틱 더블을 달성한 최초의 감독으로 스웨덴의 예테보리의 감독을 맡아 1981-82 시즌 UEFA컵과 알스베스칸, 그리고 스벤스카 쿠펜에서 모두 우승해 미니 트레블블 이뤄내 주목을 받았고 벤피카에서는 1982-83 시즌 더블을 포함해 정규리그 3회 우승 및 1988-89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도중에 AS 로마에서도 1985-86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부야딘 보슈코프의 후임으로 삼프도리아의 지휘봉을 잡았던 에릭손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다.

미하일로비치, 만치니와 함께 삼프도리아에서 라치오로 떠난 에릭손은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었는데 1997-9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시작으로 1998-99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했으며 여름에는 UEFA 슈퍼컵에서 퍼거슨이 이끌던 지난 시즌 트레블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축구 역사상 우승 경쟁이 가장 치열한 리그로 불렸던 1999-2000 시즌에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모두 제패하는 기염을 토하며 세리에 A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리그 최고의 스쿼드로도 4위 안에 들지 못하자 경질당했고 이후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지휘봉을 맡은 뒤에는 하락세로 떨어졌다.



53위 후고 마이슬

 


생년월일: 1881년 11월 16일
국적: 오스트리아
주 소속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분더팀의 카펠마이스터'

오스트리아 축구의 태동기를 연 명장으로 뛰어난 전술 운용 능력과 냉철한 승부사적 기질과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으며 무려 10개 국어가 가능했던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각국의 지도자들과 원활하게 교류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만난 지미 호건을 위시한 다뉴브 학파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뒤에는 짧은 패스와 스위칭 플레이로 공격을 풀어나가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연구했고 호건을 오스트리아 대표팀 코치로 초빙한 뒤에는 그와 함께 펄스나인 전술을 개발했고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 전술의 수혜자가 되었다.

선수 은퇴 후 심판으로 활동하가다 191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부터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1937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인해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그는 오스트리아 축구계를 유럽 일류로 올렸음은 물론 마티아스 진델라, 요제프 슈미스틱, 요제프 비칸, 발테르 나우쉬 등 뛰어난 재능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분더 팀이라 불리던 대표팀을 이끌고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 1934 이탈리아 월드컵 4위 및 1936 베를린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재직중이던 1929년에 수술을 받은 이후, 마이슬은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었는데 193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분더팀으로까지 불리며 오스트리아가 잘 나가게 되자 이 지팡이가 마이슬의 상징이 되었다.



52위 토마슬라브 이비치

 


생년월일: 1933년 6월 30일
국적: 크로아티아
주 소속팀: 하이두크 스플리트

'미헬스가 지명한 토탈 풋볼의 후계자'

다양한 환경에서 성공을 거둔 감독이자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오늘날에는 흔히 사용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라인 올려서 전방 압박, 오프사이드 트랩, 포지션 체인지 및 디펜시브 트렌지션과 같은 개념들은 1970년대에 이미 활용하고 있었기에 토털 풋볼의 대가라 불리는 리누스 미헬수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기도 했는데 13개국 20개의 클럽팀과 4개의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서 무수히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하이두크 스플리트 유스팀 시절부터 유고슬라브 유스컵 3연패를 이뤄내며 주목받은 이비치는 하이두크 스플리트 1군 팀을 맡아서도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3회 우승 및 유고슬라브컵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자이르를 9-0으로 대파하는 등 승승장구했고 대회 5위로 마감했다. 그리고 1976-77 시즌에는 아약스의 에레데비시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0-81 시즌에는 안더레흐트의 주필러리가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FC 포르투에서도 프리메이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4개 국가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파리 생제르맹과 마르세유에서도 활약한 이비치는 아시아 무대에서도 이름을 날렸는데 UAE의 감독을 맡아서는 조별리그에서는 대한민국과 쿠웨이트를 밀어내고 조별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8강 이라크를 꺾은 것을 시작으로 준결승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일본을 꺾은 쿠웨이트를 이겨내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사우디아라비와의 승부차기 혈투 끝에 아쉽게 패했다. 그럼에도 UAE 역사상 아시안컵 최고 순위에 올랐고 200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이티하드 감독을 맡아 사우디 왕세자컵 우승을 이뤄냈다.



51위 지네딘 지단

 


생년월일: 1972년 6월 23일
국적: 프랑스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토너먼트의 승부사'

선수로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감독으로도 선수시절 못지않은 업적을 세운 지단은 다소 클래식한 전술에도 불구하고 그 커리어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스타 선수들을 훌륭하게 장악했으며 짜인 적절한 맞춤 전술과 훌륭한 임기응변 능력으로 특히 토너먼트에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레알 마드리드가 베니테스에 의해 위기에 빠졌던 2015-16 시즌에 중도 부임한 지단은 갈락티코라 불리던 레알 마드리드의 스타들을 훌륭하게 통솔해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와 라리가 2회 우승을 포함해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총 11개의 우승컵을 진열했고 2020-21 시즌에는 선수단이 1년 동안 64회의 부상을 겪는 와중에도 라리가 준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이뤄내며 속칭 팀빨이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벗어던졌으나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과 보드진과의 견해 차이로 인해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일각에서는 지단을 두고 라리가에서의 지배력 및 자신만의 전술색이 약하다는 부분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지만 지단은 개인으로도 훌륭했는데 2017년에는 피파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으며 2019-20 시즌에는 라리가 최우수 감독에게 수상하는 미겔 무뇨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그리고 지단보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많이 이룬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 한 명뿐이었을 정도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70위~6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50위~4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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