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80위~7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80위~71위

토르난테 2024. 7. 2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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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위 루이스 쿠비야

 


생년월일: 1940년 3월 28일
국적: 우루과이
주 소속팀: 클루브 올림피아 아순시온


'파라과이 축구리그 역사상 최고의 감독'

 

1960년대와 70년대 우루과이를 대표하던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이자 파라과이 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자타공인 리그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안정적인 선수단 관리를 바탕으로 정규리그에서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찍어 누르는 플레이를 선보였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강팀들이 즐비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날카로운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강팀들을 상대로 선전했다.

파라과이의 명문 클루브 올림피아 아순시온 감독직만 7회, 기간은 총합 14년 이상 이끈 쿠비야는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3회 연속으로 우승했음은 물론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팀들이 독주하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0년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 및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조국 우루과이에서도 1981년 페냐롤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1979년에는 정규리그와 리베르타도레스를 포함해 인터아메리카컵 우승에 이어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유럽 챔피언 노팅엄 포레스트 대신 출전한 말뫼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0년에는 정규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차지하며 남아메리카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79위 하비에르 이루레타

 


생년월일: 1948년 4월 1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갈라시아의 원톱주의자'

투톱 전술이 유행하던 시절부터 라파엘 베니테스와 함께 4-2-3-1 시스템의 유행을 선도했던 선구자로 미드필더에서 공격수 사이 간격의 문제로 공이 잘 연결되지 않으면 공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인식해서,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서 공을 연결해 주는 중간 배달부로서의 공격형 미드필더 개념을 전술에 접목시키며 공격수가 많아야 공격 축구를 할 수 있다는 당대의 고점관념을 깨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부리그에서 감독직을 시작했다가 1989년 레알 오비에도의 감독직을 맡았던 이루레타는 1990-91 시즌에 라리가 6위를 기록하며 오비에도 역사상 처음으로 UEFA컵 진출을 이뤄냈고 라싱 산탄데르, 아틀레틱 클루브 및 레알 소시에다드 등 여러 구단을 떠돌다가 셀타 비고에서 1997-98 시즌 라리가 6위를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으나 모종의 이유로 재계약에 실패하자 셀타 비고의 라이벌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8-99 시즌부터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지휘봉을 잡은 이루레타는 1999-2000 시즌 구단 역사상 첫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2001-02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수페르코파 에스파냐 2회 우승을 이뤄내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그리고 2003-04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AC 밀란을 만나 첫 경기에서 4-1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을 잘 독려하며 홈에서 4-0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78위 라파엘 베니테스

 


생년월일: 1960년 4월 16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발렌시아 CF


'원톱의 마법사'

201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나쁜 활약을 보였으며 여러 선수와의 불화로 인해 현시대 팬들에게는 저평가를 받았지만 2000년대의 베니테스는 데포르티보의 이루레타와 함께 4-2-3-1 체제의 발전과 유향에 큰 역할을 했던 감독으로 중원에서의 우수한 점유와 강력한 수비를 겸비했으며 로테이션의 중요성을 빠르게 인식했던 감독이었다.

초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코치나 하부리그에서 올라온 베니테스는 2001-02 시즌을 앞두고 엑토르 쿠페르의 대체자로 발렌시아의 감독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2001-02 시즌 발렌시아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며 돈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2003-04 시즌에는 라리가와 UEFA컵을 동시에 우승하며 주제 무리뉴와 함께 유럽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는 등 자타공인 세계구급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스페인 무대를 떠나 리버풀의 2004-0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2000년대 중후반 빅4로 군림하는 활약을 펼친 베니테스는 인테르와 나폴리,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2011-12 시즌, 디 마테오의 부진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에게 프리미어리그 3위 및 UEFA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준수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77위 요하임 뢰브

 


생년월일: 1960년 2월 3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통일 독일의 첫 월드 챔피언'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디 만샤프트의 전성시대를 이끈 감독으로 클럽 축구에서 유행하는 전술을 그때그때 이식하며 좋은 성적을 냈지만 말년에는 이러한 부분이 사라지며 부진하기도 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매직 트라이앵글이라 불렸던 발라코프-보비치-에우베르의 공격 조합을 구성하며 1996-97 시즌 DFB포칼 우승과 1997-98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뤄냈던 뢰브는 이후 터키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2004년에는 클린스만의 휘하에서 독일 대표팀 수석코치 역할을 수행했는데 실질적인 전술을 모두 짜며 조국의 4강행의 기여했다.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클린스만으로부터 대표팀 감독을 물려받은 뢰브는 독일 대표팀에 현대적인 4백 시스템을 완벽하게 적용하며 유로 2008 준우승, 2010 남아공 월드컵 3위 및 유로 2012 4강을 이뤄냈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포르투갈을 4-0, 프랑스를 1-0, 브라질을 7-1,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제압하며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다.

유로 2016에서도 8강 이탈리아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를 탈락시키며 이탈리아 징크스를 끊어냈고 2017년에는 젊은 선수들로 컨페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나 2018 러시아 월드컵부터는 과거의 명성에 기댄 선수 선방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전술로 일관하며 추락했다.

 


76위 디디에 데샹

 


생년월일: 1968년 10월 15일
국적: 프랑스
주 소속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축구계의 샤를 드골'

주장과 감독으로 월드컵을 우승한 유이한 인물로 선수 시절부터 유명했던 강력한 리더십으로 다수의 스타플레이어를 통솔하는 부분에 장기를 드러냈으며 팀이 가진 선수층을 잘 활용하며 좋지 못한 변수를 최대한 제거하면서 팀 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답을 찾아내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보수적인 매니저 스타일의 감독이며 실제로 프랑스 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나는 프랑스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23명을 뽑는 게 아니다."라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2001년, 현역 은퇴 직후에 33세의 나이에 AS 모나코 감독에 선임된 데샹은  2002-03 시즌에는 팀이 리그 2위로 마쳤고, 2003-0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인 팀을 이끌고 준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고 데샹 본인도 리그앙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젊은 감독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유벤투스에서는 칼치오폴리로 강등된 팀을 세리에 A로 올렸으나 보드진과의 갈등으로 사임했고 마르세유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2009-10 시즌 리그앙 우승을 포함해 쿠프 드 라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2011-12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했다.

2012년, 레몽 도메네크가 망쳤으며 로랑 블랑이 수습에 실패한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고 챔피언 독일을 상대로도 선전하며 부활의 시작을 알렸고 UEFA 유로 2016 준우승과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이뤄내기 시작했다.

 

비록 UEFA 유로 2020에서는 부진했지만 2021-22 UEFA 네이션스리그 우승과 2022 카타르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냈다. 그리고 UEFA 유로 2024에서는 필드골이 4강전 선제골 외에는 없었지만 탄탄한 수비력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이색적인 기록도 세웠다. 데샹 개인도 레 블뢰를 지휘하면서 2018년 FIFA 올해의 감독,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및 글로브 사커 올해의 감독 및  IFFHS 선정 세계 최우수 대표팀 감독을 수상했다.



75위 엔초 베아르초트

 


생년월일: 1927년 9월 26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질문은 없습니까?"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경기 지휘 감독으로 유벤투스의 트라파토니와 토리노의 루이지 라디체가 창안한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공간 활용을 하는 전술이라는 뜻의 조나 미스타를 전술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선수들의 유동적인 포지션 체인지와 지역방어 및 대인방어의 복합적 사용을 바탕으로 상대 공격 체제를 혼란시켰다.

토리노 유스팀과 AC 프라토와 같은 유스 및 하부리그 클럽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 U-23팀을 거쳐 1975년 이탈리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는 4위에 올랐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주포 베테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2년간 공백 기간을 가졌던 공격수 파올로 로시를 적극 신뢰했는데 그는 조별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브라질전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폴란드전 멀티골 및 결승전 서독전에서도 득점하며 무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로시 기용 및 조별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언론이 팀을 흔들 때도 선수들과 언론의 접촉을 완벽하게 차단했고 결국 월드컵 우승이라는 결과를 낸 뒤에 열린 기자 회견에서 베아르초트는 싸늘한 눈초리로 기자들에게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질문은 없습니까?"라는 단 한마디만 던졌고 기자들은 유구무언이었다.



74위 부야딘 보슈코프

 


생년월일: 1931년 5월 16일
국적: 세르비아
주 소속팀: UC 삼프도리아

'미라클 삼프도리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명장으로 밀란의 아리고 사키가 보여준 4-4-2 시스템을 팀의 실정에 맞게 잘 활용했으며 그의 밑에서 활약하던 지안루카 팔류카가 남긴 말에는 "보슈코브는 위대한 코치이면서도 굉장히 지적이며 위대한 심리학자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선수들의 마음을 잘 다뤘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출신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보슈코프는 1974-75 시즌 에레데비시의 약체 ADO 덴하흐의 KNVB컵 우승을 이뤄내 주목받았고 페예노르트와 레알 사라고사를 거쳐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아 1979-80 시즌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1980-8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세계적인 명장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보슈코프의 진가는 UC 삼프도리아 지휘봉을 잡으면서 보여줬는데 삼프도리아에서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 2회 진출해 1989-90 시즌 우승을 이뤄내 팀을 컵 대회의 강자로 올렸고 1990-91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듬해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사후인 2021년에는 삼프도리아에서 보여준 업적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3위 콘스탄틴 베스코프

 


생년월일: 1920년 11월 18일
국적: 러시아
주 소속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실리주의에 대응하던 마지막 낭만파'

선수 시절에는 소련 축구 태동기를 이끌었고 감독 시절에는 소련 축구의 중흥을 이끌었던 명장으로 또 다른 소련의 명장이자 시스템과 규율을 강조했던 로바노프스키와는 반대로 선수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중점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지향했다.

1963년 소련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UEFA 유로 1964에서 준우승을 기록했지만 당시 소련의 절대 권력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나라에게 졌다는 이유로 격분했고 결국 베스코프는 당국의 압박을 받고 불명예스럽게 사임했지만 1964-65 시즌 조랴 루한스크에 부임해 지난 시즌 21위였던 팀을 3위로 끌어올려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재기에 성공해 소련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77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감독으로 부임한 베스코프는 로바노프스키가 이끌던 디나모 키이우와 라이벌리를 이루며 1979년과 1987년에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준우승은 5회를 차지했다. 다소 이상적으로 운영했음에도 현실적으로 운영한 로바노프스키에 크게 꿀리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으로 불렸다.



72위 닐스 리드홀름

 


생년월일: 1922년 10월 8일
국적: 스웨덴
주 소속팀: AS 로마

'거미줄 전술의 창시자'

선수 시절엔 그레노리 삼총사로 밀란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던 인물로 감독이 된 이후에는 지역 방어 시스템과 짧은 패스 위주의 토털 풋볼을 로마에 도입했는데 소위 거미줄로 알려진 전술인 일련의 수평 패스를 사용해 상대의 정형적인 수비형태를 무너트려 혼란시켰는데 리드홀름의 경기에 대한 해석은 상대의 움직임을 예방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개별적으로 기술을 펼치는 것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좋은 기술을 갖춘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선호했다. 그리고 선수들 사이에서 단결된 팀 분위기를 조성하는 능력과 젊은 재능을 육성하는 부분에도 능숙했다.

AC 밀란에서 은퇴한 뒤에 네레오 로코 휘하에서 수석코치를 지냈고 그가 떠나자 감독을 맡았던 리드홀름은 이탈리아의 여러 클럽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다가 1977년에 다시 돌아온 AC 밀란에서 1978-7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AS 로마 2기 시절에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코파 이탈리아 3회 우승 및 1982-83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써내렸는데 특히 그가 구성한 디 바르톨로메이-토니뉴 세레주-파우캉-브루노 콘티의 다이아몬드 라인은 유럽 정상급의 테크닉을 가진 중원으로 평가받았다.

AS 로마에서 큰 성공을 뒤로 하고 친정팀 AC 밀란 3기를 맡은 리드홀름은 승격 후 어려움을 겪던 AC 밀란의 지휘봉을 세 번째로 잡아 1984-85 시즌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파올로 말디니의 재능을 간파하고 데뷔시켰지만 세리에 A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내며 사키에게 밀려났다. 여담으로 리드홀름은 Body-as-temple 훈련법을 개발해내며 트레이닝 분야의 선구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71위 프란츠 베켄바우어

 


생년월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데어 카이저'

1980년대 하반기의 서독 대표팀의 약진을 이끈 명장으로 지도자 라이선스도 없이 선수시절의 명성을 바탕으로 감독으로 부임했음에도 선수시절부터 장점으로 꼽혔던 전술안을 잘 활용했는데 특히 전력상 우위의 상황에서 굳히는 부분에서 장기를 드러냈으며 카이저라 불렸을 정도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스타플레이어들을 아우르며 원 팀으로 만들었다.

전임자 데어발이 UEFA 유로 1984에서 탈락한 뒤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급하게 감독으로 부임한 베켄바우어는 데어발 시절부터 이어진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결승에 올랐고 유로 1988에서도 비록 네덜란드에게 석패하며 4강에서 탈락했지만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대망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다들 수비적인 축구로 일관할 때 화려한 공격 축구로 UAE, 유고슬라비아,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티아, 잉글랜드를 연파하며 결승에 갔으며 결승전에서는 과거 스승 헬무트 쇤이 크루이프를 봉쇄하기 위해 포그츠를 맨 마킹을 붙였던 것을 착안해 부흐발트를 마라도나 지우개로 붙이는 등 뛰어난 수싸움 능력을 보여줬다.

조국 독일의 통일 선물로 월드컵을 바친 베켄바우어는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올림피크 마르세유의 리그앙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4년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감독 대행 도중에 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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