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Top 10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Top 10

토르난테 2024. 3. 1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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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10위 로베르토 바조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신성한 말총머리'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중 한 명이자 아주리의 판타지스타 계보를 이끈 장본인으로 현란한 발재간과 창의적인 패싱력과 뛰어난 슈팅 스킬을 보여주며 뛰어난 온 더 볼 능력을 보여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판타지스타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데뷔해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바조는 1992-93 시즌 UEFA컵 우승과 1994-95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UEFA컵과 세리에 A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인해 발롱도르와 옹즈도르,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음은 물론 기량이 쇠퇴했다고 비판받았던 1995-96 시즌에도 세리에 A 도움왕에 올랐다. AC 밀란, 인테르  밀란, 그리고 브레시아 칼초에서도 리그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경쟁자 만치니의 부진으로 주전으로 도약한 바조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공격진을 이끌며 5골을 득점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지만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가 실축함으로써 팀은 패했고 월드컵 실버볼과 실버슈를 수상 받은 것과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그간의 공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1994년에 그가 결승전 직전까지 보여줬던 활약상은 축구계로부터 인정받아 1994년 발롱도르와 옹즈도르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3위에 올랐다.



9위 호세 마누엘 모레노

 


생년월일: 1916년 8월 3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기병사령관'

194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리버 플레이트의 공격 조합으로 남미를 떨게 했던 라 마키나의 핵심적인 선수였다.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것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마라도나 등장 이전까지는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페데르네라, 라브루나와 함께 라 마키나의 시대를 이끈 모레노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을 포함해 14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냈으며 멕시코,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를 돌아다니면서도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라 알비셀레스테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모레노는 2차 세계 대전과 아르헨티나와 피파의 갈등으로 인해 월드컵에서 활약은 펼치지 못했지만 194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라 마키나 멤버들을 지휘하며 전승 우승을 달성했으며 1942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준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1947년에 국가대표에 복귀하여 디 스테파노와 함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고 MVP를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8위 칼하인츠 루메니게

 


생년월일: 1955년 9월 25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Mr. Europe'

198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피지컬 활용 능력과 드리블, 슈팅, 헤더 모두 우수했으며 공격수로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공격수임과 동시에 우수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겸비한 완성형 선수였으며 독일의 펠레라 불리며 80년대 유럽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74년에 데뷔해 1970년대 황금기 막바지부터 활약했던 루메니게는 암흑기를 거치며 다시 돌아온 브라이트너와 함께 브라이트니게 시대를 이끌며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을 각각 두 번 우승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도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80-8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도 올랐고 이후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도 세리에 A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무대를 호령했던 루메니게 개인도 키커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7회 선정되었으며 옹즈 몽디알이 선정한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 5회 선정 및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8회 선정 및 옹즈도르 2회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1978 멕시코 월드컵에 처음 주전으로 출전했던 루메니게는 UEFA 유로 1980에서 차원이 다른 기량을 보여주며 핵심 선수로 우승해 발롱도르를 획득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부상을 달고 뛰었음에도 5골이나 기록하며 월드컵 준우승과 브론즈 볼을 수상했음은 물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7위 엑토르 스카로네

 


생년월일: 1898년 11월 26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공포의 마법사'

브라질엔 펠레와 호나우두, 아르헨티나엔 마라도나와 메시가 있다면 우루과이엔 스카로네가 있었다.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했으며 특히 골 결정력과 동료들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일품이었기에 192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으며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클루브 나시오날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스카로네는 로마노와 함께 트리콜로리스의 공격을 이끌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과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도합 22개의 우승 트로피를 따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누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26-27 시즌에는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임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로 1917 코파 아메리카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하며 득점왕과 MVP를 모조리 석권했으며 총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뒀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2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6위 주세페 메아차

 


생년월일: 1910년 8월 23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판타지스타의 시조'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추앙받는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창의적이며 정확한 패스에서 나오는 찬스 메이킹, 그리고 직접 슈팅하거나 헤딩을 활용한 득점력도 우수했다.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주세페 메아차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처음에는 선배들의 무시를 당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선배들을 승복시켰는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메아차 개인도 리그와 미트로파컵, 코파 이탈리아를 포함해 무려 일곱 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한 인테르 밀란은 자신의 홈 구장의 이름을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명명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던 주세페 메아차는 인사이드 포워드 파트너 지오반니 페라리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선발로 뛰며 우승한 유이한 선수였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후자의 대회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지휘하며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5위 에우제비우

 


생년월일: 1942년 1월 25일
국적: 포르투갈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SL 벤피카

'흑표범'

1960년대 남미의 펠레에 대한 유럽의 대답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공격수에게 필요한 능력은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슈팅 능력만큼은 당대 최고의 선수 펠레를 능가했으며 찬스 메이킹 능력과 드리블 돌파 능력도 당대 유럽 최고의 수준이었다.

벤피카 통산 최다 득점자 에우제비우는 프리메이라 리가 11회 우승과 타사 데 포르투갈 5회 우승 및 유러피언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72-73 시즌에는 코엘류, 토니, 시몽에스 등과 함께 무패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에우제비우 개인도 리그 득점왕 7회 수상, 유러피언 컵 득점왕 3회 수상 등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음은 물론 1965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커리어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도 불세출의 활약을 펼친 에우제비우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과 전통의 강호 헝가리를 밀어내고 조 1위로 8강에 진출해 북한을 상대로 4골을 넣으며 0-3 패배를 5-3으로 뒤집으며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득점왕까지 차지했음은 물론 실질적인 대회 MVP로 평가받기도 했다.



4위 푸스카스 페렌츠

 


생년월일: 1927년 4월 1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질주하는 소령'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유럽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선수로 오른발과 헤딩을 하지 못했음에도 오직 왼발로만 축구계를 평정했으며 뚱뚱한 체구와는 다르게 빠른 스피드를 보유했으며 우수한 볼 컨트롤과 테크닉, 그리고 공격을 주도하는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특히 드래그 백을 실전에서 처음 상대한 선수로 유명했다.

매직 마자르 시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헝가리 대표팀 통산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린 푸스카스는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우승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5년간 진행된 중유럽컵에서도 우승은 물론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1954 서독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서독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고생했고 이 여파로 준우승에 머물렀음에도 ESPN이 선정한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헝가리 혁명을 외세인 소련군을 불러 진압한 헝가리 정부에게 실망해 스페인에 망명하면서 매직 마자르 시대를 끝내기도 했다.

클럽에서는 넴제티 버이녹샤그의 혼베드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위대한 족적을 남긴 푸스카스는 헝가리 리그 득점왕 4회와 라리가 득점왕 4회, 그리고 유러피언 컵 득점왕 2회에 올랐으며 넴제티 비어녹샤그 5회 우승, 라리가 5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3회 우승을 기록했으며 1960년에는 남미의 왕 페냐롤마저 물리치고 인터콘티넨탈컵을 우승했다. 심지어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만 4골을 기록했으며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남미의 왕 페냐롤을 이긴 2차전에서 5분 만에 선제골을 넣으며 5-1 대승에 크게 공헌했다.



3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생년월일: 1926년 7월 4일
국적: 아르헨티나 → 콜롬비아 → 스페인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금빛 화살'

축구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선수로 평가받는 인물로 60년대를 수놓은 명장 에레라의 말을 빌리면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이며 훌륭한 수비수였다."라는 표현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아르헨티나 시절에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낸 디 스테파노는 대표팀에서도 1947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FIFA의 갈등으로 콜롬비아 국적을 취득한 뒤 엘도라도라 불리던 콜롬비아 무대의 미요나리요스에서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콜롬비아 역시 FIFA로부터 징계를 받자 스페인으로 떠난다.

스페인 시절인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개인의 전성기는 물론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며 라리가 8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5연패를 포함해 총 1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으며 라리가 득점왕 5회 수상과 라리가 올해의 선수에 4회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한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에서도 월드컵 개막 직전에 부상당하며 월드컵과의 악연을 끝내지 못했다.

 


2위 요한 크루이프

 


생년월일: 1947년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FC 아약스

'토털풋볼을 연주하는 모차르트'

토털풋볼을 추구하는 미헬스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그는 최전방 공격수의 위치에서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지휘하며 토털 풋볼을 구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 특히 타고난 재능이 대단해 리누스 미헬스는 그를 두고 "크루이프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마!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라고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아약스에서 위대한 성공신화의 시작을 알린 크루이프는 미헬스와 함께 일명 '신의 아들들'을 이끌며 구단의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1971-72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유러피언 컵 3연패와 에레데비시 8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크루이프 개인도 1971-72 시즌에는 에레데비시와 유러피언 컵, 그리고 KNVB컵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왕 트레블을 이뤄냈고 그의 아약스 시절 등번호 14번은 그가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FC 바르셀로나에서도 들어올린 우승컵은 리그 우승 한 번과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에 불과했지만 미헬스의 토털 풋볼을 처음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크루이프는 이후 바르샤는 토털 풋볼을 기초로 다시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크루이프 개인도  돈 발롱이 선정한 라리가 올해의 선수에 두 번 선정되었다. 크루이프는 양 팀을 통틀어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12회 선정되었고 특히 1971년과 1973년, 그리고 1974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오랑예에서도 불후의 업적을 쌓은 크루이프는 1970년대 네덜란드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1974 서독 월드컵과 UEFA 유로 1976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서독 월드컵에서는 남미의 3대 강호인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모두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앞두고 가정사가 생겨 참가하지 못한 부분은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1위 펠레

 


생년월일: 1940년 10월 23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축구의 신'

명실상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압도적인 운동신경과 훌륭한 축구 지능은 물론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산투스를 구단 역사 최고의 황금기로 이끈 펠레는 팀의 에이스로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10번이나 우승했으며 전국리그에서도 5연패를 포함한 6회 우승을 달성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연패를 기록하며 당대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1962년에는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전국리그를 모두 석권함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당대 남미 최강의 팀인 페냐롤을 꺾으며 트레블을 달성했고 추가로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유럽 최강의 팀인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를 꺾는 기염을 토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고 신인상과 실버볼을 차지했다. 이후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보내며 역대 최고의 대표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하며 대회 MVP를 수상하며 우월함이 무엇인지 만천하에 보여줬다. 

펠레는 프랑스 풋볼이 추산한 명예 발롱도르를 7회 수상했으며 1959년에는 공식전과 비공식전을 합쳐 127골을 득점하며 FIFA 집계 한 해 최다 득점으로 기록되었으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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