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100위~9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100위~91위

토르난테 2024. 3. 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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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100위 파울리노 알칸타라

 


생년월일: 1896년 10월 7일
국적: 필리핀 → 스페인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56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스페인과 필리핀의 혼혈 선수로 마른 체형과는 다르게 엄청난 슈팅 파워로 인해 1922년 4월 30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35 야드 거리에서 골을 넣었는데, 네트가 찢어지며 골네트 파괴자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두 번째는 1922년 5월 20일 경기에서 또 네트를 찢었으며 엄청난 슈팅 파워와 중거리 슈팅 능력 이외에도 드리블로 풀어나가는 능력도 능했다.

바르셀로나로 입단했다가 필리핀에서 떠나 다시 돌아와 에이스로 군림한 알칸타라는 바르셀로나에서만  399경기에 나서 395골을 기록했고 카탈루냐 주립 리그에서 10회 우승했으며 전국 대회인 코파 델 레이에서도 5회 우승을 기록하는 괴력을 펼쳐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특히 최고 전성기라 평가받는 1921-22 시즌에는 24경기에 출전해 45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선보인 파울리뉴 알칸타라는 카탈루냐 챔피언십에서 19골을 득점하며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전국 대회인 코파 델 레이에서도 8강전 세비야와의 2차전 해트트릭, 준결승전 히혼과의 2차전 해트트릭 및 결승전에서도 레알 우니온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하며 우승과 대회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99위 루이 반 헤게

 


생년월일: 1889년 5월 8일
국적: 벨기에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5kg
주 소속팀: 위니옹 생질루아즈

벨기에 축구가 배출한 최초의 스타 공격수로 주로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활약했는데 현란한 발재간과 뛰어난 패싱력을 겸비해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다.

자국 리그의 로열 우니온 생질루아즈에서 벨기에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도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공식전 91경기에 나서 98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던 반 헤게는 대표팀에서도 1920 앤드워프 올림픽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렸다.

 

 

98위 마히코 곤살레스

 


생년월일: 1958년 3월 13일
국적: 엘살바도르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카디스

자타공인 엘살바도르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디에고 마라도나에 견줄만한 드리블 능력의 소유자로 마법과도 같이 찬스를 만들어낸다 하여 마법의 곤살레스라는 뜻의 마히코 곤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엘살바도르 무대에서는 데포르티보 FAS에서 활약하며 정규리그 5회 우승을 이뤄낸 마히코 곤살레스는 라리가 무대에서는 카디스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동시대에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했던 디에고 마라도나는 그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일생동안 봐온 선수 중 최고를 뽑으라면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로 종종 FC 바르셀로나의 이적제안을 받았다.

엘살바도르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하며 1982 스페인 월드컵 지역예선 통과에 큰 공을 세운 마히코 곤살레스는 1999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엘살바도르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97위 카를 데커

 


생년월일: 1921년 9월 5일
국적: 오스트리아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퍼스트 비엔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축구계의 간판 중 한 명이자 당대 유럽 정상급 인사이드 라이트로 유려한 플레이메이킹을 바탕으로 공격을 지휘했으며 우수한 스피드와 준수한 헤더를 바탕으로 많은 득점을 터트렸다.

퍼스트 비엔나에서 15년간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린 데커는 정규리그 3회 우승 및 1943년 정규리그와 포칼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빈데르 개인도 오스트리아 리그 득점왕에 2회 올랐고 1944-45 시즌에는 포칼 득점왕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리그 통산 229경기에 출전해 255골을 득점하는 대기록을 세운 데커는 안슐루스 시절에는 독일 대표팀에 8경기에 출전해 8골을 득점했고 해방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25경기에 출전해 19골을 득점했다.

 


96위 요한 슈투드니카

 


생년월일: 1883년 10월 12일
국적: 오스트리아
신체조건: 키 167cm
주 소속팀: 비너 AC

중유럽 최초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최초의 펄스 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린 인물로 일반적인 센터 포워드와는 다르게 박스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아래의 위치에서 패스와 드리블을 통해 경기를 풀어나갔던 아름다우면서도 기술적인 다뉴브 스타일의 시조라 평가받는다.

비너 AC의 원 클럽맨이었던 슈투드니카는 정규리그 4회 우승 및 챌린지 컵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슈투드니카 개인도 1902년과 1903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축구의 선구자와도 같았던 요한 슈투드니카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했는데 독일을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며 5-1 대승을 이끌어냈다.



95위 유리 조르카에프

 


생년월일: 1968년 3월 9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프랑스의 전설적인 수비수 장 조르카에프의 아들로 1990년대 후반에 이름을 날린 전천후 공격수로 지네딘 지단에 버금가는 테크니션이었는데 우수한 테크닉과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 두 명 정도는 제치는 교묘한 드리블과 공격 진영에서 공격수에게 킬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부분은 물론 슈팅스킬도 우수해 시저스킥과 발리킥으로 많은 원더골을 터트렸으며 중앙과 측면을 가리지 않았다.

AS 모나코 소속으로 1990-91 시즌 쿠프 드 프랑스 우승과 1993-94 시즌 리그앙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았던 조르카에프는 1995-96 시즌에는 파리 생제르맹 소속으로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7-98 시즌에는 인테르 밀란 소속으로 1997년 인테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는데 선봉의 호나우두, 사모라노와 함께 공격 편대를 구성해 UEFA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을 세웠다.

레 블뢰에서도 지단과 함께 2선을 구성하며 아트사커의 시대를 열었던 조르카에프는 UEFA 유로 1996에서 조국을 준결승에 올려놓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지단이 퇴장당해 결장하는 기간 동안 플레이메이커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지단이 돌아온 뒤에는 조력자로서 우승에 기여했다. UEFA 유로 2000에서도 지단, 앙리와 공격편대를 구성해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며 2001 컨페드컵에서도 우승하며 아트사커의 시대를 열었다.



94위 스테판 사퓌자

 


생년월일: 1969년 6월 28일
국적: 스위스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스위스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로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처진 스트라이커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으며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적절한 위치 선정에 이어 예리한 슈팅으로 마무리했던 공격수로 차범근이 세운 역대 외국인 최다골 기록을 갈아치웠었던 선수다.

히츠펠트 체제의 도르트문트의 황금기를 이끈 에이스 사퓌자는 분데스리가 2연패 및 DFB슈퍼컵 2연패를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92-93 시즌 UEFA컵에서 유벤투스에게 패해 준우승을 거뒀지만 1996-9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설욕에 성공해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다. 사퓌자 개인도 1991-92 시즌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1993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9위에 오른 사퓌자는 스위스 대표팀의 재도약을 이끈 일등 공신인데 28년 만에 본선진출을 이끌었음은 물론 본선에서도 루마니아전 승부를 결정짓는 골을 득점하며 16강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은퇴한 이후에는 스위스 축구협회로부터 지난 50년 동안 스위스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93위 막스 모를로크

 


생년월일: 1925년 5월 11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FC 뉘른베르크

1950년대 독일 무대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날렸던 인사이드 라이트로 우수한 볼 간수 능력과 드리블 돌파로 수비진을 교란하는데 능했으며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득점에도 능했다.

소속팀 뉘른베르크에서는 1920년대에 영광의 시대를 이끈 하인리히 슈툴파우트와 함께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모를로크는 남부 오베리가 6회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2회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61년에는 독일 챔피언십 우승을 이끈 활약을 인정받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뉘른베르크의 홈구장 이름을 막스 모를로크 스타디온으로 이름을 바꿨을 정도로 팬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를로크는 디 만샤프트에서도 1954 스위스 월드컵 서독 대표팀의 주전 멤버로 프리츠 발터와 함께 2선을 구성해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92위 요시프 스코블라르

 


생년월일: 1941년 3월 12일
국적: 크로아티어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올림피크 마르세유

1960년대 동유럽과 프랑스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공격수로 공격진에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로 우수한 테크닉과 적절한 위치 선정 이후 날카로운 마무리를 겸비해 팬들로부터 '달마시아 해변의 독수리'라 불렸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중견팀 OFK 베오그라드에서 주로 활약했음에도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며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주전 멤버로 활약했는데 조별리그 우루과이전 동점골로 3-1 역전승에 기여하며 조국을 준결승에 올려놓는 맹활약을 펼쳤다.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해외 무대에 도전해서는 하노버와 마르세유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특히 마르세유에서는 1970-71 시즌에 마르세유의 리그앙 우승을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36경기에 출전해 44골을 득점하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고 이후에도 1971년 슈퍼컵 우승과 1971-72 시즌 리그앙 및 쿠푸 드 프랑스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리그앙과 쿠프 드 프랑스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1972-73 시즌에도 리그앙 득점왕을 재차 차지하며 세 시즌 연속으로 리그앙 득점왕을 차지했다. 스코블라르 개인도 프랑스 리그앙 단일 시즌 최다 득점 보유자이자 리그앙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2회 수상했다.

 

 

91위 호르헤 브라운

 


생년월일: 1880년 4월 3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알룸나이

아르헨티나 축구 태동기를 연 스코틀랜드 혈통의 축구 스타로 우수한 체격과 높은 수준의 기술을 바탕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주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였지만 최전방 센터 포워드부터 후방의 센터 하프백과 양 풀백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알롬나이에서 전성기를 보낸 브라운은 알롬나이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9회 우승을 포함해 20개의 트로피를 이끌었으며 말년에 잠시 머문 킬메스에서도 1912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도 20경기 넘게 나섰으나 그가 활약하던 당시에는 코파 아메리카도 없던 시절이라 메이저 대회 출전 기록은 없다.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90위~8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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