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30위~2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30위~21위

토르난테 2024. 3. 17. 16:54
728x90
728x90

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30위 아돌포 페데르네라

 


생년월일: 1918년 11월 1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펄스 나인 역할을 하며 라 마키나의 5인 스위칭 플레이를 주도했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공격진 전원을 지휘하는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높은 전술안을 활용한 경기 설계력을 자랑하며 엘 마에스트로라 불렸으며 이때의 활약으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우상이 되기도 했다.

리버 플레이트의 황금기를 이끈 라 마키나의 리더였던 페데르네라는 팀의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5회 우승을 포함해 1936 골드컵 우승을 포함해 국내에서 크고 작은 트로피를 총 11개를 들었으며 우루과이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 다오에서도 4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에 빠지자 엘도라도라 불리는 콜롬비아 무대의 미요나리오스에서도 디 스테파노, 네스트로 로시 등과 함께 정규리그 4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와 라 마키나의 활약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이어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에 활약하던 축구선수라 월드컵 기록은 없지만 페데르네라는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46년 대회에서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29위 알베르트 플로리안

 


생년월일: 1941년 9월 15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60년대 헝가리를 대표하는 인사이드 포워드이자 처진 공격수로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민첩한 몸놀림과 탁월한 센스를 활용해 팀 공격을 이끌었으며 드리블과 패스, 슈팅에 모두 능한 완벽한 공격수였다.

선수 생활 전부를 페렌츠바로시에서 보낸 원 클럽맨인 알베르트는 넴제티 버이녹샤그 4회 우승 및 1964-65 시즌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 그리고 1972년 마자르 쿠파 우승을 이뤄냈고 특히 1967년에는 리그에서 27경기 28골을 기록했으며 인터시티 페어스 컵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보여주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헝가리 대표팁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알베르트는 1960 로마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8강 진출을 이뤄내며 개인적으로도 공동 득점왕과 신인상을 수상했고 UEFA 유로 1964 3위, 1966 잉글랜드 월드컵 8강, UEFA 유로 1972 4위 등 마자르 군단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뤄냈는데 특히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펠레의 브라질을 탈락시키기도 했다.

 

 

28위 쿠발라 라슬로

 


생년월일: 1927년 6월 10일
국적: 헝가리 → 스페인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아이돌이라는 별명에 맞게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플레이로 명성을 날렸는데 힐 패스나 드래그백 후 패스 같은 고난도 기술도 서슴없이 구사했으며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를 능가하는 발재간 능력과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를 활용해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고 득점력도 준수했다.

페렌츠바로시에서 활약하다가 헝가리 공산정부의 박해를 피해 탈출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1951년부터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쿠발라는 라리가 4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5회 우승을 포함해 총 13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며 레알 마드리드의 디 스테파노와의 라이벌리는 라리가를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같이 활약했으나 성과는 적었다.

쿠발라 개인도 마르카 평점 기반 라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으며 1957년에는 발롱도르 5위에 올랐으며 1999년에는 클럽 창단 100주년 선성 바르셀로나 팬들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바르셀로나 선수로 선정되었다.

 

 

27위 라울 곤살레스

 


생년월일: 1977년 6월 27일
국적: 스페인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000년대 상반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공격수였으며 빼어난 슈팅 스킬, 탄탄한 기본기, 정확한 판단력과 영리한 축구 지능은 물론 지치지 않는 지구력까지 겸비한 만능형 공격수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라울은 라리가 6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샬케로 이적해서도 2010-11 시즌 DFB포칼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라는 호성적을 이뤄냈고 라울 개인도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에 5회 선정되었으며 라리가 득점왕인 피치치상을 2회 받았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UEFA 클럽 올해의 공격수 3회 수상 및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2회 수상이라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다.

클럽에서는 영광의 시대를 보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아쉬운 시대를 보냈다. 다만 개인 기량은 훌륭해 유로 2000에서는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이에로가 보유하고 있던 스페인 대표팀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갱신했었다. 세 번의 월드컵과 두 번의 유로에 참가했다. 라울은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0위 안에 여섯 번 들었으며 2001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다.

 


26위 데니스 베르캄프

 


생년월일: 1969년 5월 10일
국적: 네덜란드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아스날 FC

1990년대 네덜란드 대표팀의 에이스로 부드러운 볼 터치와 날카로운 슈팅을 바탕으로 초년에는 포처로 이름을 날렸으며 아스날에서는 한층 더 성장하며 탄탄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연계 플레이를 바탕으로 팀의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에서 데뷔해 제2의 반바스텐이라 불린 베르캄프는 KNVB컵 2회 우승과 1989-90 시즌 에레데비시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86-87 시즌 UEFA 컵 위너스컵과 1991-92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우며 당대 최고의 무대 세리에 A의 인테르 밀란에서 클린스만의 대체자로 그를 영입했으나 부진한 활약을 펼쳐 비판을 받은 이후 아스날로 이적했으며 아스날에서 다시 전성기를 보내며 2003-04 시즌 무패 우승과 1997-98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프리미어리그 우승 3회, FA컵 우승 4회를 이뤄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에 진출했다.

이뤄낸 팀 커리어 뿐만이 아니라 개인으로도 많은 영광을 누린 베르캄프는 아약스에서는 1990년 네덜란드 올해의 신인상을 시작으로 에레데비시 득점왕 3회,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 2회에 올랐음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992년에 3위, 1993년에 2위를 기록하며 포디움에만 두 번 오르는 위용을 뽐냈고 부진했다는 인테르 밀란 시절에도 UEFA컵 득점왕에 올랐고 아스날에서는 1997년 피파 올해의 선수 3위에 올랐으며 1997-98 시즌 PFA 올해의 팀과 FWA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석권했다.

오렌지 군단의 에이스로 UEFA 유로 1992를 포함해 세 번의 유로와 두 번의 월드컵에 참가한 베르캄프는 첫 대회인 UEFA 유로 1992에서 준결승 진출 및 대회 올스타 팀에 올랐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준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그리고 UEFA 유로 2000에서도 재차 준결승에 올랐다.



25위 케니 달글리시

 


생년월일: 1951년 3월 4일
국적: 스코틀랜드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리버풀 FC

1980년대 유럽 정상급 공격수로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보유하는 동시에 우수한 드리블 능력까지 보여주는 선수였으며 측면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감아차기로 수많은 득점을 만들어냈다.

셀틱이 스코틀랜드 무대에서 독주하던 시절 데뷔한 달글리시는 스코티시 풋볼 리그와 스코티시 컵을 각각 4회 우승했고 1975-76 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은 달글리시는 에이스 케빈 키건을 함부르크에 내준 붉은 제국 리버풀에 입단해 키건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며 붉은 제국이라 불렸던 왕조의 중흥기를 이끌어 풋볼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를 포함해 20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왕조를 세웠고 달글리시 개인도 PFA 올해의 팀 5회 선정 및 FWA 올해의 선수에 2회 선정되었으며 1982-83 시즌에는 PFA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되어 1983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다.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도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던 달글리시에 대해 라이벌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달글리시는 모든 면에서 케빈 키건보다 뛰어난 선수였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키건은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수상한 전설적인 선수였으며 이 발언을 라이벌 팀의 감독이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이 가능하다.



24위 올레흐 블로힌

 


생년월일: 1952년 11월 5일
국적: 우크라이나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디나모 키이우

야신과 함께 소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팬들로부터 화살이라 불렸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맹활약했으며 크루이프에 비견될 정도로 우수한 볼 컨트롤과 드리블을 활용한 화려한 개인기를 보여줬으며 신체 밸런스마저 훌륭한 완벽한 포워드였다.

디나모 키이우에서 명장 로바노프스키의 지도를 받으며 선수생활 대부분을 보낸 블로힌은 소련 탑 리그 우승 8회와 소비에트컵 5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대항전에서도 1974-75 시즌과 1985-86 시즌의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전자의 대회 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슈퍼컵에서는 베켄바우어와 게르트 뮐러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발롱도르 수상을 이뤄냈다. 후자의 대회에서는 팀 동료 벨라노프, 자바로프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으며 소련 탑 리그 최다 출전자 및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남겼다.

블로힌 개인도 개인 통산 소련 탑 리그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13회 선정되었으며 소련 올해의 선수 3회 수상 및 우크라이나 올해의 선수 9회 수상, 소련 탑 리그 득점왕 5회 수상 등 업적을 이뤄냈고 소련 대표팀에서도 핵심 멤버로 활약하며 두 번의 하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고 두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23위 오마르 시보리

 


생년월일: 1935년 10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3cm / 몸무게 59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기 세계 최고의 판타지스타 중 한 명으로 뛰어난 볼 컨트롤과 드리블로 수비진을 교란했으며 매서운 왼발 슈팅으로 직접 득점하기도 했으나 규율과 규칙을 싫어하고 브라질 선수들과 사이가 나빠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리버 플레이트에서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연패를 이뤄내며 모레노, 디 스테퍼노와 같은 선배들과 동급의 풍격을 보이며 주목받은 시보리는 이때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하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이때 시보리와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들은 팬들로부터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렸고 시보리는 그 핵심이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한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벤투스에 합류했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존 찰스, 보니페르티와 함께 마법의 삼총사를 구성해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각 3회씩 우승했고 1959-60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으며 특히 1960-61 시즌에  데르비 디탈리아에서는 인테르를 상대로 혼자서 여섯 골을 퍼부으며 9-1이라는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때의 활약을 발판으로 1961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말년에는 나폴리에서도 활약했다.



22위 쉬로서 임레

 


생년월일: 1889년 10월 11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5cm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1910년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받으며 국내외에서 각종 기록을 보유한 뛰어난 인사이드 포워드로 각종 기록을 보유했던 엄청난 득점력은 물론이고 공격 전반을 지휘하는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했던 선수다.

넴제티 버이녹샤그에서도 각종 기록을 보유한 쉬로서는 페렌츠바로시와 MTK 헝가리아에서 모두 전성기를 누렸는데 두 클럽에서 각각 넴제티 버이녹샤그 6회 우승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넴제티 버이녹샤그 12회 우승을 기록했음은 물론 쉬로서 개인도 리그 득점왕 6년 연속 수상을 포함해 개인 통산 리그 7회 득점왕에 올랐으며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연속 유럽 최다 득점자에 오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넴제티 버이녹샤그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최다 우승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년 동안 헝가리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한 쉬로서는 다섯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음은 물론 세계 최초로 A매치 50경기를 달성했고 A매치 50골도 세계 최초로 달성했으며 푸스카스가 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30년 넘게 세계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21위 마누엘 세오아네

 


생년월일: 1902년 3월 19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60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작고 뚱뚱한 체구를 가졌으나 1920년대 아르헨티나를 대표했던 공격수로 키가 작았지만 경합 능력과 헤딩 스킬이 우수해 헤더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볼 다루는 기술이 빼어났으며 정확한 양발 슈팅과 우수한 패스 센스를 가진 인사이드 포워드였으며 또한 체형 때문에 다소 느린 스피드를 보완하기 위해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는 지능적인 플레이를 선호했다.

인디펜디엔테 구단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세오아네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포함해 공식대회 통산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수상하며 당대 아르헨티나 축구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특히 1922년에는 리그 39경기에 출전해 51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뽐냈는데 리그 득점 2위 안토니오 두아르테와는 무려 29골 차이라는 압도적인 득점차로 득점왕을 수상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대회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조국에게 3회 우승은 선물했음은 물론이고 1925년 대회에서는 우승, 득점왕, MVP의 트레블을 이뤄냈으며 1927년 대회에서도 MVP에 올랐고 1929년에도 우승 멤버로 이름을 남기는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40위~3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20위~11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