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20위~1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20위~11위

토르난테 2024. 3. 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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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위 토스탕

 


생년월일: 1947년 1월 25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크루제이루

하얀 펠레라 불렸던 197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유럽의 크루이프에 대한 남미의 대답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완벽한 전술안과 경기장 전체를 망라하는 드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었으며 상대 마킹맨을 농락하는 탈압박 능력과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겸비한 공격수였다.

크루제이루에서 전성기를 보낸 크루제이루의 왕 토스탕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5회 우승 및 1966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 과정에서 전국리그 5연패를 이뤄냈던 펠레의 산투스를 상대로 1차전 6-2 대승 및 2차전 3-2 역전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모두 득점포를 가동했고 토스탕 개인도 1970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음은 물론 남미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셀레상에서도 1970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 크게 공헌한 토스탕은 왕이라 불린 펠레의 뒤를 이어 부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손 등 전설적인 선수가 다수 포진했음을 감안하면 토스탕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망막박리라는 치명적인 안구 질환으로 인해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했는데 이는 브라질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 토스탕은 짧은 기간 굵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이를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누렸다.

 

 

19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생년월일: 1966년 2월 8일
국적: 불가리아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자타공인 불가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화려한 볼 컨트롤 능력과 뛰어난 왼발 슈팅력은 물론 우수한 공간 활용 능력을 통해 수많은 득점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던 공격수였다.

CSKA 소피아와 FC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낸 스토이치코프는 CSKA 소피아에서는 불가리아 리그 3회 우승과 불가리안 컵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리그 득점왕에 2회 올랐고 바르셀로나에서는 드림팀 1기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라리가 4연패를 포함해 5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1-92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1996-97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과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내는 등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면 불가리아 축구에서는 아예 역사를 새로 쓰는 활약을 보여줬던 스토이치코프는 항상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던 불가리아를 데리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는 활약을 했다. 스토이치코프 개인은 득점왕에 올랐으며 준결승에 오르는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멕시코, 독일을 모조리 이기고 올라왔는데 특히 아르헨티나와 독일은 각각 지난 월드컵 준우승팀과 우승팀이었다. 이 대화에서의 활약으로 스토이치코프는 대회 골든슈와 브론즈볼, 그리고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연말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발롱도르 수상 이외에도 스토이치코프는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불가리아 올해의 선수 5회 수상, 1992년 옹즈도르 1위 수상을 이뤄냈으며 은퇴 뒤인 2004년에는 UEFA 주빌리 어워드에 선정되며 불가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18위 마리오 켐페스

 


생년월일: 1954년 7월 1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발렌시아 CF

1970년대 하반기 남미 최고의 공격수로 투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저돌적인 드리블, 그리고 뛰어난 찬스 메이킹과 득점력을 모두 겸비한 미래형 공격수였다.

로사리오 센트랄에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에 2회 올랐던 켐페스는 발렌시아로 떠나 라리가 득점왕 2회 수상 및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으며 1978-79 코파 델 레이 우승과 1979-80 컵 위너스컵 우승과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루는데 공헌했고 남미로 돌아가서는 리버 플레이트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에 공헌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활약은 더 빛났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6골 2도움, 그리고 18회의 찬스 메이킹과 43번의 드리블 성공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며 팀의 우승에 이끌며 득점왕과 골든볼까지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판정 시비로 비판받았지만 그 누구도 켐페스의 훌륭한 활약만큼은 부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존중받았으며 그 해의 활약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는 물론 남미 올해의 선수와 옹즈도르, 그리고 훗날 선정한 명예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

 

 

17위 케빈 키건

 


생년월일: 1951년 2월 14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70년대 하반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체격은 작았으나 단단한 근육질 몸매로 몸싸움을 잘했으며 공격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만능 공격수였으며 우수한 헤더와 득점력은 물론 천재적인 플레이메이킹 능력마저 겸비했다.

리버풀과 함부르크에서 전성기를 보낸 키건은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풋볼 리그 3회 우승과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개인적으로도 PFA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1975-76 시즌에는 FW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77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2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당대 잉글랜드 프로축구무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함부르크에서는 19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과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했던 키건은 세 시즌 간 머물면서 세 시즌 모두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여섯 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네 번이나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고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하는 저력을 토했으며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에도 사우스햄튼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1981-82 시즌 PFA 올해의 팀과 올해의 선수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삼사자 군단에서는 UEFA 유로 1980과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 키건이지만 상술했던 클럽에서의 엄청난 커리어로 인해 발롱도르를 2년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는 4회 선정되었으며 은퇴한 이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6위 히데구티 난도르

 


생년월일: 1922년 3월 3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펄스 나인의 한 계보로 평가받았고 공격형 미드필더의 중시조로 평가받기도 했던 인물로 상대 수비를 유인한 뒤 창의적인 패싱력에서 나오는 찬스메이킹을 바탕으로 푸스카스와 코치슈와 연계해 상대 수비진을 공략하는 팀 전술의 핵심으로 활약했음은 물론 득점력 자체도 우수해서 유인에 실패하더라도 직접 득점을 노릴 수 있었다.

MTK 헝가리의 에이스로 넴제티 버이녹샤그에서는 혼베드의 푸스카스와 라이벌리를 이뤘던 히데구티는 소속팀 MTK 헝가리아에서 300경기에 넘게 출전해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5 미트로파 컵에서는 9골을 넣으며 팀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활약을 보여줬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푸스카스, 코츠시스와 함께 매직 마자르의 전술적 핵심으로 활약한 히데구티는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중유럽컵 우승,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 준우승을 이뤘지만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기는 1953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매치였는데 이 경기에서 히데구티는 삼사자 군단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홈 무패의 삼사자 군단을 6-3으로 무너트리는데 크게 기여한다.



15위 앙투안 그리즈만

 


생년월일: 1991년 3월 21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0년대 프랑스의 아이콘으로 화려한 스타일의 포워드는 아니었지만 지능적인 공간 활용 능력 및 동료 활용 능력은 물론이고 왕성한 활동량을 활용해 헌신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강력한 킥력을 활용해 팀을 이끌었다.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데뷔해 주목받은 그리즈만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선,ㄴ 구단 역사상 최강의 선수로 평가받는데 비록 리그 우승은 없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과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개인의 퍼포먼스는 매우 대단해 호날두, 메시, 수아레즈, 네이마르 등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라 리가 MVP를 수상했으며 이외에도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에 2회 선정되었다. 이후 바르셀로나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코파, 플라티니, 지단에 이어 레 =블뢰의 제4의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 그리즈만은 UEFA 유로 2016에서는 조국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개인의 퍼포먼스는 경쟁자들과는 다른 차원이었기에 MVP와 득점왕을 석권하며 2016 올해의 프랑스 선수상을 받았고 발롱도르 3위에 올라 처음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우승에 큰 공을 세워 러시아 월드컵 실버 부츠와 브론즈볼, 그리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연말에 열린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그리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는 아쉬웠지만 결승전 직전까지는 조국을 결승에 올린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14위 앙헬 로마노

 


생년월일: 1893년 8월 2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10년대와 20년대 우루과이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드리블과 찬스 메이킹에 능했으며 주 포지션은 인사이드 레프트 및 아웃사이드 레프트였지만 골키퍼를 포함해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다재다능했으며 축구라는 스포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던 천재적인 토탈 플레이어였다.

클루브 나시오날 통산 득점 5위에 랭크된 로마노는 스카로네와 함께 트리콜로리스의 공격을 이끌며 1915년 5관왕을 포함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8회, 코파 데 아너 우승 3회, 그리고 코파 데 캄페텐시아 4회 우승, 그리고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도합 24회의 크고 작은 공식전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투어에서도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경쟁력을 보이는 등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황금기 초반부를 이끈 로마노는 코파 아메리카에서만 여섯 번 우승했으며 특히 1917년 대회와 1920년 대회에는 득점왕을 달성하기도 했고 올림픽에서도 1924 파리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며 한번 걸기도 힘들다는 금메달을 두번이나 걸었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세계 최초로 A매치 70경기를 달성하며 당시 A매치 출전 횟수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었다.



13위 요제프 비칸

 


생년월일: 1913년 9월 25일
국적: 오스트리아 → 체코슬로바키아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슬라비아 프라하

펠레, 게르트 뮐러, 호날두, 메시와 함께 축구 역사에서 가장 득점력이 좋은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100m를 10초 대에 주파하는 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 뒷공간으로 침투해 뛰어난 결정력으로 마무리하던 공격수였는데 단순한 포처가 아니라 훈련 시간에 묘기를 부렸다는 점을 보면 탁월한 드리블러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라피트 빈에서 데뷔해 정규리그 2회 준우승과 1933-34 시즌 리그 득점왕에 올라 처음 주목을 받았고 아드미라 빈으로 이적해서는 정규리그 2연패를 이뤄냈는데 이때의 활약으로 '분더 팀'이라고 불린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4위라는 성적을 냈다. 그러나 비찬의 아버지는 남부 체코 출신 이민자였고 어머니도 체코 쪽 혈통이었던 관계로 체코슬로바키아로 떠나고 싶어 했기에 비찬은 일방적으로 계약의 파기를 꺼내기에 이르렀고 아드미라는 비찬에게 4년의 출장 정지라는 초강수로 응수했기에 비찬을 영입하고 싶어 하던 슬라비아 프라하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거액의 이적료를 제시해서 출장 정지 징계를 깎으려 시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찬은 1937년 8월부터 슬라비아 프라하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비찬은 전성기 궤도에 오르며 엄청난 골 폭풍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슬라비아 프라하의 1938 미트로파컵 우승을 시작으로 정규리그 4연패를 포함한 5회 우승을 이뤄냈고 비찬 개인은 1938년 우승과 더불어서 미트로파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정규리그 득점왕을 무려 11회나 차지했다. 특히 1943–44 시즌에는 32경기에 출전해 76골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서도 14경기에 출전해 12골을 득점했으나 세계대전 기간인지라 국제대회는 나서지 못했다.



12위 히바우두

 


생년월일: 1972년 4월 19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악마의 왼발이라 불렸던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왼발 킥력과 뛰어난 득점력과 찬스 메이킹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공이 발에 붙어 다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드리블과 볼 컨트롤 능력이 발군이었는데 피지컬마저 강했다. 종합하자면 공격수로서의 기량과 플레이메이커로서의 기량이 모두 뛰어난 완성형 선수였다.

파우메이라스,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낸 히바우두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1994 시즌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브라질 세리 A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고 데포르티보에서는 라리가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으며 바르셀로나에서는 라리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7-98 시즌 라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라리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고 AC 밀란에서는 개인의 활약은 아쉬웠지만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셀레상에서는 파트너 호나우두와 함께 더 화려한 활약을 펼쳤던 히바우두는 1997 컨페드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이뤄냈고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해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해 트레블 팀 에이스인 베컴을 제치고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 그리고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호나우두, 호나우지뉴와 삼각 편대를 구성해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대회 올스타 팀과 실버슈를 수상했다.

 

 

11위 마티아스 진델라

 


생년월일: 1903년 2월 10일
국적: 오스트리아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펄스 나인의 중시조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선수로 몸싸움을 제외하고는 공격수로서 못하는 게 없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창의적인 플레이와 드리블 스킬이 뛰어나 그라운드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몸싸움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몸의 움직임이 빨라서 마치 바람에 날리는 종이같이 몸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종이 인간이라고도 불렸다.

당대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불렸던 진델라는 선수 생활 대부분을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보냈으며 1926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컵 대회 5회 우승과 미트로파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3년 대회 결승전에서는 주세페 메아차가 이끄는 인테르를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1차전에서는 패했지만 2차전에서는 해트르릭을 기록하며 역전 우승을 이뤄내는 괴력을 보였다. 진델라 개인도 1933년 대회를 포함해 미트로파컵 득점왕을 2회 수상했고 오스트리아 리그 득점왕은 3회 수상했기에 리그 우승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기량 자체가 워낙 훌륭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오스트리아 표팀에서도 유럽 대륙 최강이라 불렸던 분더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펄스 나인 역할을 맡아 수비를 유인한 뒤 인사이드 포워드인 안톤 샬이나 요제프 비칸에게 득점 찬스를 내주는 획기적인 플레이로 당대 수비의 정석인 대인 방어 시스템을 완벽하게 붕괴시키며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 및 2회 준우승을 이뤄냈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편파 판정 끝에 4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지만 진델라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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