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40위~3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40위~31위

토르난테 2024. 3. 1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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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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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40위 앙헬 라브루나

 


생년월일: 1918년 9월 28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40년대를 수놓은 라 마키나의 일원으로 빠른 스피드로 수비라인을 돌파하거나 팀원들과의 우수한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를 교란한 뒤 정확한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즐겼으며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대표팀에 뽑혔을 정도로 자기 관리 능력도 우수했다.

리버 플레이트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랭크된 라브루나는 모레노, 페데르네라와 함께 라 마키나라 불렸던 공격 조합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9회 우승을 포함해 1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성공적인 활약상을 보여줬고 개인적으로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라브루나는 라 알비셀레스테의 유니폼을 입고 1946년과 1955년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1958 스웨덴 월드컵 스쿼드에도 포함되었다.

 

 

39위 베베투

 


생년월일: 1964년 2월 16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0년대 브라질을 풍미한 정상급 공격수로 피지컬이 우수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재빠른 몸놀림, 그리고 우수한 골 결정력을 앞세워 활약했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의 플라멩구와 바스쿠 다 가마, 그리고 스페인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서 전성기를 누린 베베투는 플라멩구에서는 브라질 세리 A와 캄파오네투 카리오카 각각 1회 우승을 경험했으며 베베투 개인도  캄파오네투 카라오카 득점왕을 2회 수상했고 바스쿠 다 가마에서는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서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데 1992-93 시즌에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으며 팀 역사상 최초로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는데 기여하며 수페르 데포르티보 시대의 기틀을 쌓는데 큰 공을 세웠다.

셀레상에서는 소속팀에서는 라이벌이었던 호마리우와 함께 파트너를 형성해 명성을 날린 베베투는 1989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팀의 우승에 공헌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팀의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며 상술한 업적을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8위 세베리노 바렐라

 


생년월일: 1913년 9월 14일
A매치 기록: 24경기 19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베레모를 쓰고 경기하는 것을 즐겨 유령 베레모라 불렸던 선수로 1930년대 하반기 페냐롤의 전성기를 이끈 공격수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스트라이커를 겸했으며 우수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의 견제로부터 볼을 잘 지켜냈으며 특히 엄청난 점프력에서 나오는 강력한 헤더로 상대의 골망을 가르는 게 주특기였으며 킥력도 우수해 프리킥을 통한 득점에도 능숙했으며 무엇보다도 경기를 뛸 때에는 항상 투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리버 플레이트 몬테비데오에서 데뷔했으나 팀은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고 1935년에 페냐롤에 입단한 바렐라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고 보카에서도 라 마키나를 제치고 아르헨티나 무대를 평정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냈는데 특히 리버 플레이트와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6경기 5골을 기록하며 강한 면모를 보여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45년에 다시 페냐롤로 떠나 리그 2연패를 이뤄냈다.

특히 보카 주니어스 그를 잡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경기를 뛰고 우루과이에서 다른 일을 하는 투잡을 뛰는 그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보카는 급여를 대폭 인상해 재계약을 하려 했지만 그는 우루과이의 직장을 그만둘 수 없다면서 거절했으며 1945년에 CA 페냐롤로 돌아갈 때 보카는 그를 잡기 위해 계약금으로 백지수표를 내놓기도 했지만 바렐라는 내가 벌 수 없는 돈을 받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도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주전으로 나선 바렐라는 첫 대회인 1939년 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42년 대회에서는 옵둘리오 바렐라, 치오카, 포르타와 함께 우승을 이뤄냈다.

 

 

37위 찰리 버칸

 


생년월일: 1891년 9월 22일
A매치 기록: 6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선덜랜드

1910년대와 20년대에 걸쳐 잉글랜드 무대에서 활약하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큰 키와 우아한 테크닉을 겸비했으며 창의적인 패스로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으며 백힐과 같은 고난이도의 페인트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허버트 채프먼 감독에게 오프사이드 룰이 바뀌었으니 센터하프를 후방으로 내려 수비 강화를 조언했을 만큼 전술안도 탁월했음은 물론 신체적인 능력도 대단해 탄탄한 밸런스와 한혈마를 연상시키는 지구력으로도 유명했다.

선덜랜드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버칸은 1912-13 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우승 및 FA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순조롭게 활약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때는 군대에 복무했고 종전 이후에 다시 돌아와 1925년까지 선덜랜드에서 활약했는데 그 과정에서 1922-23 시즌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411경기에 출전해 222골을 기록했다. 말년에는 아스날에서 주전 공격수 겸 채프먼의 참모로 활약하기도 했다.

대표팀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경기에 나서진 못했지만 1912-13 시즌 브라티시 홈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했다. 버칸은 사후인 2013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6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생년월일: 1974년 11월 9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로 훌륭한 드리블 실력과 우수한 찬스 메이킹 능력, 그리고 정교한 슈팅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프리킥에 능해 델 피에로 존이라 불리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유벤투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델 피에로는 1994-95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세 번 진출해 1995-96 시즌에 우승하기도 했으며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로 세리에 B로 강등당했을 때도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잔류하며 결국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가 되었다.

유벤투스에서 팀 커리어도 화려하지만 델피에로는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ESM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으며 1997-9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1999-2000 시즌 세리에 A 도움왕, 2005-06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2007-08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으며 1998년과 2008년에는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과 1996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아주리에서는 대체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 4강전 독일전에서 연장전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하며 대표팀에서의 한을 풀어냈다.



35위 토마스 뮐러

 


생년월일: 1989년 9월 13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독일 축구의 아이콘으로 라움도이터라는 축구계의 신조어를 창안하게 했던 공간 활용의 달인이었으며 자신이 빈 공간으로 들어가 직접 득점을 하거나 동료들에게 좋은 공간을 제공해주며 골 찬스를 만드는 데에도 능했는데 티에리 앙리는 그를 두고 "화려한 개인기? 그런 게 축구가 아니다. 뮐러가 하는 게 바로 축구다. 내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면 나는 메시나 호날두가 아닌 뮐러를 보고 배우라고 할 것이다."라고 호평했다.

클럽 커리어를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으로 바이에른에서 분데스리가 10연패를 포함해 11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포칼 우승 6회와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를 기록하며 도메스틱 더블 4회와 트레블 2회를 모두 주전으로 이뤄내 3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토마스 뮐러 개인도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 4회 선정, 분데스리가 도움왕 4회 수상은 물론 바이에른 한 클럽에서만 200골 200도움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는데 한 클럽에서 200골 200도움을 기록한 선수는 공식적으로는 리오넬 메시와 토마스 뮐러가 유이하다.

독일 대표팀에서는 UEFA 유로에서는 약세를 보였지만 월드컵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뮐러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득점왕과 신인상, 대회 베스트 일레븐을 모조리 휩쓸었으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디 만샤프트의 월드컵 우승의 일등 공신으로 호평받으며 실버볼을 수상했다. 일각에서는 리오넬 메시 대신 토마스 뮐러가 골든볼을 받아야 했다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훌륭한 퍼포먼스였으며 이때의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2014년 발롱도르 5위에 랭크되었다.



34위 비비안 우드워드

 


생년월일: 1879년 6월 3일
A매치 기록: 23경기 29골
신체조건: 키 189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토트넘 핫스퍼

20세기 초반 잉글랜드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겸 센터 포워드로 압도적인 피지컬에서 나오는 위협적인 헤더와 유려한 테크닉과 저돌적인 움직임을 겸비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라인을 완벽하게 부수었음은 물론 패싱력과 스피드마저 우수했다.

프로로 활약하기보다는 아마추어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선호했던 우드워드는 풋볼 리그 1부의 여러 팀의 오퍼에도 불구하고 지역리그 및 풋볼 리그 2부에서 주로 활약한 토트넘 핫스퍼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말년에는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는 첼시에 머물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1914-15 시즌 이후에 은퇴했다.

삼사자 군단에서는 블루머와 함께 주축으로 활약하며 아마추어 리그에서만 활약했음에도 그가 당대 잉글랜드 최고였다는 걸 증명한 우드워드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A매치 25경기에 출전해 29골을 득점했고 잉글랜드 아마추어에서는 30경기에 출전해 45골을 득점했는데 A 대표팀에서는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5회 우승을 이뤄냈고 아마추어 팀에서는 1908 런던 올림픽과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2회 연속 우승하며 금메달을 두 번이나 목에 걸었다.



33위 스티븐 블루머

 


생년월일: 1874년 1월 20일
A매치 기록: 23경기 28골
신체조건: 키 173cm
주 소속팀: 더비 카운티

190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신장은 크지 않았지만 영리했으며 굉장히 날렵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써 슈팅을 날렸으며 특히 그의 주특기는 데이지 커터라고도 불렸던 낮게 깔리면서도 매우 강력했던 슛이라고 전해지며 이 슈팅을 활용해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줬다.

더비 카운티와 미들즈브러에서 이름을 날리며 잉글랜드 풋볼 리그 득점왕을 5회 수상했으며 특히 더비 카운티에서는 경기장에 자신의 흉상이 제작되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응원가가 클럽 공식 응원가로 존재할 정도로 더비 카운티 팬들에게는 클럽의 올타임 레전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23경기에 나와 28골을 득점하는 경이로운 득점력을 보여줬다.



32위 젱겔러 줄러

 


생년월일: 1915년 12월 27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우이페슈티 도사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헝가리를 대표하던 공격수로 기술적인 드리블 실력과 정확한 패스를 바탕으로 동료들과 연계 능력도 뛰어났음은 물론 시즌 50골을 두 번이나 넘었을 정도로 압도적인 득점력을 자랑했다.

자국 리그의 우이페슈티에서 정규리그 4회 우승을 이뤄낸 젱겔러는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1936-38 중유럽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샤로시와 함께 에이스로 호흡을 맞춰 후자의 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는 호성적을 이뤄냈지만 1947년에 공산주의에 반대해 헝가리를 떠나 대표팀 생활이 끊겼다.

헝가리 넴제티 버이녹샤그 득점왕 5회 및 1939년과 1945년에는 헝가리를 넘어 유럽 리그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린 젱겔러는 1938-39 시즌에는 정규리그와 미트로파컵 우승은 물론 젱겔러 개인도 32경기에 나와 65골을 기록하는 경악스러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넴제티 버이녹샤그와 미트로파컵에서 모두 득점왕에 올랐다.

 

 

31위 호세 피엔디베네

 


생년월일: 1890년 6월 5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우루과이 축구 초창기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보여줬기에 팬들로부터 마법사라 불렸지만 정작 피엔디베네는 효율적인 플레이를 강조해 효율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갔으며 득점포를 가동하는 부분에도 뛰어났음은 물론 공격지역 전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볼을 잃은 상황에서는 바로 상대 수비수로부터 볼을 다시 빼앗는 수비적인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클럽 커리어 전체를 페냐롤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피엔디베네는 20년 동안 팀에 머물며 라이벌 구단 클루브 나시오날의 에이스 앙헬 로마노, 엑토르 스카로네, 페드로 페르토네 등과 라이벌리를 이뤄 활약하며 아우리네그로스의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6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13개의 트로피를 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팬들의 대단한 지지를 받아 아우리네그로스 최초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페냐롤의 마법사 피엔디베네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센터 포워드와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활약하며 코파 아메리카에서 1916년 초대 대회부터 총 4회 출전해 1916년과 1917년, 그리고 1919년에 우승을 조국의 이뤄냈으며 특히 1920년 대회에서는 대회 MVP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우루과이의 축구 기자 디에고 로세토는 그를 두고 "신이 내린 마스터, 공격의 지배자, 패스의 왕, 헤딩의 군주, 감베타의 황제, 드리블의 제왕, 작은 나무토막의 왕 만세"라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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