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60위~5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60위~51위

토르난테 2024. 3. 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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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위 밀란 갈리치

 


생년월일: 1938년 3월 8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K 파르티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린 인사이드 포워드로 기술적인 드리블과 섬세한 볼 컨트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우수한 신체 밸런스를 활용한 몸싸움과 양발과 머리를 가리지 않는 득점력도 대단해 수비수의 입장에서는 막기 어려운 선수였다.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산하팀인 파르티잔에서 전성기를 누린 갈리치는 유고슬라비아 리그 4회 우승 및 1965-66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으며 대표팀 은퇴 이후에는 벨기에의 스탕다르 리우제와 프랑스의 스타드 드 랭스에서도 활약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갈리치는 UEFA 유로 1960 준우승을 이뤄내며 대회 득점왕과 팀 오브 토너먼트를 석권했고 1960 로마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거는 과정에서 득점왕까지 석권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대한민국을 홈과 원정에서 모두 꺾고 올라온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세큘라라치, 예르코비치와 공격 편대를 이루며 준결승 진출을 이끌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8위에 올랐고 그 해에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체육인에게 주는 골든 벳지를 받았다.

 

 

59위 알란 시몬센

 


생년월일: 1952년 12월 15일
국적: 덴마크
신체조건: 키 165cm / 몸무게 60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덴마크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화려한 드리블과 빠른 스피드로 작은 몸을 커버했으며 득점력도 훌륭했던 선수로 작지만 큰 덴마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주 포지션인 처진 공격수 뿐만 아니라 라이트윙도 훌륭하게 소화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FC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특히 전자의 클럽에서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뤄내며 분데스리가 3연패와 포칼 1회 우승, 그리고 UEFA컵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과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개인적으로도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으며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후자의 클럽에서는 코파 델 레이 우승과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덴마크 대표팀 멤버로서도 1972 뮌헨 올림픽 멤버로 활약했으며 숙장이 되었던 1980년대 중반에 UEFA 유로 1984와 1986 멕시코 월드컵에도 덴마크를 대표해 출전했으며 은퇴한 이후에는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8위 비센테 데라마타

 


생년월일: 1918년 1월 1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1940년대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공격 자원으로 볼 다루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으며 우수한 축구 지능을 토대로 본 포지션인 인사이드 포워드는 물론 양 아웃사이드 포워드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중앙과 측면을 가리지 않고 대포알같은 슈팅을 날렸다.

인데펜디엔테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사스트레, 에리코와 함께 삼각 편대를 구축해 활약한 데라마타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냈다.

데라마타의 활약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이어졌는데 1937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큰 공을 세우며 대회 MVP를 수상했고 이후 1945년과 1946년 코파 아메리카에사도 중앙과 측면을 오가는 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기여했기에 코파 아메리카 3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57위 안톤 샬

 


생년월일: 1907년 6월 22일
국적: 오스트리아
신체조건: 키 165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아드미라 바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 세계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주 포지션인 인사이드 포워드 이외에도 아웃사이드 포워드나 풀백으로도 종종 기용되었다.

아드미라 바커에서 전성기를 누린 샬은 통산 353경기 304골을 기록했는데 개인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무려 5회 수상했고 팀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7회 우승 및 컵대회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안슐루스 이후에도 1938-39 시즌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및 독일 챔피언십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냈다.

분더 팀이라 불렸던 1930년대 초반 유럽 최강 오스트리아의 핵심으로 활약한 샬은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준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대표팀에서는 독일과 스위스를 상대로 2회의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헝가리와 벨기에를 상대로 2회나 포트트릭을 기록했다.

 


56위 에두아르드 스트렐초프

 


생년월일: 1937년 7월 21일
국적: 러시아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토르페도 모스크바

소련의 펠레라 불린 러시아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로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돌파와 허를 찌르는 킬러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데 능했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백힐 패스를 사용했던 선수 중 하나라 당대 소련에서는 백힐 패스를 스트렐초프 패스라 불렀다.

1955년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소비에트 탑 리그 득점왕을 수상해 혜성처럼 등장한 스트렐초프는 소련 대표팀의 1956 멜버른 올림픽 축구종목 우승을 이뤄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후에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성폭행 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 쓰며 글라크 노역형을 선고받고 약 7년간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억울함이 밝혀져 사면된 뒤에도 오랜 기간 축구를 쉬었음에도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과시하며 소속팀 토르페도 모스크바의 1965 시즌 소련 탑 리그 우승과 1968 시즌 소비에트 컵 우승을 이뤄낸 스트렐초프는 소련 탑 리그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고 1967년과 1968년에는 소비에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55위 에른스트 쿠조라

 


생년월일: 1905년 10월 16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로얄 블루스에게 중원에 스체판이 있다면 공격에는 쿠조라가 있었다. 정교한 드리블과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슈팅력을 모두 갖췄으며 공격진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였으며 레비어 더비가 독일 내에서 치열해진 이유로는 나치가 쿠조라가 도르트문트로 이적할 수 있다는 루머를 퍼트려서였다는 설도 있었을 정도였다.

1930년대 샬케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공격진의 핵심이자 주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쿠조라는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11회 우승과 6번의 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6-37 시즌에는 독일 챔피언쉽과 DFB포칼을 동시에 우승하며 샬케를 독일 최초의 도메스틱 더블 팀으로 올려놓았다. 쿠조라 개인도 샬케 구단 역대 최다 득점과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되었으며 1999년에 선정된 샬케의 세기의 일레븐과 명예의 주장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다만 쿠조라는 디 만샤프트에서 큰 족적을 남기진 못했는데 감독 오토 네르츠가 자신의 성향과 샬케 선수들이 맞지 않아서 그들을 기용하지 않기도 했지만 쿠조라의 제외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네르츠가 쿠조라에게 "너는 독일 대표팀을 위해 뛰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자 쿠조라가 "내 엉덩이나 핥아라"라고 응수하자 이에 분노해 뽑지 않아 쿠조라의 대표팀 커리어는 초라했다.



54위 로베르토 만치니

 


생년월일: 1964년 11월 27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UC 삼프도리아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선수로 전형적인 판타지스타로 매혹적인 드리블과 우수한 패스를 활용해 팀의 공격을 이끄는데 능했으며 슈팅도 제법 날카로워서 몇몇 사람들은 그가 디에고 마라도나보다도 낫다는 격찬을 하기도 했다. 

삼프도리아에서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낸 만치니는 코파 이탈리아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며 4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9-90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은 물론 1990-91 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91-92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연장 혈투 끝에 크루이프의 바르샤에게 아쉽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만치니 개인도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 초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군림했는데 구에린 도르 2회 수상, 1996-97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와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를 수상했으며 말년에 에릭손 감독을 따라 라치오로 이적한 뒤에도 1999-2000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1998-99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1999년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다.
 
아주리에서도 1980년대 후반에 주전으로 활약하며 유로 1988에서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팀을 4강에 올린 만치니는 1990 월드컵에도 처음엔 주전으로 출전했지만 부진으로 인해 신성 로베르토 바조와 이 대회의 신데렐라 살바토레 스킬라치한테 밀리며 벤치에서 대회 3위를 경험했다.



53위 스체판 보베크

 


생년월일: 1923년 12월 3일
국적: 크로아티아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FK 파르티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걸쳐 이름을 날렸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우수한 테크닉을 활용한 드리블과 넓은 시야와 우수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허를 찌르는 패스로 기회를 만들어 동료를 지원하거나 기가 막힌 슈팅으로 직접 득점에도 능한 만능 공격수였다.

센터 포워드로 데뷔해 크로아티아의 여러 팀을 떠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방부 소속 클럽인 파르티잔 FK에서 인사이드 포워드로 포지션을 바꾼 뒤에 전성기를 맞은 보베크는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2회 우승 및 유고슬라비아 컵 4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52년 컵 결승전에서는 더비 라이벌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맞대결에서 6-0 대승을 이끌었다. 보베크 개인도 리그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하이두크의 부카스,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미티치와 함께 활약하며 1948 런던 올림픽과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보베크 개인도 구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A매치 통산 최다 득점자로 영원히 남았다.



52위 베르나르드 부카스

 


생년월일: 1927년 5월 1일
국적: 크로아티아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하이두크 스플리트

1950년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에이스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과 라인 침투를 이용해 상대의 골문을 노리는 것이 주특기였으며 볼을 다루는 기본기와 축구 지능도 높아 주 포지션인 아웃사이드 포워드는 물론이고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포워드의 위치에서 모두 뛸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여러 팀을 떠돌다가 하이두크 스플레트에서 전성기를 맞은 부카스는 1952년 무패 우승을 포함해 정규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1948 런던 올림픽과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모두 결승에 진출해 금메달을 노렸으나 전자의 대회에서는 그레노리 삼총사에게, 후자의 대회에서는 매직 마자르 군단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팀의 주포로 활약했다.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구스타브 세베슈, 제프 헤어베르거 같은 당대의 명장이나 프리츠 발터,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레이몽 코파와 같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으며 특히 난도르 히데구티는 그를 두고 "세계 최고의 팀을 만든다면 누가 센터 포워드를 맡았을지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거 같네요. 제 선택은 확실히 부카스입니다."라고 칭찬했다.

 

 

51위 올드리히 네예들리

 


생년월일: 1909년 12월 26일
국적: 체코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스파르타 프라하

1930년대 유럽 정상급 인사이드 레프트로 평가받는 네예들리는 특유의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과 잘생긴 외모로 인해 체코의 수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엄청난 득점력과 유려한 연계 플레이를 겸비했음은 물론 중요한 순간에 클러치 능력도 대단했다.

스파르타 프라하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보낸 네예들리는 체코슬로바키아 1부 리그 4회 우승 및 5회 준우승을 기록했고 중유럽의 챔피언스리그와 같았던 미트로파 컵에서도 1935년에는 레이몽 브라인과 호흡을 맞춰 우승을 이뤄냈고 이듬해에도 결승에 올랐다. 네예들리 개인도 스파르타 프라하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서도 팀의 중핵으로 활약한 네예들리는 두 번의 월드컵과 세 번의 중유럽컵에 참가했는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1라운드 루마니아전 결승골, 8강 스위스전 결승골, 그리고 준결승 독일전 해트트릭을 득점하며 5골을 득점해 팀을 결승에 올리고 개인적으로는 득점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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