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70위~6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70위~61위

토르난테 2024. 3. 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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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70위 주세페 시뇨리

 


생년월일: 1968년 2월 17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90년대 세리에 A 최고의 골잡이 중 하나로 매서운 왼발 킥력과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수비진을 공략하고 상대 골망을 뒤흔들었다. 특히 프리킥과 페널티킥에 능했는데 보통은 도움닫기 동작 이후 킥을 차지만 시뇨리는 디딤발만 딛고 페널티 킥을 찼다. 그리고 1994년에는 아탈란타와의 경기에서 왼발 프리킥만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0년대 7공주라 불리던 치열한 세리에 A 무대에서도 최고 레벨의 공격수로 평가받았는데 불행하게도 시뇨리가 활약하던 시기의 라치오는 밀란과 유벤투스의 황금기에 맞물려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지만 시뇨리 개인은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했고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2번이나 기록했으며 특히 1993년에는 세리에 A 최우수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지만 황금기의 시작을 이끈 스벤예란 에릭손이 삼프도리아에서 데려온 만치니를 중용하면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라치오를 떠나 볼로냐에서 제2의 전성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아주리에서는 바조의 존재로 인해 주로 4-4-2 체제의 레프트윙으로 출전했는데  투톱의 처진 공격수 및 스리톱의 윙포워드와 다르게 잘 적응하지 못하며 부진했는데 결국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우측의 도나도니가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백업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69위 루벤 소사

 


생년월일: 1966년 4월 25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중반에 활약한 우루과이의 스타 공격수로 골 찬스를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원터치플레이와 좁은 공간에서의 세밀한 드리블로 이름을 날렸으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강한 커브를 날려 팀 내에서 프리킥을 전담했음은 물론 아크로바틱한 득점으로 골의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중소 구단 다누비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일찍이 유럽 무대에 진출한 루벤 소사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1985-86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대회 우승을 이뤄냈고 라치오를 거쳐 인테르 밀란에서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1993-94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고 베르캄프, 판체프 같은 유럽 무대 정상급 공격수들을 상대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으나 1995년 기점으로 폼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87년과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9년에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승팀 브라질의 호마리우와 베베투를 제치고 대회 MVP를 수상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68위 페드로 세아

 


생년월일: 1900년 9월 1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센트럴 아틀레티코 리토

1920년대 중후반과 1930년대 초반 남미 무대 최고의 인사이드 레프트로 우수한 볼 테크닉을 활용한 교묘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교란시키는데 능했으며 올림픽 결승전과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였다.

전성기는 중소 구단인 센트럴 아틀레티코 리토에서 보낸 세아는 우승에 대한 열망으로 1929년 클루브 나시오날로 이적해 활약하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낸 것을 포함해 다수의 친선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의 전성시대를 이어간 세아는 1923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해 우승을 차지했으며 1924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했으며 파리 올림픽에서는 4강전이던 네덜란드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2:1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고 결승전에서도 득점포를 가동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활약하메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초대 월드컵에서는 4강전에서의 해트트릭과 결승전에서의 동점골을 포함해 총 5골을 득점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67위 아마리우두

 


생년월일: 1939년 6월 29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60년대 브라질과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수로 작은 몸집에서 착안해 꼬마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작고 마른 체구로 몸싸움에는 약했지만 대단한 순간 스피드와 민첩한 몸놀림을 화려한 빠른 방향전환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접촉을 피하며 상대 수비수를 따돌렸으며 감각적인 볼 컨트롤 능력과 우수한 슈팅 스킬까지 장착해 마무리와 연계에도 강점을 드러냈다.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리우 데 자네이루 주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으로 이름을 날린 아마리우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1년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에도 올랐고 1962년에는 전국 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나 파우메이라스와 산투스에 밀려 전국리그 우승은 이뤄내지 못했다. 셀레상에서도 1962 칠레 월드컵에서 펠레의 백업으로 참가했으나 펠레의 부상으로 인해 주전으로 활약하며 가린샤, 자갈루, 지지, 니우통 산투스 등 보타포구 출신의 선수들과 함께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펠레의 존재 때문에 대표팀에서 그의 입지는 한계가 있었기에 브라질 무대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무대로 향한 아마리우두는 AC 밀란에서는 1966-67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피오렌티나에서는 1968-6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 구단에게 현재 기준으로 마지막 스쿠테토를 선사했고 이후 다시 브라질로 돌아와서는 바스쿠 다 가마에 머물며 전국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66위 차범근

 


생년월일: 1953년 5월 22일
국적: 대한민국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였으며 분데스리가에서도 통했던 우수한 피지컬과 파괴적인 슈팅으로 상대의 골문을 강타해 갈색 폭격기라 불렸으며 측면에서 찬스를 만들어내는 이타적인 플레이에도 능했음은 물론 다재다능해 공격적인 역할은 물론 인버티드 풀백 역할과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종종 수행했다.

서독 분데스리가에서도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전에서 각각 한 번씩 UEFA컵 우승 과정에서 핵심으로 활약했던 차범근은 이미 서독 분데스리가에 가기 전부터 대표팀에서 130경기를 뛰고 50골을 넘게 득점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나왔다. 분데스리가에서도 그 유명한 서독의 전설적인 레프트백 한스페터 브리겔과 라이벌리는 당대 분데스리가에서도 주목하는 매치업이었고 칼하인츠 루메니게와 루디 푈러 다음가는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실제로 차범근은 1979-80 시즌 전반기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키커 랑리스테 외국인 항목에서 케빈 키건을 제치고 월드클래스 1위를 받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는데 당연하게도 IFFHS 선정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 2002년 한국갤럽 선정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일레븐과 2010년 베스트 일레븐지 선정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일레븐을 모두 석권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통산 최다 출전과 최다 득점마저 기록한 명실상부 대한민국과 아시아 축구의 얼굴이다.



65위 지안프랑코 졸라

 


생년월일: 1966년 7월 5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첼시 FC

1990년대 하반기 이탈리아 최고의 판타지스타 중 한 명으로 어떤 플레이를 펼칠지 예측하기 어려워 팬들로부터 매직박스라 불렸으며 번뜩이는 센스와 우수한 심리전 능력에서 나오는 드리블 돌파는 물론 우수한 데드볼 능력도 겸비했다.

나폴리에서 1989-90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며 파르마에서 1994-95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낸 졸라는 30세가 넘어 첼시로 왔으나 오히려 이전보다 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FA컵 2회 우승, 1997-98 시즌 리그컵과 컵 위너스컵 더블 우승을 이끌며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1997년에는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8-99 시즌과 2002-03 시즌에는 첼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아주리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로베르토 바조와 로베르토 만치니의 그늘에 가려졌기에 백업 멤버로 1994 미국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으나 바조와 결승전 승부차기의 실축으로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서 민심이 나빠지고 설상가상으로 바조와 사키의 갈등마저 심화되었기에 UEFA 유로 1996에서는 카시라기와 함께 주전으로 참여했으나 그 대회 우승팀 독일과 준우승팀 체코에 밀려 탈락하는 등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64위 카를로스 테베스

 


생년월일: 1984년 2월 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2000년대 하반기와 2010년대 상반기에 활약했던 세계구급 공격수로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구를 가져 육탄전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으며 뛰어난 볼 키핑 능력과 황소 같은 저돌적인 드리블 돌파는 물론 기가 막히는 축구 센스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데 능했다.

초년에는 보카 주니어스의 2003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페르투라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큰 공을 세워 대회 MVP를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테베스는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2회 수상했고 2005년 이적한 코린치안스에서도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끌며 브라질 세리 A MVP와 대회 베스트 일레븐을 석권했음은 물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관문삼아 유럽 무대에 진출한 테베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리미어리그 2연패와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2008-09 시즌 준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2010-11 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유벤투스에서는 커리어 하이를 누렸는데 페르난도 요렌테와 공격 조합을 구축해 세리에 A 2회 우승 및 2014-15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2014년과 2015년 모두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고 2014-15 시즌에는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향수병으로 다시 남미의 보카 주니어스로 돌아가서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을 추가로 이뤄냈다.

화려한 클럽팀 커리어와는 다르게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는데 2004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끌었고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을 타냈을때까진 좋았지만 메시의 등장 이후로 벤치를 지키거나 메시와 동선이 겹치는 모습을 보이며 부진하기 시작했다.



63위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생년월일: 1969년 1월 19일
국적: 몬테네그로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1990년대 후반 유고슬라비아 출신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교묘한 드리블은 물론 발칸 반도의 속사포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우수한 슈팅 능력은 상대 골키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부두치노스트 포드고리차에서 데뷔해 파르티잔에서 1992-93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았던 미야토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해 발렌시아로 이적했는데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음에도 1995-96 시즌에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줬는데 라리가 40경기에 출전해 28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으며 1995-96 시즌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받으며 이때의 활약을 통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잠시나마 호나우두의 라이벌로 통했던 미야토비치는 1996-97 시즌 라리가 우승 및 1997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이뤄내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고  1997-98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며 우승을 이뤄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소속으로도 1998 프랑스 월드컵 16강 및 UEFA 유로 2000 8강에 올랐다.



62위 라이코 미티치

 


생년월일: 1922년 11월 19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츠르베나 즈베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주로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와 처진 공격수에 해당하는 인사이드 포워드 역할을 마았는데 기술적인 패스와 유려한 볼 컨트롤로 유명했으며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주장을 역임하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진 대표팀을 분란 없이 잘 이끈 훌륭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창립 멤버이자 초대 주장으로 활약하며 572경기에 나서 262골을 득점한 미티치는 구단에 머무는 동안 리그 6회 우승과 유고슬라비아 컵 5회 우승을 이뤄냈고 1958년에는 미트로파 컵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구단을 대표하는 주장이었던 미티치의 헌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츠르베나 즈베즈다 구단측은 그를 구단의 여섯 별 중 첫번째 별로 선정했으며 홈구장 이름을 스타디온 라이코 미티치로 변경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주장이자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미티치는 1948 런던 올림픽과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조국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지만 전자의 대회에서는 그레노리 삼총사에게, 후자의 대회에서는 매직 마자르에게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1950 브라질 월드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에도 참가해 후자의 대회에서는 조국 유고슬라아의 조별 리그 통과에 공헌했다.

 

 

61위 이고르 벨라노우

 


생년월일: 1960년 9월 25일
국적: 우크라이나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디나모 키이우

1986년 한 해에는 마라도나 다음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공격수로 뛰어난 운동 능력, 그중에서도 50m 5.7초에 끊었던 재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벗겨냈는데 볼 컨트롤 능력도 우수해 공을 잘 빼앗기지 않았다.

초르노모레츠 오데사에서 이름을 날려 당대 소련 최강의 클럽 디나모 키이우가 그를 영입했으며 디나모 키예프에서 전성기를 맞은 벨라노프는 팀의 소련 탑 리그 우승 2회, 소비에트 컵 3회 우승과 소련 슈퍼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5-86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에 공헌했는데 벨라노프 본인도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소련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벨라노우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지만 4-3으로 졌음에도 해트트릭을 하며 강력한 인상을 남겼고 이 시즌의 클럽 활약에 더해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86년에 발롱도르 수상과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 2위에 올랐고 UEFA 유로 1988에서도 조국의 결승행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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