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80위~7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처진 공격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80위~71위

토르난테 2024. 3. 1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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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위 톨디 게저

 


생년월일: 1909년 2월 11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30년대 하반기 헝가리 무대를 이끈 인사이드 포워드 겸 센터 포워드로 비록 볼 컨트롤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큰 키와 다부진 체구는 물론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까지 겸비해 공중볼 경합에서는 백전백승을 자랑했으며 강력한 슈팅과 침착한 마무리까지 겸비했다.

페렌츠바로시에서 샤로시 죄르지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끈 톨디는 넴제티 버이녹샤그 4회 우승 및 마자르쿠파 3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1-32 시즌에는 전승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뤄냈고 1937년에는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냈다. 톨디 개인도 1933-34 시즌 리그 득점왕 및 1938년 헝가리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게저는 1934 이탈리아 월드컵 8강 및 193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79위 로저 피앙토니

 


생년월일: 1931년 12월 26일
A매치 기록: 프랑스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스타드 드 랭스

1950년대 하반기 유럽 무대 최고의 인사이드 레프트 중 하나로 오른발을 거의 쓰지 못했지만 푸스카스에 버금가는 왼발 킥력, 그리고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빠른 민첩성을 활용해 상대를 농락했으며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낭시에서 데뷔해 1950-51 시즌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았던 피앙토니는 레이몽 코파의 대체자로 스타드 드 랭스로 이적해 구단의 전성기를 이어갔는데 리그앙 3회 우승과 1957-58 시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958-59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오른 피앙토니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다시 돌아온 코파, 그리고 1958 스웨덴 월드컵 득점왕 쥐스트 퐁텐과의 삼각 편대로 주목받았으며 1960-61 시즌에는 통산 두 번째 리그앙 득점왕에 올랐다.

레 블뢰 소속으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피앙토니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해 코파, 퐁텐, 장 뱅상, 비스니에스키와 공격 편대를 구성해 3골을 득점했으며 레 블뢰의 준결승 진출에 공헌했으나 펠레와 가린샤가 이끄는 브라질을 막을 수 없었다.

 

 

78위 로베르토 체로

 


생년월일: 1907년 2월 23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1930년대 남미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로 다부진 체구를 바탕으로 저돌적인 플레이로 이름이 높았는데 비슷한 체형의 대표팀 선배 마누엘 세오아네의 플레이를 교본으로 삼았는데 우수한 테크닉과 강력한 몸싸움을 겸비해 키가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헤딩 능력이 뛰어나 골든 헤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체로는 바라요, 베니테스와 함께 공격 편대를 구성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였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5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개인적으로도 득점왕을 3회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도 주전 멤버로 활약하다 부상으로 중도에 이탈하는 아쉬움을 겪었지만 1929년과 193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77위 프란시스코 바라요

 


생년월일: 1910년 2월 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1930년대 남미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로 단단한 체구와 민첩한 몸놀림을 겸비한 신체 능력과 기술적으로도 우수해 유려한 볼 컨트롤과 수비라인의 빈틈을 파고들어 강력한 슈팅으로 마무리 짓는 능력도 대단해 별명이 작은 대포였으며 페널티 킥에도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통산 22회의 페널티 킥 시도 중 18회를 성공시켰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바라요는 체로, 베니테스와 공격 편대를 구성해 활약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끌었고 1933 시즌에는 우승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바라요 개인은 리그 득점왕을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초대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을 준우승에 올려놓았으며 193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조국에게 우승컵을 선물했다. 여담으로 2010년 8월까지 생존해 만 100세까지 장수하며 초대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 중 최후의 생존자였다.

 


76위 알베르토 오하코

 


생년월일: 1889년 1월 12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라싱 클루브

초기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리그 시절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우수한 테크닉과 명민한 전술안, 그리고 빠른 스피드를 겸비해 상대의 뒷공간을 공략해 득점하는 부분에 능했다.

라싱 클루브의 원 클럽맨으로 구단의 창립자인 후안 오아코의 아들인 알베르토 오하코는 라싱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총 18회 우승하며 1910년대를 라싱 클루브의 시대로 만들었고 오아코 개인도 1912 시즌부터 1915 시즌까지 네 시즌 연속으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연속으로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오아코는 초대 코파 아메리카인 1916년 코파 아메리카와 1917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했으나 두 번 다 우루과이를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75위 훌리오 리보나티

 


생년월일: 1901년 7월 5일
국적: 아르헨티나 →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아르헨티나 출신의 오리운디로 주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포워드 자리에서 활약했는데 효과적인 전진 드리블과 우수한 볼 컨트롤에서 나오는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로 무수한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직접 득점하는 부분에도 능한 만능 공격수였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데뷔해 활약한 리보나티는 1921년 팀의 지역 정규리그인 코파 니카시오 빌라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22전  21승 1패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으며 전국단위 컵대회인 코파 이바르구렌에서는 정규리그 우승팀 우라칸을 상대로 팀의 3-0 대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공격의 핵으로 활약한 리보나티는 팀이 득점한 5골 중 3골을 득점하며 조국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다.

또한 리보타니는 축구 역사상 최초의 대륙 간 이적의 주인공이었는데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이적해서 발론차에라와 함께 구단의 첫 전성기를 이끌며 1927-28 시즌 토리노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리보나티 개인도 35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도 올랐고 아주리에서도 1927-30 중유럽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우승을 이뤄내는 공을 새웠으며 6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74위 데이비드 잭

 


생년월일: 1898년 4월 3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아스날 FC

축구 역사상 최초로 1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한 인물로 1920년대 잉글랜드 무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평가받았는데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적절한 원터치 플레이와 효율적인 드리블 돌파로 상대 수비진을 교란시켰으며 우수한 슈팅스킬을 겸비해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하부리그에 머물던 플리머스 아가일에서 데뷔해 1부 리그의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해 여덟 시즌을 보내며 FA컵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두 대회 결승전에서 모두 선제골을 득점하며 자타공인 볼턴 원더러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이름을 남겼다.

볼턴에서의 대단한 활약으로 1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로 이적한 아스날에서도 초창기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우며 1929-30 시즌 FA컵 우승 및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3회 우승을 포함해 총 여섯개의 대회에서 우승했고 사후에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 100인의 레전드에 선정되었다.



73위 빌리 워커

 


생년월일: 1897년 10월 28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83cm
주 소속팀: 아스톤 빌라

1920년대 잉글랜드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압도적인 득점력과 유려한 공격 전개로 이름을 날렸는데 데뷔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선수 생활 전부를 아스톤 빌라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워커는 공식전 529경기에 출전해 245골을 득점했는데 1919-20 시즌 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23-24 시즌에는 준우승을 이뤄냈고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서도 준우승을 2회 이뤄냈다.

당시 팀 내에서 그의 지분은 압도적이었기에 팀 동료 토미 스마트는 그 시대의 아스톤 빌라를 두고'빌리 워커와 10명의 들러리들'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가치가 높은 선수였는데 삼사자 군단에서도 암흑기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72위 레이비냐

 


생년월일: 1949년 9월 11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리버풀에서 활약하던 루카스 레이바의 삼촌으로 펠레와 토스탕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 브라질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뛰어나진 못했지만 기습적인 상대 페널티 박스로 침투한 뒤 과감하게 오른발로 해결했으며 점프력도 뛰어나 헤더로 득점하는 부분에도 능했다.

10대 시절에 포르투게사 소속으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31경기 36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보여주며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 레이비냐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1970년대 초반, 1970년대 초반, 제2의 아카데미아, 불멸의 소대라 불렸던 파우메이라스 구단 제2의 황금기의 공격을 이끌었는데 이때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과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을 이뤄내며 팬들로부터 오 헤이, 즉 왕이라고 불리며 늙었던 펠레와 실명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한 토스탕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셀레상에서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1974 서독 월드컵 스쿼드에 소집되었지만 주 포지션이 라이트윙인 자이르지뉴와 중앙 공격수 자리를 두고 경쟁했으나 밀려나며 백업 멤버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대회 이후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에도 1976-77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71위 콰렌치냐

 


생년월일: 1933년 9월 15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7cm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브라질 무대에서 활약했던 공격수로 민첩한 몸놀림과 엄청난 반응속도를 지녔으며 벼락같은 왼발 슈팅과 우수한 볼 컨트롤까지 겸비해 상대 수비수들을 쥐락펴락했던 공격수였다.

1962년 6관왕을 달성했던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442경기에 출전해 313골을 득점한 콰렌치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과 리우상파울루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콰렌치냐 본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3회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비토리아에서도 캄페오나투 바이아누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런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그는 셀레상에서 중용되지 못했는데 동일한 포지션에 주전으로는 펠레가 대기했으며 백업으로도 아마리우두, 주제 아우타피니 등 전설적인 공격수들이 여럿 있었기에 나올 때마다 좋은 활약을 펼쳐도 중용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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