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70위~6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센터백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70위~61위

토르난테 2024. 1. 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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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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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70위 안톤 온드루시

 


생년월일: 1950년 3월 27일
국적: 슬로바키아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잠시나마 베켄바우어와 라이벌리 구도를 그렸던 리베로로 강력한 공격가담 능력과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우수한 헤더로 명성을 떨쳤음은 물론 선수단을 아우르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클럽과 대표팀에서 다년간 주장직을 수행했다.

슬로바키아를 대표하는 명문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에서 이름을 날린 온드루시는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2연패를 이뤄냈으며 특히 1973-74 시즌에는 리그 우승에 이어 컵대회에서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서도 핵심 수비수로 이름을 날린 온드루시는 UEFA 유로 1976에서는 주장이자 에이스로 활약하며 크루이프를 앞세운 네덜란드와 베켄바우어가 이끄는 서독을 모두 격침시키고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이때의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 선정은 물론 1976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69위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생년월일: 1969년 2월 20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축구 역사상 프리킥을 가장 잘 차는 선수 중 한 명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난폭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원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중앙 수비수로 정착했던 선수로 강력한 피지컬을 기반으로 한 몸싸움 능력과 우수한 킥력으로 빌드업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데드볼 상황에서의 프리킥을 활용한 득점에도 능했는데 1998-99 시즌에는 라치오 소속으로 친정팀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프리킥 해트트릭을 달성했음은 물론 프리킥으로만 28골을 득점하며 피를로와 함께 세리에 역대 최다 프리킥 득점자 타이틀을 기록하고 있다.

1988-89 시즌 보이보디나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붉은 별 군단의 주목을 받았고 1990-91 시즌 후반기에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합류해 유고비치와 중원 조합을 구성해 활약하며 유고슬라비아 리그 2연패 및 1990-91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이탈리아로 떠났고 AS 로마에서는 다소 부진했지만 삼프도리아에서는 감독이었던 에릭손의 조언으로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활약하며 로마 시절의 슬럼프를 완벽하게 떨쳐냈다.

라치오에서는 뒤늦게 온 전성기를 보내며 1998-99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했고 여름에는 UEFA 슈퍼컵에서 퍼거슨이 이끌던 지난 시즌 트레블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1999-2000 시즌에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모두 제패하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으며 라치오에서 마지막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하며 팀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팬들에게 우승컵을 선물하고 떠났다. 미하일로비치 개인도 1998-99 시즌과 1999-2000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에 들었으며 1998-99 시즌에는 친정팀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프리킥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68위 벨리보르 바소비치

 


생년월일: 1939년 10월 3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AFC 아약스

196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리베로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불리는 강인한 정신력과 정교한 패싱력을 활용해 빌드업 과정에 크게 기여했고 뛰어난 전술 이해도를 자랑했으며 특히 훌륭한 리더십으로 외국인 용병임에도 아약스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파르티잔의 1965-66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아약스에서는 1970-71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낸 바소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했지만 그가 주축으로 활약하던 기간에 유고슬라비아가 본선에 나서지 못했으며 1968년에는 그가 아약스로 이적하며 대표팀에서 은퇴하자 조국이 유로 결승에 진출하는 등 대표팀 운은 없었다.

아약스에서는 구단의 황금기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 바소비치는 '신의 아들들'의 일원으로 에레디비시와 KNVB컵을 각각 3회 우승했으며 1970-7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파나티나이코스를 꺾고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가 활약하던 시기의 아약스는 능수능란한 오프사이드 트랩 활용으로 유명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난 미헬스와 함께 공격적인 수비를 창조해 낸 설계자다. 내가 맡은 부분은 오프사이드 반칙을 유도하거나 골을 넣기 위해 벽 가운데 서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경기장 위에서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훈련보다 100배는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아약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라며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자랑하기도 했다.

 


67위 조르지오 키엘리니

 


생년월일: 1984년 8월 14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2010년대 이탈리아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대인 수비 능력에서 강점을 보이는 수비수이며 자신의 우수한 피지컬을 잘 활용하는 선수이며 수비 커버 범위가 굉장히 넓은 선수였으나 큰 경기에서 유독 핸들링으로 인해 패배의 시발점이 되는 아쉬운 면모가 있었던 선수이기도 했다.

2010년대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가 독주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세리에 A 9연패와 코파 이탈리아 5회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2회라는 성적을 거두며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5회 선정되었고 ESM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에 2회 선정되었다.

아주리에서도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의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으나 아주리의 암흑기였던 탓에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 2회와 지역예선 탈락 2회라는 나쁜 성적을 냈으나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유로 2012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코로나로 인해 2021년에 열린 유로 2020에서는 보누치와 함께 아주리의 우승을 이끌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공동 12위에 올랐다.

 


66위 레오나르도 보누치

 


생년월일: 1987년 5월 1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6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키엘리니와 함께 2010년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수비수로 후방에서 날리는 치명적인 롱패스로 팀의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을 하며 수비력이 우수하진 않지만 상술한 빌드업 능력 이외에도 우수한 볼 간수 능력과 강력한 피지컬을 활용한 몸싸움에 능해 중용되었다.

비안코네리 군단에서 조르지오 키엘리니, 안드레아 바르찰리와 함께 BBC라 불리는 스리백 라인을 구성해 활약하며 세리에 A 8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세리에 A 올해의 팀 4회 선정과 2015-16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으며 2016-17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과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에 선정되었으며 2014-15 시즌과 2016-17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지만 각각 메시의 바르셀로나와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에 막히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0년대 아주리의 빌드업의 시작점이자 수비의 핵으로 활약했으나 아주리의 암흑기였던 탓에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 2회와 지역예선 탈락 2회라는 나쁜 성적을 냈으나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유로 2012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코로나로 인해 2021년에 열린 유로 2020에서는 보누치와 함께 아주리의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4위에 올랐다.



65위 비르지니오 로세타

 


생년월일: 1902년 2월 25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20년대 하반기와 1930년대 상반기 정상급 수비수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로 헌신적이며 왕성한 활동량을 활용해 경기장 전역에서 공격수들을 막아냈으며 우수한 수비 스킬과 경기를 읽는 전술안을 활용한 예측 수비에 능했으며 패스도 정확해 볼을 허무하게 잃지 않았다.

오늘날의 오른쪽 센터백에 가까운 라이트 풀백으로 주로 활약했으며 레프트 풀백 칼리가스리와 수비라인을 구성하여 세리에 A 5연패를 포함해 프로 베르첼리 시절을 포함해 개인 통산 8회 우승을 이뤄낸 로세타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렌조 데 베키 은퇴 이후에는 같이 출전하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타냈으며 두 번의 중유럽컵 우승과 한 번의 중유럽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분더 팀이라 불린 오스트리아 대표팀에게 4-2로 패하는데 원흉으로 지목되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첫 경기 미국전에만 선발 출전하고 8강부터는 벤치 멤버로 우승을 경험했다.

여담으로 로세타는 이적 과정에서도 큰 소란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규정인 "팀을 옮기려면 새로운 팀의 연고지에서 거주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 프로 베르첼리와 유벤투스의 갈등으로 인해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1924년 2월 17일, 북부 리그와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프로 베르첼리 선수가 맞으며 잔여 시즌을 뛸 수 없으며 그가 출전한 3승 1무의 전적은 모두 유벤투스의 패배로 처리되었고 결국 유벤투스는 1924년 6월 28일에 5만 리라의 이적료를 지급하고 다시 로세타를 데려온 일명 로세타 이적 파동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64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생년월일: 1901년 6월 26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20년대 하반기와 1930년대 상반기 정상급 수비수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로 강한 태클을 날리며 집요한 수비 능력을 지녔으며 우수한 공중볼 능력과 훌륭한 볼 테크닉 능력은 물론 양발을 모두 잘 써 수비라인에 있는 포지션은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오늘날의 왼쪽 센터백에 가까운 레프트 풀백으로 주로 활약했으며 라이트 풀백 비르지니오 로제타와 수비라인을 구성하여 세리에 A 5연패를 이뤄냈으며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렌조 데 베키 은퇴 이후에는 같이 출전하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타냈으며 두 번의 중유럽컵 우승과 한 번의 중유럽컵 준우승을 이뤄냈는데 분더 팀이라 불린 오스트리아 대표팀에게 4-2로 패하는데 원흉으로 지목되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벤치 멤버로 우승을 경험했다.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는 칼리가리스를 두고 검투사와도 같다고 칭했으며 그의 A매치 59경기는 오랜 시간 이탈리아 대표팀 A매치 최다 출전자로 군림했는데 파케티가 이 기록을 갱신하기까지 37년이 걸렸다.



63위 엠린 휴즈

 


생년월일: 1947년 8월 28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리버풀 FC

1970년대 하반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수비수로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축구 지능과 전술안, 그리고 뛰어난 체력과 강력한 대인 수비 능력을 겸비해 넓은 지역에서 상대선수를 공략하며 팬들로부터 미친 말이라 불렸으며 센터백은 물론 레프트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도 막힘없이 잘 소화했다.

클레멘스와 함께 리버풀 역대 통산 출전 공동 4위를 기록하고 있는 휴즈는 리버풀에서 풋볼 리그 4회 우승과 FA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UEFA컵 2회 우승과 1976-77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더블을 이룬 공로를 인정받아 1976-77 시즌에 휴즈는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0위에 올랐다.

삼사자 군단에서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무어와 라본의 백업을 맡았으며 유로 1980에서는 왓슨과 톰슨의 백업을 맡았다.



62위 닐 프랭클린

 


생년월일: 1922년 1월 24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스토크 시티

1940년대 하반기 세계 최고의 센터하프로 세련된 슬라이딩 태클과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우수한 수비 조율 능력은 물론 우수한 발밑 기술과 정확한 롱패스로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스토크 시티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삼사자 군단에서도 핵심 센터 하프로 활약하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잉글랜드의 수비를 이끌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엄청난 투자로 축구 붐을 일으켰던 엘도라도 시절의 콜롬비아 리그의 인데펜디엔테 산타페로 이적하며 스스로 대표팀 소집을 거부했다.

수비라인의 리더 프랭클린이 빠진 여파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미국에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프랭클린의 소집 거부는 탈락의 원흉으로 뽑히며 프랭클린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버림받았다.



61위 루네 브라체트

 


생년월일: 1961년 3월 19일
국적: 노르웨이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

노르웨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순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스테미너에서 나오는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공수 양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공격 상황에서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바탕으로 찬스를 공급했으며 수비적인 상황에서는 큰 키와 북유럽인 특유의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하는 몸싸움과 제공권 경합으로 상대 공격수를 괴롭히는 부분에도 능했다.

베르더 브레멘의 황금기의 수비라인의 리더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와 DFB 포칼을 각각 2회 우승했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1991-92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뱅거가 이끄는 AS 모나코를 꺾으며 디 그륀바이센 역사상 최초의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브라체트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세 번 받았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다.

노르웨이 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조국의 1994 미국 월드컵 본선행에 공헌했으며 본선에서도 이탈리아, 멕시코, 아일랜드를 상대로 1승1부1패로 그들과 동률의 승점은 물론 같은 골득실을 기록했지만 복잡한 계산을 거쳐 조 4위로 탈락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브라체트는 2003년 노르웨이 축구 협회가 선정한 지난 50년간 노르웨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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