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로 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사 - (히츠펠트의 도르트문트의 성공과 그 이후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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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찌개로 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사 - (히츠펠트의 도르트문트의 성공과 그 이후의 몰락)

토르난테 2020. 5. 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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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찌개 - 잔반도 뭉치면 명품이 될 수 있다.

 

부대찌개는 동양과 서양의 잘 퓨전 된 특유의 맛으로 인해 필자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이 부대찌개가 세상에 나온 배경은 제법 어두운 환경에 기인했다.

1950년대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겪은 이후 굉장히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이때 대한민국에는 미국 군대가 주둔하며 안보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군량으로 스팸과 소시지, 베이컨을 주로 먹었고 이를 남겼다.

부대찌개는 지금은 훌륭한 음식이지만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음식이다.

당시 어려웠던 식량 사정으로 인해 주한미군 부대에서 쓰고 남은 햄, 소시지, 베이컨 등을 가져와 김치를 넣고 솥뚜껑에 볶은 요리가 원조였으며 볶으면 자꾸 태워서 물을 부어보니 식량과 술안주 역할을 하는 찌개가 탄생했다. 그래서 이름이 미군 부대에서 나왔다는 의미의 부대찌개나 미국 대통령인 린든 베인스 존슨의 이름을 따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이 부대찌개는 1970년대를 거치며 경제 발전으로 먹거리가 굉장히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맛으로 인해 계속 소비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발전하며 한국 외식 문화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자취생들의 친구 역할도 한다.

축구계에도 이러한 팀이 있었다. 1990년대에 이탈리아의 프로 축구 리그인 세리에 A는 당대 최고를 넘어 역대 최고의 축구 리그로 잘 나가던 리그였고 전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용병들이 몰렸으며 독일 축구선수들도 이탈리아로 많이 진출했다.

디 만샤프의 핵심 선수인 마테우스, 클린스만, 브레메는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들도 노장이 되거나 이탈리아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선수들을 모아 독일은 물론 유럽을 제패한 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이 지휘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팀의 플레이를 그리는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는 인테르에서 적응에 실패해 버려졌으며 공격형 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묄러는 유벤투스에서 신예 델 피에로에게 밀려났다.

하지만 이들은 1990년대 후반 세리에의 대표격인 유벤투스에게 가장 큰 무대의 결승전에서 복수하는 데 성공하며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했다.

오늘은 이 시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왕좌지재 (王佐之才) - 천하를 뒤흔드는 자에게도 무명 시절은 있을 수 있다. 

 

왕좌지재란 왕을 도울 만한 재능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울 능력을 가진 인재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순욱의 초상화

삼국지에 그 유명한 조조의 책사 순욱의 일화에서 비유된 말이다. 순욱은 영천 사족 출신으로 당대의 걸물로 통했으나 원소 진영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며 소외당하다가 원소의 곁을 떠나 당시 원소의 위성 세력에 불과하던 조조에게로 향한다.

순욱은 조조군의 이인자격의 인물이 되어 조조의 세력의 대전략을 그렸다. 순욱은 조조에게 군략을 도운 책사로 임기응변에 타고났으나 방자한 성품으로 저평가받았던 곽가를 원소의 진영에서 조조의 진영으로 데려온다.

그 외에도 자신의 조카 순유를 비롯해 영천의 여러 인물들을 영입하며 탁류 가문의 아들이라 명분이 부족했던 조조에게 청류 세력의 합류를 이끌어냈으며 동탁의 잔당인 이각, 곽사의 무리로부터 황제를 구하며 황제의 수호자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른바 "협천자" 라는 대전략을 내세운다.

조조와 원소의 패권 다툼이 갈린 관도전투 상상도

실제로 순욱과 곽가가 있었을 때 조조는 승승장구했다. 이각, 곽사를 몰아내고 황제를 옹립해 명분을 얻고 원소의 위성세력 신세에서 벗어났으며 원술, 여포를 멸하고 유비를 쫓아냈으며 하북의 대세력이었던 원소와 그의 세 명의 아들을 멸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순욱과 곽가는 이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곽가가 병사하고 조조가 권신화되는 과정에서 순욱과 갈등하다가 순욱이 자결한 이후에 조조는 유비와 손권의 추격을 허용하며 결국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병사한다.

분데스리가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처지도 초창기의 조조의 세력과 비슷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로화가 1963년에나 이루어진 분데스리가의 팀들은 여러 제도상의 한계로 국가의 경제력에 비해 자금력이 적었으며 지역 팬들의 구매력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통일 비용이 소모되며 구 서독 주민들의 구매력이 급락하며 분데스리가 팀들은 재정난을 겪었고 디 만샤프 출신의 수많은 선수들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팀들을 내줬으며 이는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거쳐 유벤투스로 이적한 안드레아스 묄러는 UEFA 컵 결승 2차전에서 친정팀에 비수를 꽂는다.

특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92-93 시즌 UEFA 컵 결승전에서 자신이 넘겨줬던 안드레아스 묄러를 만나는데 묄러의 활약으로 홈에서도 3-1로 패했으며 원정에서도 3-0으로 대패하며 굴욕적인 결승전을 치른다.

하지만 이 때 전성기를 누린 독일 선수들이 서른에 가까워지거나 다른 스타플레이어들에게 밀려나며 세리에 A의 팀들은 이들을 판매하기로 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이런 선수들을 모으게 된다.

그 이전부터 1992년에 유벤투스로부터 로이터를 영입해서 재미를 봤던 도르트문트는 이 상황을 잘 이용했다. 1993년에는 라치오와 인테르로부터 리들레와 잠머를 영입했으며 1994년에 유벤투스에 부임한 리피 감독은 수비진을 이탈리아의 선수들로 채워 넣었으며 공격진에서는 세대교체를 준비했으며 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호재로 작용한다.

콜러와 세자르는 유벤투스에서 도르트문트까지 함께한 영혼의 콤비이다.

그 여파로 1994년에는 페라라의 영입과 팀의 마스코트로 키우려고 공들인 델 피에로의 1군 승격으로 인해 세자르와 묄러가 팀을 떠났는데 이 때 히츠펠트 감독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이들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삼프도리아의 노장 비에르코보드를 영입하면서 위르겐 콜러가 튕겨 나오자 히츠펠트는 콜러를 영입했다.

도르트문트는 이들을 앞세워 1995-96 시즌에 강력한 라이벌인 바이에른 뮌헨과 샬케를 따돌리고 분데스리가를 우승했다. 그리고 1996-97 시즌에 유벤투스로부터 포르투갈 출신의 수비형 미드필더 파울루 수자를 영입했다.

1996-97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우승은 바이에른 뮌헨에게 내줬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8강에서 옥세르를 무찔렀으며 4강에서는 퍼거슨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무찌르고 결승전에선 디펜딩 챔피언인 유벤투스를 만났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라인업, 용병을 세 명만 쓸 수 있어서 세자르가 벤치로 갔으며 전술상의 이유로 주장 조어크도 벤치로 내려갔다.

유벤투스는 바조를 지단으로 대체하고 복시치까지 영입하며 강력한 전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도르트문트의 리들레에게 헤딩 두 방을 맞고 2-0으로 밀렸으며 델 피에로가 만회골을 넣었지만 교체로 투입한 유망주 라스 리켄이 안젤로 페루치 골키퍼를 넘기는 18m골을 단 한 번의 볼터치만에 득점하였고, 스코어는 도르트문트가 3-1로 앞서 나갔다. 그리고 이 스코어가 굳혀지면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우승했다.

독자들은 그럼 이 점을 궁금해할것이다. 이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어떤 전술로 어떤 선수를 중심으로 우승했는지 말이다. 그럼 그 팀을 분석해보려고 한다.

 

리베로 (Libero) - 자유의 날개를 단 호랑이

 

리베로의 사전적인 뜻은 자유인이다. 이탈리아 축구 저널리스트의 대부인 지안니 브레라가 지어준 용어로 수비 시에 기존의 틀처럼 대인 마킹을 하는 역할과는 다르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자유롭게 최후방에서 수비하는 이 역할에 리베로란 이름을 부여했다.

리베로의 아버지, 지안니 브레라

이 리베로는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독일식 리베로로 발전시켰으며 수비에서의 자유로움을 넘어 수비수임에도 팀의 플레이메이커가 되어 공격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엄청난 경기 지배력을 보여줬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서는 베켄바우어를 원하며 독일식 리베로를 모방했지만 출중한 기량과 다재다능함을 모두 요구하는지라 대부분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독일식 리베로는 독일이 통일되고 동독 출신의 한 선수가 다시 완벽하게 구현한다. 그가 바로 이 팀의 주인공인 마티아스 잠머이다.

1996-97 시즌 히츠펠트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기본 전술판

히츠펠트의 도르트문트는 1996-97 시즌에 스리백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3-4-1-2 시스템을 채택했다. 하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스리 백 시스템은 다른 팀의 스리 백 시스템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는 바로 포백 시스템의 전유물인 오프사이드 트랩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스리 백 시스템이었다. 스리 백은 양 윙백까지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다섯 명이 한 몸으로 움직여야 오프사이드 트랩이 가능한데 이는 그동안 불가능으로 여겨졌다.

스리 백 시스템에서 오프사이드라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역대 최고 수준의 수비라인 지휘자 마티아스 잠머

하지만 마티아스 잠머의 축구 지능과 수비라인 지휘능력은 다른 리베로들 초월했으며 스리 백 상태에서도 오프사이드 트랩을 구사하며 상대 공격수들을 속였다. 양 스토퍼인 콜러와 세자르 그리고 로테이션 멤버인 크레에까지 누구와 뛰어도 잠머가 지휘하면 훌륭한 수비라인으로 변해있었다.

콜러는 당대 최고의 대인 마킹 실력을 지닌 수비수로 마르코 반 바스텐조차 까다로워하던 수비수였으며 줄리우 세자르는 브라질 대표팀 출신으로 신체적인 능력괴 정교한 태클, 그리고 게임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수비 위치 선정까지 훌륭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안 그래도 유벤투스에서 견고한 모습을 보여줬던 이 수비라인은 잠머를 만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게디가 마티아스 잠머는 수비형 미드필더 출신의 선수였다. 그리고 넓은 시야와 세련된 테크닉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잠머는 후방의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하며 다소 투박하고 수비적인 성향의 미드필더인 미하엘 조어크나 파울루 수자, 그리고 폴 램버트의 보호를 받으며 후방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도 했다.

보루센의 선수로 함께 뛰었던 잠머와 조어크는 지금은 보루센의 보드진으로 함께 일한다.

램버트는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우던 선수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선 상대의 플레이메이커인 지단을 전담 마크했으며 그리고 도르트문트의 레전드이자 주장이며 팀의 핵심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던 미하엘 조어크도 출전했다. 그들의 백업 멤버인 파울루 수자는 상대적으로 지역방어와 수비 지원에 능해 스토퍼와 협력 수비를 보여줬다.

측면을 맡은 다재다능한 하인리히와 강철 같은 체력과 뛰어난 기동력, 그리고 정확한 크로스를 모두 겸비한 슈테판 로이터가 맡았으며 로이터와 하인리히 모두 지구력이 좋아 공격과 수비 모든 면에서 공헌했다.

돌아온 보루센의 공격 지휘자 안드레아스 묄러

잠머의 후방 빌드업이나 측면에서의 지원을 받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방에서 플레이메이킹을 담당하는 선수는 안드레아스 묄러였다. 묄러를 중심으로 공격 작업이 전개되었으며 섬세한 드리블을 이용한 수비 돌파와 롱 패스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데 모두 능했다.

그리고 뛰어난 볼 테크닉과 정교한 드리블로 수비를 교란하거나 직접 득점하는 모든 역할이 가능했던 사퓌자와 포스트 플레이에 강하며 헤딩으로 득점과 지원을 모두 할 수 있었던 칼 하인츠 리들레의 공격 조합은 매우 훌륭했다. 특히 리들레는 측면의 크로스를 득점으로 잘 이어내며 측면 윙백의 공격 가담의 효용성을 높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공격과 수비의 중심 역할을 한 안드레아스 묄러와 마티아스 잠머

상술했듯이 도르트문트의 코어는 잠머와 묄러였으며 잠머의 위치에 따라 수비라인의 위치가 달라졌으며 도르트문트를 상대하는 팀들은 발롱도르 위너인 잠머가 볼을 잡으면 대부분 잠머부터 견제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잠머에게 쏠릴 때 묄러가 지휘하는 삼각 편대는 상대 수비진을 강타했다.

이런 잠머는 항상 2인분 이상을 했으며 이는 히츠펠트 감독이 수비적인 선수를 여섯 명을 기용하고도 공격적인 수비수 잠머 덕분에 공격과 수비의 균형을 유리하게 맞출 수 있었고 이는 유벤투스에게 대패했던 지난날의 악몽을 복수하게 만들었다.

어떤가? 잠머야 말로 마지막 자유인의 향기가 나지 않는가? 최초의 자유인이 서독의 카이저 베켄바우어였다면 최후의 자유인은 동독의 천재 잠머였다.

 

지속성 (持續性)

"힘든가?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네." - 카를레스 푸욜

 

전력을 유지하려면 역설적이게도 발전을 추구해야 그래도 유지가 가능하며 그저 현상유지만 하려 하면 퇴보한다. 그렇다고 무리한 도박을 하면 퇴보를 넘어 몰락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한 번 뒤쳐지면 따라잡기 어려움을 강조한 푸욜

부대찌개는 항상 발전했다. 처음에는 미군 부대에서 남은 잔반과 김치를 섞은 음식에서부터 떡과 두부, 베이크드 빈즈부터 치즈까지 점점 발전해서 아직도 외식시장에서 일정부분의 점유율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는 점점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히츠펠트 감독은 더 진보하길 원했으나 보드진들은 이를 거부했고 그를 감독에서 실권이 없는 명예직인 기술위원장으로 승격시켰으며 파르마와 페루자에서 이름을 날린 네비오 스칼라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그다음 시즌 도르트문트는 세대교체 실패로 분데스리가 10위로 부진하면서 히츠펠트와 스칼라는 모두 1997-98 시즌이 끝나자 사임했다.

거기에 1997-98 시즌 막바지에 도르트문트의 유일한 믿을 맨인 마티아스 잠머도 큰 부상을 당하고 은퇴했으며 다른 선수들도 노쇠화로 하락세를 보냈다. 히츠펠트는 1998-99 시즌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해 바이에른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1999년엔 사퓌자가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안드레아스 묄러가 "밀란이든 마드리드든 어쨌든 이탈리아로 간다."라는 인터뷰를 남기고 더비 라이벌인 샬케로 이적했다.

2001-02 시즌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우승 셀레브레이션이다. 그러나 이 우승은 전성기의 지속을 상징하는게 아닌 마침표를 상징했다.

도르트문트는 그래도 릭켄과 켈, 메첼더 같은 유망주들과 뵈른스, 로시츠키같은 영입으로 2001-02 시즌 리그와 포칼을 우승하기도 했지만 점차 하락세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그동안의 퇴보를 한 번에 만회하려고 분데스리가 팀 최초로 주식상장이란 도박수를 냈다. 보다 투명한 클럽 운영을 위한 승부수였지만 무리한 투자와 성적의 부진이 맞물려 구단 재정에 커다란 적자라는 냉정한 현실로 이뤄졌고 2005년에는 구단이 부도가 났다. 스타플레이어를 팔아도 자금난이 계속되자 홈 경기장인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이란 이름을 지역 보험 회사 이름인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고쳐야만 했다.

도르트문트는 이처럼 히츠펠트가 요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걷지 않고 앉는 길을 택했다. 그러다가 바이에른과의 격차가 벌어지자 뛰려고 했으나 함정에 빠지고 클롭이 부임하는 순간까지 고전했다.

노장들의 반란은 멋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하지 않았으며 그 뒤를 대비했다면 이 노장들은 새로운 제국의 공신으로 더 추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장들을 마지막으로 구단은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9년간의 암흑기를 거쳐 2010-11 시즌 다시 우승한 뒤에도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2010년대 클롭의 성공 이후에도 이 일을 교훈삼아 신중하면서도 항상 한 걸음씩 걸으며 조금씩 발전하는 클럽으로 모티브를 잡았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재 최선의 수를 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화려하고 위대한 구단이라 불리긴 어려워도 본받을만한 구단이지 않는가?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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