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포 백 시스템 4-2-4 시스템 (반성에서 발전한 혁신의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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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포 백 시스템 4-2-4 시스템 (반성에서 발전한 혁신의 날갯짓)

토르난테 2020. 5. 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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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臥薪嘗膽)

 

"섶에서 누워 자고 쓸개를 맛본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가오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말이다.

브라질은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결승 리그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루과이를 누르고 우승할 수 있었으나 자신들이 자랑하던 홈구장 마라카낭에서 우루과이에게 패배해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월드컵 우승을 노렸으나. 우승을 앙숙인 우루과이에게 넘겨주며 국가적인 비극을 경험했다.

 

결승전에서 역전골을 성공시킨 우루과이의 기지아 (마라카낭의 비극)

 

그 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8강에서 매직 마자르 라 불리는 헝가리에게 완패하며 난투극이라는 추태까지 벌인 끝에 탈락했다.

그러고 이들은 WM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으며 새로운 시스템을 기획한다. 헝가리 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헝가리를 떠난 벨라 구트만 감독이 상파울루 F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4-2-4의 아버지인 벨라 구트만

 

구트만은 세베슈의 M-M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바꾼 4-2-4 시스템을 가동했으며 이로 인해 상파울루 주 리그를 우승했다.

브라질인들은 자신들과 악연이 있었던 헝가리인의 방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숙적 우루과이를 꺾기 위해 당시 카나리아 군단의 비센치 페올라는 이 전술을 벨라 구트만에게 배워 자신만의 것으로 모방시켰다.

그리고 1957년, 만 17세의 나이로 38경기 41골을 넣은 초신성 펠레의 등장으로 이 4-2-4 시스템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세 번의 월드컵 우승에 공헌한다.

브라질의 4-2-4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을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후세 축구인들에게 영향을 줬을까? 이제 그 비결을 말하려고 한다.

 

혁신 (革新)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행동을 말한다.

브라질의 4-2-4 시스템은 그동안 혁신적인 축구를 보여줬던 다뉴브 학파가 보여준 축구보다도 더 혁신적이었다.

 

일반적인 4-2-4 대형


구트만이 보여준 네 명의 수비수가 기존의 수비 방식인 맨투맨 마킹 방식이 아닌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는 형태로 당시에는 없던 개념인 존 디펜스라는 개념을 창출했다.

그리고 두 명의 미드필더가 공격과 수비를 오가며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를 했으며 인사이드 포워드가 생략된 대신 네 명의 공격수가 두 명은 중앙에서 공격하고, 두 명은 측면에서 공격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식을 더했다.

하지만 페올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4-2-4 시스템의 레프트 윙에 인사이드 레프트와 아웃사이드 레프트를 모두 플레이할 줄 아는 마리우 자갈루를 중용한 것이다.

마리우 자갈루는 분명 대표팀 경쟁자인 페페나 카누테이루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던 선수였으며 실제로 페페의 드리블 전진 후 강력한 슈팅이나 카누테이루의 화려한 개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페올라의 자갈루 활용법

 

하지만 자갈루는 굉장히 영리하면서도 성실한 선수였으며 브라질 대표팀은 이 당시 사이드 백인 자우마 산투스와 니우통 산투스에게 공격을 주문했다. 하지만 카누테이루나 페페는 소속팀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레프트 백의 공격 가담인지라 니우통 산투스와 불협화음을 낼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자갈루는 영리한 움직임을 보이며 산투스의 공격이 시작되면 중앙으로 들어가 지투나 디디와 함께 중원을 구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가 볼을 빼앗겼거나 공격 시도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자갈루는 지투가 있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까지 내려와서 수비 가담을 했으며 중앙의 펠레는 빈 왼쪽 측면으로 이동하며 역습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역습 상황이 오면 역습을 주도했다. 오른쪽의 가린샤는 측면에서 크로스로 득점을 지원하는 플레이와 중앙으로 돌파하는 플레이 모두에 능했으며 라이트 백인 자우마 산투스나 니우통 데 소르디는 이러한 가린샤에게 최대한 맞춰주며 공격과 수비 간격을 조절하며 지원했다.

 

니우통 산투스 오버래핑 시 브라질의 대형

 

이런 복잡한 스위칭 플레이는 난이도가 높았으며 조금만 실수해도 무너지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를 지휘하는 인사이드 포워드 출신의 중앙 미드필더 디디는 팀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선수들의 위치와 간격을 잘 조정하며 브라질 대표팀의 두뇌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경기 중 자주 조는 버릇이 있었던 페올라 감독이 조는 것을 눈치채면 자신이 직접 감독 역할도 겸했던 훌륭한 리더였다.

브라질 대표팀은 왼쪽 라인과 훌륭한 두뇌 디디, 그리고 천재적인 골 감각과 축구 지능을 겸비한 펠레 덕분에 4-2-4 대형에서 필요하다면 4-3-3 대형이나 WM 대형으로도 바뀔 수 있었으며 이런 변화무쌍한 브라질 대표팀이 보여준 새로운 축구를 유럽 팀들은 막을 수 없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 우승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함진영 (陷陣營)

 

중국 후한 말기 군웅할거 시대에 여포라는 군웅 휘하에 있던 고순이란 장수가 이끌던 칠백 명의 부대는 그 군기가 워낙 철저해서 보통 1천 명으로 일컬어졌는데, 갑옷과 무기는 항상 정련하고 번쩍번쩍한 데다 매번 싸울 때마다 함락하지 못하는 진영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대는 함진영이라 불린 데서 유래했다. 즉 어떤 진영이던 함락하는 부대를 뜻한다.

4-2-4 시스템을 앞세운 브라질이 그랬다. 첫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를 대파했지만 자우마 산투스와 펠레, 가린샤의 컨디션 난조로 대신 나온 선수들의 부진으로 두 번째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 양 팀 모두 졸전으로 일관하면서 무득점으로 무승부를 거뒀다.

조별 리그 마지막 상대는 멜버른 올림픽 남자 축구 금메달리스트들이 포진된 소련 국가대표팀이었으며 소련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인 야신이 지키던 팀이었다. 그러나 펠레와 가린샤, 그리고 자갈루와 니우통 산투스의 콤비플레이에 소련의 수비진은 유린당했으며 스트라이커 바바의 멀티골로 소련을 제압했다.

 

소련 수비진을 교란하는 가린샤


그 뒤 8강에서는 질식 수비로 헝가리를 꺾은 웨일즈를 격파했다. 준결승전에서는 퐁텐과 코파를 앞세워 강력한 공격력을 보이던 프랑스를 펠레의 헤트트릭을 앞세워 5-2로 대파했으며 결승전에서도 리드홀름과 함린, 그렌이 이끌던 개최국 스웨덴을 상대로 5-2로 대승을 거두며 5승 1무 16득점 4실점이란 성적으로 우승했다. 기자들은 가린샤에게 우승 소감을 묻자 "여섯 경기만 이기고도 우승이라니, 이상해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브라질은 수월하게 우승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도 펠레가 두 번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부상으로 빠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마리우두가 그 역할을 일부 메꾸며 결승전에서 재회한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대파하며 우승을 거뒀다.

1962 칠레 월드컵 우승컵을 드는 브라질의 주장 마우루 하모스


그러나 칠레 월드컵 결승전 이후 주축들 대부분이 노쇠화로 은퇴했다. 그리고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었다. 게다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유럽 국적의 심판들이 브라질을 필두로 남미 팀들에 대한 견제가 극에 달했던 대회인데 펠레가 이끌던 브라질은 유럽 팀의 폭력적인 플레이와 심판들의 편파 판정으로 인해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펠레는 이 대회 이후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나 이로 인해 선수보호제도에 관한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펠레는 다시 복귀했고 브라질은 세대교체에 성공했으며 특히 대체하기 어려웠던 마리우 호베르투 히벨리누라는 더 훌륭한 선수로 대체하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예선부터 본선까지 전승을 거두며 우승한다.

 

1970 멕시코 월드컵 우승국 브라질 대표팀

 

특히 1970 멕시코 월드컵은 브라질로서 상당히 의미가 깊은 대회다. 감독부터가 선수로서 1958년의 성공을 이끌었던 마리우 자갈루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4-1로 대파했으며 축구 종가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압했으며 루마니아를 꺾었다. 8강전에서는 한때 자신들의 사령관인 디디가 이끌던 페루 대표팀을 4-2로 대파했으며 4강전에서는 우루과이를 만난다.

 

1970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전 브라질vs우루과이



1950년,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홈에서 브라질을 제압하고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 때 펠레의 아버지는 펠레가 보는 앞에서 펠레에게 처음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본 펠레는 예수상 앞에서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게 복수하겠다."라는 맹세를 남겼으며 펠레의 동료들도 모두 복수를 꿈꿨다.

우루과이는 비록 공격의 핵인 로차가 빠져서 공격적으로는 답답한 팀이었지만 남미의 야신 마주르키에비치를 비롯해 무히카-마토사스-안체타-우비나가 이끄는 포백 라인은 브라질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우루과이의 쿠비야가 선제골을 득점했으나 브라질은 3-1로 역전하며 우루과이라는 철옹성도 무너트렸다.

준결승전에서 독일의 맹공을 견디며 독일을 이긴 카테나치오의 본산지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은 공격 축구의 정점과 수비 축구의 정점의 대결, 그리고 둘 다 월드컵을 2회 우승했으며 3회 우승 시 줄리메 컴 영구 소장을 할 수 있는 팀들이어서 양 팀 모두 동기부여가 남달랐다.

 

1970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제르송vs파케티


이탈리아도 우루과이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았다. 펠레를 비롯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파케티와 부르니치가 주축이 된 아주리의 빗장은 함락당했으며 4-1로 대파하는 굴욕을 겪었으며 줄리메 컵 영구 소장의 영광은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

축구 종주국을 함락시키고 국가적인 숙적을 함락시켰으며 축구 철학의 안티테제를 함락시킨 브라질은 이 대회를 우승으로 축구 강국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훗날의 축구인들의 귀감이자 목표가 되었다.

 

롤 모델 (role model)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임무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을 뜻하는 단어이다.

브라질의 4-2-4 시스템은 1950년대의 M-M 시스템과 함께 여러 방식의 축구에 롤 모델이 되었다.

 

1970 멕시코 월드컵 우승팀 브라질의 우승 셀레브레이션


오늘날의 포 백 시스템에 시조이며 그동안은 간혈적으로 포 백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비진이 포 백으로 정리되면서 오늘날의 오프사이드 트랩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조크 스타인의 셀틱은 4-2-4를 본받아 측면 윙어들을 중앙으로 침투시키며 측면 수비를 전진시키는 플레이로 유럽을 지배하던 엘레니오 에레라와 인테르의 카테나치오를 무너트리고 유럽 최초의 트레블을 이뤘다.

실질적인 움직임 때문에 칼 라판의 베로우 시스템과 함께 4-3-3의 롤모델 역할도 했으며 이 대형은 독일과 네덜란드가 계승했다. 네덜란드는 M-M 시스템에 더 가까운 팀이었지만 유로 72에서 서독이 보여준 축구는 유럽의 브라질이라는 그것과 같았다.

게다가 브라질과는 정 반대의 축구 사상을 고집했던 아주리의 조나 미스타에도 약간의 힌트를 주었는데 레프트 백이 전진하고 레프트 윙이 중앙으로 들어온 것을 아예 한쪽에서는 사이드 백이 사이드를 통째로 책임지고 윙어 대신 미드필더를 늘리는 대형인 조나 미스타에도 영향을 주었다.

 

압박 축구의 아버지 아리고 사키


그리고 여기서 압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키에 의해 이 4-2-4 시스템은 사키의 방식인 4-4-2로 재탄생하며 현대에도 꽤 오랜 기간 유행했다.

브라질 내에서는 텔레 산타나가 이 포지션을 개량해 4-2-2-2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미드필더들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는 대신 사이드 백을 윙어처럼 전진시키며 극단적인 공격 축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브라질은 단순히 성적 뿐만이 아닌 현대의 축구에도 여러 영향을 끼친 팀이었으며 그렇기에 역대 최강의 팀으로 불린다.

 

펠레와 자이르지뉴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확실히 인정하고 와신상담했으며 선진적인 전술을 받아들이되 한층 자신의 방식으로 개량하여 결국 상대들의 진영을 모두 함락하고 축구 강국의 대명사가 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축구를 넘어서 여러분의 삶에서도 롤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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