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의 장점을 흡수해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다. (라 리가의 삼대 강호가 성장했던 방법)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다른 이의 장점을 흡수해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다. (라 리가의 삼대 강호가 성장했던 방법)

토르난테 2020. 5. 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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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Pasta)

파스타는 13세기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동방견문록의 저자인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방문했을 때 알게 된 국수를 고향으로 가지고 오면서 이탈리아의 파스타로 정착된 데서 유래했다. 

여러 종류의 파스타 (출처: 나무위키)

당시엔 서양은 국수 요리라는 개념이 없었으나 마르코 폴로가 동양에서 가져온 국수 요리로 시칠리아 사람들이 이탈리아 식으로 발전시켜 오늘날의 파스타, 마카로니, 스파게티가 되었다는 정설이 있다. 

다른 국가 혹은 다른 지역의 문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드려 발전시키는 일은 비단 스파게티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례에서도 보인다. 

라 리가의 엠블럼

2010년대 최고의 리그이자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훌륭한 리그로 평가받는 스페인의 라 리가의 삼대 강호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견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유행하고 세계를 제패했던 축구를 받아드렸으며 이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며 구단 철학의 모토로 삼아 성공을 누린 구단들이다.

이들이 어떤 축구 사상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시켰는지 오늘 소개해보고자 한다.

적은 혼노지에 있고, 마자르의 사령관은 마드리드에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모두 제압하면서 수도인 교토 인근을 거의 다 장악하였으며 숙적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측근 히데요시가 이끄는 부대는 주코쿠의 지배자 모리 가문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주코쿠 지역의 통일을 앞둔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영지인 혼노지라는 절에서 다과회를 베풀고 있었다. 하지만 미쓰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품고 그를 제거할 생각이었으며 자신의 병력 13000명의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혼노지의 변 상상도

미쓰히데는 혼노지를 습격해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는 데 성공했으나 미쓰히데는 천하의 판세를 잡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화친을 맺고 그 병력으로 미쓰히데를 제거하고 구 오다 노부나가 계열의 가신들을 토벌하거나 회유해 병합했으며 일본 천하를 통일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의도하지 않는 기회가 자신에게 오자 빠르게 기회를 잡아 일본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축구 팀인 레알 마드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호세 비얄롱가는 다뉴브 학파와 소셜리스트 풋볼의 추종자로 헝가리 대표팀을 본받아 디 스테파노를 앞세워 스위칭 플레이를 활용했다. 

헝가리 혁명 과정에서 소련군의 전차를 공격한 헝가리 시민군

그리고 1956년 푸스카스와 매직 마자르의 대다수가 있는 부다페스트 혼베드 선수들은 유러피언 컵 경기 일정으로 빌바오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 때 헝가리에서는 정부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침투해 자국의 시민군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혼베드 소속 선수 중 푸스카스와 치보르, 코치시는 카탈루냐로 갔었다. 그들은 헝가리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2년이란 기간 동안 축구를 쉬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 코치시랑 치보르는 같은 헝가리 인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갔지만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인 카르닐리아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드리드로 가게 된다. 

코파, 리알,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헨토

다뉴브 학파식 스위칭 플레이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디 스테파노, 엑토르 리알, 레이몽 코파에 이어 푸스카스를 마지막 퍼즐로 영입했으며 푸스카스는 기대에 부응하듯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디 스테파노와 함께 각각 4골과 3골을 기록하며 프랑크푸르트를 대파했다.

매직 마자르의 주축 선수의 스페인행이란 기회를 잘 잡은 레알 마드리드는 이런 성과는 우승 트로피를 추가하는 데 이어서 먼 훗날 갈락티코 정책에도 크게 영향을 준다.

레알 마드리드는 다뉴브 학파의 공격진의 스위칭 플레이를 기반으로 삼기 위해 항상 자국과 해외에서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잘 안될 때는 유럽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2000년에 부임한 플로렌티노 페레스는 이런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를 브랜드화하기에 이른다. 

갈락티코 정책의 시작 지단과 피구

당대 최고의 선수를 최고의 이적료로 영입하기 위해 루이스 피구와 지네딘 지단을 각각 세계 이적료를 갈아치우며 영입했다. 하지만 이 때는 수비라인을 어린 스페인 유망주에게 맡기는 지단-파본 정책을 계획했으나 파본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며 무너졌으며 스타성이 부족하지만 중원에서 헌신하는 마켈렐레를 팔아치우며 팀의 중원이 붕괴되었다.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다음 선거에서 라몬 칼데론이 집권했으나 칼데론은 구단 총회에서 투표 조작 파문을 일으키며 임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퇴 형식으로 2009년 1월에 사임하게 되었고 그 자리를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 3연패의 주역인 BBC 라인

페레스는 과거의 실수에서 더 배웠으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 사비 알론소, 카림 벤제마, 루카 모드리치, 가레스 베일, 하메스 로드리게스, 토니 크로스 등 스타성이 있는 선수를 다수 영입했다.

그리고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에도 신경 써서 스타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팀에 헌신적인 케디라나 카세미루 같은 선수도 영입하면서 중원까지 안정시키며 옛날 분더 팀이나 매직 마자르, 그리고 저승사자 군단이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공격력과 안정적인 중원을 모두 구축하며 유럽을 제패한다.

16-17 시즌은 리그와 챔스를 더블 우승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2018-19 시즌 호날두를 유벤투스에 매각하며 잠시 스페인 선수들을 중심으로 정책으로 바꾸려 계획했으나 잘 되지 않자 다시 갈락티코를 기획했으며 아자르의 영입을 시작으로 다음 이적시장에서는 킬리안 음바페, 헤리 케인 등 새로운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하려고 계획 중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자신들이 성공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정책을 그대로 이어가 앞으로의 행보에도 탄탄대로가 예상된다. 

기회를 잘 잡을 줄 아는 마드리드의 성공을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도 위대한 행보를 보여줬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와 크루이프즘(Cruyffism)

바르셀로나의 행보를 보면 참 유비가 세운 촉과 유사하다. 유비는 강력한 군벌 공손찬의 지원을 받고 도겸에게는 서주를 얻는 등 여러 행운에도 불구하고 조조라는 강력한 적에게 계속 패배하며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해 신야성이라는 조조의 영역과 경계에 있는 작은 성을 하나 받아 유표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관우, 장비, 조운 등 훌륭한 무사와 간옹, 손건, 미축 같은 훌륭한 살림꾼들이 있지만 세력의 패러다임을 세울 대전략가와 그 대전략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어 줄 군략가가 없었던 이유가 원인이다. 사마휘는 세력의 대전략을 세워줄 와룡과 군을 이끌고 계책을 짜며 전쟁의 승리를 이끌 군략가 봉추를 추천했다.

삼고초려 상상도

유비는 삼고초려하며 와룡이라 불린 제갈량을 얻었다. 제갈량의 계획은 "조조가 장악한 중원이나 하북과 손권이 다스리는 동오, 즉 양주 지역은 이미 그들이 견고하게 세력을 형성해서 당장 빼앗기는 힘듭니다. 늙은 유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 틈에 형주를 장악한 이후 서촉의 주인 유장은 무능하고 어리석어 민심을 잃었으니 서촉을 공격해 영역을 확대하고 한중을 공격해 한 고조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형주와 한중을 전진기지로 삼아 힘을 키워 양쪽에서 낙양과 장안으로 진군하면 됩니다."라는 대전략, 일명 천하삼분지계라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 제갈량의 계획에 따라 동오와 연합해 조조를 무찔렀으며 형주를 장악하고 봉추라 불리는 방통을 군사로 세워 서촉이라 불리는 익주 지역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방통을 잃었지만 대체자인 법정을 얻으며 한중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천하삼분지계를 실행시킬 수 있었다.

출사표를 읽는 제갈량 일러스트

하지만 형주 지역을 담당하는 관우가 동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이어서 세력의 군략을 담당하는 법정이 죽고 유비와 장비 역시 동오와의 전쟁 과정에서 사망하며 천하삼분지계는 무너졌으며 어떻게든 천하삼분지계를 이루려는 제갈량 역시 재상 역할과 군사령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사마의라는 강적을 압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며 결국 과로사로 쓰러졌다. 

그리고 촉은 유비와 제갈량의 정신을 잃어갔으며 유비의 아들 유선은 안주를 원하는 촉의 토착 세력과 간신 황호를 총애했으며 결국 촉은 위나라의 사령관 등애에 의해 멸망한다. 

바르셀로나도 유사하다. 잠시 이름을 날렸으나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에게 라 리가의 패권에서 밀려났다. 매직 마자르의 일원들을 수혈받았지만 마드리드와 다르게 이들을 철학화시키지 못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만의 철학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토털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가 바르셀로나에 재임했을 때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은 두 명의 요한, 즉 크루이프와 네스켄스를 영입하며 밑그림을 다졌으며 1980년대 후반 요한 크루이프는 감독으로 돌아와서 대전략가와 군략가의 역할을 동시에 맡으며 바르셀로나를 대대적으로 개혁한다. 

주젭 유이스 누녜스 바르사 회장은 크루이프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이에 크루이프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모아 아약스 시절에 이미 구축한 경험이 있는 티키타카와 토털 풋볼을 바르셀로나에 이식한다. 그리고 이 축구를 위해 부임 첫 시즌에만 13명의 선수가 대거 영입되었다.  

외국인 선수인 로날드 쿠만, 미하엘 라우드롭,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수비와 공격의 핵심으로 삼았으며 이들을 보좌하는 자국 선수로는 호세 마리 바케로나 치키 베리히스타인,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훌리오 살리나스 같은 바스크 계열의 선수들을 영입한다. 바스크 계열의 이 선수들은 바스크인들의 클럽인 빌바오와 소시에다드 등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라 마시아 시스템의 첫 성공작 펩 과르디올라

그리고 유스 팀을 개혁하며 라 마시아를 발촉 하였으며 크루이프는 당시 바르셀로나 B팀 감독 카를레스 렉사흐 감독에게 당시 메짤라로 뛰던 펩 과르디올라를 중앙 미드필더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 뒤 1990년에 그를 1군 선수로 발탁해 피보테의 역할을 맡기며 팀의 엔진으로 삼았다.  

과르디올라는 체격이 단단한 스타일이 아니고 피지컬적으로 약점을 보이던 선수라 다들 의아해했지만 크루이프의 축구에서의 피보테는 가장 영리하고 볼 관리 능력이 가장 뛰어나야 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했고 대신 수비적인 면은 뒤에 있는 수비라인에게 전담하는 방식이었다.  

부임 초반에는 이미 강력한 기반을 구축한 레알 마드리드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그러나 1989-90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0으로 완승하며 크루이프즘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바르셀로나는 펩이 1군으로 올라선 1990-91 시즌부터는 라 리가에서 4회 연속 우승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UEFA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되기 전 마지막 유러피언 컵에서 만치니와 비알리 투 톱이 이끌던 태풍의 팀 삼프도리아를 연장 혈투 끝에 이기고 첫 빅이어를 들었다. 

첫 빅이어의 즐거움을 누리는 바르샤 선수들

비록 1993-94 시즌 결승에서 밀란에게 패하고 크루이프의 마지막 두 시즌을 무관으로 끝낸 뒤 사임하고 바르셀로나는 한동안 암흑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암흑기에도 그가 남겨둔 비장의 카드, 라 마시아가 있었다. 그가 라 마시아를 최후의 보루로 둔 것은 그의 축구인 티키타카와 토털 풋볼이 많은 패스를 주고받고 꾸준히 포지션을 체인지해야 빛을 발하는 축구기에 조직력과 패싱력, 축구 지능이 엄청 중요했다. 이를 어릴 때부터 호흡을 맞추며 조직력을 강화하고 크루이프의 정신을 배우며 그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일종의 사관학교로 남겨둔 카드다.

실제로 2002-03 시즌 바르셀로나는 6위라는 실망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훌륭한 인재들이 나오고 크루이프즘의 신봉자 라포르타가 회장으로 선출되고 다시 부활했다. 아니 더 강해졌다.

10-11 시즌의 성공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제자인 치키 베리히스타인을 단장으로 삼아 구단 운영을 주도했으며 치키는 바르셀로나 B팀에서 성과를 보인 펩 과르디올라를 감독으로 삼았다.  

그리고 과르디올라는 팀의 중진으로 자리 잡은 카를레스 푸욜, 챠비 에르난데스의 세대를 중심으로 삼았으며 중간 세대인 빅토르 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대와 팀의 신성으로 돌풍을 일으킨 황금세대인 리오넬 메시, 헤라르드 피케, 세르히오 부스케츠,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세대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킨다.  

이들은 트레블을 시작으로 라 리가를 3회 연속 우승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두 번이나 우승하며 다른 팀들을 압도했다. 

라 마시아의 마지막 산물이 될 수도 있는 메시와 피케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회장을 뽑는 카턀루냐의 소시오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있었다. 크루이프를 지지하는 진보 세력과 크루이프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이 주를 이뤘다. 라포르테는 진보 세력이었으며 성공에 기여했으나 자신의 참모였던 로셀에게 배신당했으며 로셀은 보수세력과 손잡고 보수적인 다수의 소시오의 지원을 받아 투표에서 대승하고 회장에 올랐다.  

크루이프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레알 마드리드와 유사한 방식을 고수하는 로셀 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로셀은 크루이프를 명예 회장의 자리에서 밀어냈으며 특히 네이마르의 영입에 대해선 팀의 밸런스를 깬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크루이프와 바르토메우는 사실 정적이다.

그러던 중 2014년에 산드로 로셀이 네이마르의 이적료 문제로 사퇴하였고, 후임으로 바르토메우가 회장직에 올라가게 된다. 바르토메우는 로셀 일파로 위기에 몰렸으나 메시와 수아레즈, 네이마르의 활약으로 트레블을 이뤄서 간신히 재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2016년 크루이프는 작고했으며 이 시점부터 크루이프가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진다. 라 마시아 출신들은 바르셀로나에 자리잡지 못하고 바르셀로나는 우스만 뎀벨레와 필리페 쿠티뉴, 그리고 앙투안 그리즈만 같은 무분별한 영입으로 재정을 낭비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 이전과 같은 강력함을 보여주진 못했다.

바르셀로나에게 원정 다득점으로 역전에 성공하며 4강에 오른 로마

크루이프의 정신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크루이프의 제자이자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주도한 치키 베리히스타인은 로셀 일파에 의해 쫓겨나 맨체스터 시티에서 크루이프즘을 계승하고 있으며 펩 과르디올라도 바이에른 뮌헨을 거쳐 맨체스터 시티에서 치키와 재회하며 크루이프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크루이프가 우려했던 네이마르는 구단과 좋지 않게 떠나버리며 구단의 위상을 흔들었다. 라 마시아의 마지막 황금 세대인 87년생 선수들도 은퇴가 다가오고 있으며 바르셀로나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들을 성공에 올려놓은 철학을 포기한 대가로 바르셀로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바르토메우는 아두라 불리는 유선이 유비와 제갈량의 정신을 지운 것처럼 크루이프와 펩의 정신을 지우고 있다.

타산지석 (他山之石)

타산지석이란 비록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이라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을 갈 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즉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교훈 삼아 나를 다스리는 처세의 방법이다.

지금 이 교훈이 필요한 팀은 카테나치오의 계승을 노리고 있으나 팀의 정체기에 빠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단

자신의 성공 방식을 받아드리며 앞으로의 성공 가능성이 높은 레알 마드리드와 자신의 성공 방식을 거부하며 팀의 몰락의 위기를 겪는 바르셀로나를 참고해야 한다.

물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저 정도로 거대한 성과를 아직 못냈다. 하지만 라 리가에서도 중위권으로 밀려났던 팀을 시메오네 감독을 중심으로 재건하여 카테나치오와 사키이즘의 수비적인 해석으로 크루이프의 드림팀을 무너트렸던 선 수비의 후 역습 전술의 카펠로의 AC 밀란의 2010년대 버전으로 계승 중에 있는 구단이다.

성공적이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저런 방식으로 역대 최고급 전력을 자랑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라 리가를 우승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각각 첼시와 바이에른 뮌헨을 준결승에서 이기며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결승전에서도 비록 패했지만 빠른 역습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시메오네 감독은 두줄 수비의 대안이 나오자 한계를 느끼고 있다. 더욱히 공격에서의 단조로움과 공격수와 윙어를 활용하는 능력과 육성하는 능력이 모두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카테나치오의 두 거장인 에레라와 로코

시메오네의 축구의 이상향이 될 만한 감독들이 있다. 바로 카테나치오의 왕인 엘레니오 에레라와 카테나치오의 아버지인 네레오 로코이다.

로코는 카테나치오를 적극 활용해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답답한 공격력이라는 한계를 겪었고 엘레니오 에레라는 강력하고 조직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스페인 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겼으나 이탈리아에서는 로코에게 밀리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로코는 밀란에서 리베라와 아우타파니를 활용한 공격력을 배가해 이탈리아 클럽에서는 최초로 유러피언 컵 우승에 성공했으며 에레라는 인테르에서 로코의 카테나치오와 자신의 조직적인 공격을 융합하며 카테나치오를 재창조하며 1960년대 중반의 리그의 패권과 유럽의 패권을 모두 거머쥐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다.

사키이즘의 계승자라 불리는 두 남자, 디에고 시메오네와 위르겐 클롭

시메오네도 이들을 본받으며 자신의 축구의 발전을 위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았던 위르겐 클롭 감독도 도르트문트 시절의 다이나믹함을 유지하면서도 안정성을 더하는 데 성공하며 리버풀의 패권을 이끌고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카테나치오라는 철학을 심고 특별한 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같이 내려앉는 상대를 극복할 때 가능성이 존재한다. 시메오네가 세운 관문은 아직도 견고하다. 하지만 관문에서 나오는 군대의 창날은 조금 무뎌졌다. 그 창날을 갈고닦지 않는다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정체될 것이다.

시메오네의 동반자이자 친구이며 수석코치 부르고스와 함꼐

그렇다고 이 철학을 버리고 시메오네를 무작정 경질하기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뭔가 밋밋하고 평범한 팀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완벽한 변화에 실패라도 한다면 재정적으로 부유한 바르셀로나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열악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반등의 기회도 잃게 될 수도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성공 시대를 유지하면서 그보다 더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될 방안을 시메오네 감독은 잘 찾을거라 믿는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서도 자신의 강점을 유지하면서 약점을 보완하기를 시메오네 감독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뿐만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 바란다.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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