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칭 플레이의 선조, 깨어있는 잉글랜드인 지미 호건

축구계의 명장들/명장열전

스위칭 플레이의 선조, 깨어있는 잉글랜드인 지미 호건

토르난테 2022. 2. 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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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칭 플레이

 

오늘날에는 왼쪽에 배치된 선수가 오른쪽에서 공격하고 중앙에 있는 선수와 측면에 있는 선수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수비진을 공략하는 플레이를 자주 볼 수 있다.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도 메시가 중앙에 있지만 페드로 로드리게스나 다비드 비야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 수비를 공략했으며 펩 과르디올라 체제의 바이에른 뮌헨도 최전방에 위치한 레반도프스키가 수비를 유인하는 동안 토마스 뮐러나 아르연 로번이 1선으로 침투해 득점하는 패턴을 자주 보여줬다.

 

2007-08 AS 로마의 스위칭플레이


이는 상대 수비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요구하기에 조금 더 효과적인 공격 루트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팀들은 이런 방식을 채용한다.

지금은 이런 복잡한 공격전략이 당연시되는 시대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효율적인 전술이 유행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의 축구는 철저하게 자기 지역에서 공격하고 수비했다. 즉 센터 포워드는 센터 하프와만 붙었고 인사이드 포워드들은 좌우 하프백들과 붙었으며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은 좌우 풀백들과 붙는 게 일반적인 플레이였다. 그리고 당연히 지역방어보다는 자신이 맡은 선수를 따라다니는 대인 방어 시스템이 유행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항상 이러한 일반적인 현상에 의문을 품는 선각자들은 항상 존재했으며 축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지자는 가장 보수적인 축구관을 가진 잉글랜드에서 나타났다.

 


보수적인 종가에서 태어난 반골

 

잉글랜드는 축구 종가라 불렸다. 실제로 현대적인 축구의 형태는 잉글랜드에서 완성되었으며 세계 최초로 축구협회를 만들어 규정을 조정했고 가장 먼저 리그를 출범시켰다.

처음에는 선지자로서 앞서 나가던 잉글랜드 축구는 자만하며 자신들이 만든 규정에 집착해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심지어는 패스는 남성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해서 상대 진영에서는 패스가 아닌 드리블로만 뚫었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하지만 1872년에 잉글랜드에 비해선 항상 뒤처졌던 스코틀랜드에선 이러한 방향에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조직적인 패스 플레이로 잉글랜드를 무찌른다. 그제야 잉글랜드는 전방에서 패스는 해도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후에도 후방에서 길게 차면 달려가서 공을 받아 돌진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이런 단순한 축구를 하던 시기에 지미 호건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호건은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나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와 유사한 인사이드 포워드 자리에서 뛰었다. 스코틀랜드의 좌우 인사이드 포워드들은 볼 전개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쳤지만 잉글랜드의 좌우 인사이드 포워드들은 그저 볼을 향해 달려갔다. 호건은 이 축구가 비효율적이라 생각해왔다.

 

지미 호건의 사진


여러 클럽을 전전하다 볼턴 원더러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을 때 그는 네덜란드 투어에서 도르트레흐트를 10-0으로 이겼는데 이때 호건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제대로 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네덜란드 구단인 도르트레흐트의 감독을 맡았으며 스코틀랜드의 축구 방식인 일명 '콤비네이션 게임'이라는 방식으로 팀을 운영해 좋은 성과를 냈으며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도 잠시 맡는다. 이후 계약이 만료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발길을 돌려 그 당시에 아마추어 팀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2년간 맡는다.

이후 1913년에 잉글랜드로 돌아가 볼턴 원더러스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은퇴한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에서 감독직을 찾았지만 보수적인 잉글랜드 축구계는 외국 팀의 감독을 맡아 스코틀랜드식의 축구를 했던 그에게 배신자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잉글랜드의 구단들은 그를 감독으로 영입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이상을 찾아 전운이 감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발길을 옮긴다.

 


새 개척지 중유럽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호건

 

호건은 자신의 야망인 완벽한 패스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떠났지만 하필이면 그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호건의 조국인 잉글랜드와 그가 머무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서로 적성국가였기에 호건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체포되어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어 헝가리로 떠났고 1914년에 헝가리의 MTK 헝가리아의 감독을 맡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 프란츠 요제프 헝가리 황제가 죽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호건은 헝가리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간다.

전쟁 기간 동안 호건은 MTK 헝가리아의 선수들에게 '콤비네이션 게임'의 이론을 주입했다. 그리고 시즌 시작 직전에 페렌츠바로시의 핵심 선수이자 리그 5연패를 이끌고 155경기 258골을 기록한 당대 세계 최고의 센터 포워드 임레 쉬로서를 영입하게 된다.

임레 쉬로서는 득점력뿐만 아니라 축구 포제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패스와 볼 컨트롤 등 기본기도 탄탄했기에 호건 체제에서는 인사이드 포워드를 맡아 공격을 주도했고 센터 포워드인 알프레드 샤퍼와 호흡을 맞추며 MTK 헝가리아의 공격을 이끈다.

호건은 MTK 헝가리아에서 보낸 첫 시즌에 헝가리 리그 21승 1패, 113 득점 16 실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으로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17-18 시즌에는 원래 MTK 헝가리아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잠시 AC 마자르로 떠났던 칼만 콘라드가 돌아왔다.

호건은 역시 한 측면에만 있기에는 다소 아쉬운 칼만 콘라드마저 인사이드 라이트로 포지션을 변경시켰으며 기존에 인사이드 라이트 자리에서 활약하던 빌모스 케르테즈를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포지션을 옮겼다.

호건은 다재다능한 공격수들이 많은 MTK 헝가리아의 공격수들을 두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오른쪽에 있던 콘라드와 케르테츠를 경기 도중 상황에 따라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를 괴롭히게 주문했으며 지난 시즌에 데뷔해 아웃사이드 레프트(레프트 윙)에서 활약하던 페테르 자보도 1917-18 시즌에는 확실한 주전으로 자리 잡으며 인사이드 레프트 자리에서 활약하던 임레 쉬로서와 자리를 바꿔가면서 활약한다. 그리고 이들은 공을 잡은 알프레드 샤퍼에게 찬스를 만들기도 하고 샤퍼에게 집중된 수비를 피해 직접 득점을 하기도 하며 상대를 괴롭혔다.

 

MTK 헝가리아의 유기적인 공격전술


그리고 1917-18 시즌에 MTK 헝가리아는 21승 1무 147 득점 10 실점이라는 전설적인 승점으로 우승했으며 이후에도 호건이 감독직을 그만둔 1921년까지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며 리그 5연패를 달성하고 물러난다. 호건이 기록한 5연패는 호건이 부임하기 직전, 그러니까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되기 이전인 1913-14 시즌 우승과 호건이 물러난 이후에도 MTK 헝가리아의 리그 4회 연속 우승을 이어주며 리그 10연패의 대업에 힘을 보태게 된다.

 

지미 호건 체제의 MTK의 성적

 


다뉴브 학파

 

이후 호건은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감독 우고 마이슬이나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 훗날 WM 포메이션을 개발해 아스날의 잉글랜드 풋볼 리그 제패를 이끈 허버트 채프먼과 같은 여러 지도자들과 교류한다.

그들은 주로 다뉴브 강 유역의 국가들에 머물렀으며 모두 스코틀랜드식의 축구, 즉 '콤비네이션 게임'의 이론을 추종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다뉴브 학파'라 불렀다.

다뉴브 학파에는 당대 유럽에서 축구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소속되었고 그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이는 축구 전술사를 참 많이 바꿨다. 호건은 이때 오스트리아 국가 대표팀 코치로 재직하며 감독이자 친구 우고 마이슬을 도와 마티아스 진델라를 활용해 센터 포워드로 상대를 유인하고 그 빈 공간을 인사이드 포워드들이 침투해 득점하는 펄스 나인 전술을 완성시킨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륙 최강팀으로 군림하며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과 같은 성과를 이뤄냈다.

(마이슬과 호건의 분더 팀에 관한 설명은: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20 참조)

 

오스트리아 분더팀



그리고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던 포초는 하프백들과의 패스 라인이 원활하게 공격수에 가깝던 좌우 인사이드 포워드를 오늘날의 중앙 미드필더와 윙어 사이에 있는 하프스페이스 라인, 즉 메짤라라 부르는 위치로 내려 볼의 순환을 수월하게 바꿨다. 이를 메토도라고 하는데 포초는 이를 바탕으로 두 번의 월드컵에서 우승한다.

(포초에 관한 설명은: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52 참조)

그리고 룰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대처했다. 1925년, 오프사이드에 대한 룰이 바뀌었는데 기존에는 골라인과 패스를 받는 사람 사이에 수비수 세 명(골키퍼 포함)이 있으면 전진 패스를 허용했으나 득점 장려를 위해 이를 두 명으로 바꿨다. 이에 대해 채프먼은 좌우 하프백과 동일 선상에 있던 센터 하프를 아예 좌우 풀백 사이에 두며 오늘날의 센터백처럼 운용해 공격진을 견제하는 이른바 WM 시스템을 만들어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병사하기 직전까지 아스날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토론에서 유럽 축구는 발전했으며 메토도 시스템과 W-M은 훗날 유럽 축구의 정석으로 오랜 기간 군림했고 호건이 만든 산물인 펄스 나인은 훗날 매직 마자르와 1970 멕시코 월드컵의 브라질 팀, 미헬스가 지휘하고 크루이프가 활약하던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의 토털 풋볼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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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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