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가장 브라질리언스러웠던 감독 이야기

축구계의 명장들/명장열전

축구 역사상 가장 브라질리언스러웠던 감독 이야기

토르난테 2020. 6. 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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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

 

모두가 현실에 순응했다면 사회의 발전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이 현실과 다르면 이를 거스르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들은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축구계에도 이런 이상주의자들이 있다. 요한 크루이프, 마르셀로 비엘사, 아르센 벵거가 대표적인 예다.

"지저분한 경기나 부당한 골을 얻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패배를 택할 것이다."

이 말을 남긴 브라질의 명장 텔레 산타나 역시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계의 이상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세간의 평가는 황금의 사중주를 데리고도 월드컵 2차 리그에서 탈락한 감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부진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감독이다. 오늘은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텔레 산타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황금의 사중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텔레 산타나는 현역 시절 플루미넨시에서 윙어로 활약하며 557경기 165골을 기록한 전설적인 라이트 윙어였다. 하지만 그의 국가대표 경쟁자에는 가린샤, 줄리뉴, 호엘 등 훌륭한 윙어가 많았고 그는 국가대표팀에는 단 한 번도 소집되지 못하고 현역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텔레 산타나의 현역 시절

 

산타나가 선수로 활약할 때나 코치로 활약하기 직전 휴식기를 가졌을 때 브라질 대표팀과 산투스는 매우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며 가공할만한 공격력으로 유럽팀들을 압도적으로 무너트렸으며 산타나는 이런 브라질 대표팀을 이상향으로 삼는다.

1969년에 플루미넨시에 감독으로 돌아왔으며 데뷔 시즌에 리우 데 자네이루 주 리그를 우승했으며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는 브라질 전국 리그의 후신인 브라질 세리에 A를 우승하며 주가를 쌓았으며 상 파울루에 입성했으나 상 파울루에서는 클럽 경영 문제로 실리 축구를 지향하는 보드진과 맞지 않아 쫓겨났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감독직을 보내다가 1980년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브라질에는 당시 세계 최고라 불리던 미드필더들이 네 명이 있었다. 일명 황금의 사중주라 불렸던 지쿠, 소크라치스, 팔캉, 토니뉴 세레주였다.

황금의 사중주 멤버들, 시계 방향으로부터 팔캉, 지쿠, 소크라치스, 세레주


지쿠는 남미와 세계를 제패한 플라맹구의 공격을 이끄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경기를 읽는 시야가 탁월하며 정교하면서도 창의적인 패스와 레이더라 불릴 정도로 정교한 슈팅력으로 막강한 득점력을 기록했다.

소크라치스는 코린치안스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자 플레이메이커로 역시 경기를 읽는 시야가 탁월하였으며 정교한 패싱력과 강력한 피지컬을 겸비한 완벽한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팔캉은 이탈리아 세리에의 로마에서 활약했으며 로마의 여덟 번째 왕이라 불렸다.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경기를 읽는 시야, 정교한 테크닉과 빠르면서도 정확한 판단력을 모두 겸비한 육각형 미드필더였다.

토니뉴 세레주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소속으로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꼽혔으며 강력한 체력과 견고하면서도 안정적인 수비력을 겸비했으며 패싱력도 준수했다.

텔레 산타나는 이들을 바탕으로 중앙 미드필더를 네 명을 두는 4-2-2-2를 개발했으며 중앙에서의 경기 지배력을 극대화하며 상대에게 공격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방식의 축구를 고수했다. 그리고 측면은 측면 수비수인 레안드로와 주니오르가 전담한다.

1982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포메이션


하지만 이 포메이션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 명을 두는 조합은 팀의 머리가 두 개가 되는 상황이 올 수 있었으며 중앙 미드필더인 팔캉 역시 팀에서는 플레이메이킹을 담당하는 선수라 사공이 너무 많아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둘째 측면에 배치된 선수가 사이드 백 두 명 뿐이라 측면 수비수들이 오버래핑을 했을 때 측면 수비가 비면서 두 명의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인 세레조로 상대 공격진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산타나는 이 문제점을 원 팀이라는 마인드로 해결한다. 지쿠와 소크라치스는 서로 협력하며 상황에 따라 주인공을 서로 바꿨으며 팔캉은 소속팀에서와는 달리 후방 빌드업에서만 영향을 끼치며 세레주와 함께 넓은 활동량으로 사이드 백의 오버래핑을 커버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

브라질 대표팀은 압도적인 점유율과 최대 여덟 명이 공격하는 시스템을 앞세워 상대팀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브라질은 남미 예선에서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4전 4승 11 득점 2 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본선에 진출한다.

 

현실의 벽, 조나 미스타에게 막히다.

 

브라질 대표팀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 여론 조사에서 마라도나와 파사렐라, 켐페스가 모두 출전한 아르헨티나와 바이에른 뮌헨이 자랑하는 브라이트니게가 이끄는 유럽 챔피언 서독을 제치고 압도적인 우승후보로 꼽혔다.

그리고 브라질은 이 판단이 허언이 아닌듯 조별 예선에서 유럽의 강호 소련을 2-1로 제압했으며 당대 유럽 최강팀인 리버풀의 핵심 선수인 달글리시, 한센, 수네스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를 4-1로 대파했으며 뉴질랜드 전에서도 4-0으로 대승을 거둔다. 1차 조별 리그에서 3전 전승 10 득점 2 실점을 거둔다.

스코틀랜드의 리베로이자 리버풀의 전설 앨런 한센과 볼경합을 하는 소크라치스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1차 조별 리그를 1위로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2차 조별 리그에서 역대 최악의 조를 만나게 된다.

파사렐라, 마라도나, 켐페스를 모두 보유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1차 조별 리그를 2위로 통과했으며 이탈리아도 골 가뭄에 휩싸이며 1차 조별 리그를 2위로 통과해서 그들은 브라질과 한 조에 묶이며 축구 역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가 등장한다.

2차 조별 리그에서는 단 한 팀만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조별 리그 2위도 바로 탈락하는 시스템이었다.

첫 번째 경기에서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인 아메리코 가예고가 퇴장을 당했으며 2-1로 이탈리아가 이긴다.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두 번쨰 경기가 시작하는데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도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뛰어난 패스워크를 이용한 압도적인 볼 점유율을 보여준다. 이것을 제어할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가예고는 징계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라도나를 견제하는 팔캉과 소크라치스

 

지쿠와 세르지뉴, 주니오르의 연속골로 브라질은 어느새 3-0으로 앞서가고 있었으며 디에고 마라도나는 여기에 신경질이 난 상태라 자신을 마킹하던 수비수를 발로 차고 퇴장당했다. 아르헨티나의 라몬 디아스가 만회골을 넣었지만 브라질은 아르헨티나를 3-1로 이기며 2-1로 이긴 이탈리아와는 비기기만 해도 준결승에 진출하는 상황을 만든다.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카테나치오의 본산지이자 카테나치오를 토대로 만든 수비적인 비대칭 시스템인 조나 미스타를 메인 포메이션으로 삼았던 이탈리아였다.

카테나치오는 수비 지향적인 축구기에 기회가 적게 오는 상태라 브라질에 비해서 이탈리아에서는 스트라이커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파울로 로시는 네 경기 동안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며 부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울로 로시는 이 경기를 기점으로 부활하며 브라질을 상제로 선제골을 득점한다. 하지만 브라질도 훌륭한 패스워크를 보여주며 소크라치스가 동점골을 넣는다. 거기에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수비수이자 밀란의 주장인 콜로바티가 부상당하며 만 19세의 신예 베르고미가 교체로 출장한다.

지쿠를 밀착마킹하는 젠틸레


그렇지만 베르고미, 젠틸레, 오리알리, 타르델리의 거친 수비에 브라질의 황금의 사중주는 고전했으며 만 19세의 베르고미는 브라질의 지쿠와 소크라치스, 에데르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파울로 로시의 헤트트릭으로 3-2로 이탈리아가 신승을 거두었으며 텔레 산타나와 브라질의 이상적인 축구의 도전은 실리 축구의 이탈리아의 벽에 가로막힌다. 브라질에서는 이 경기를 데 사리아 참사라고 부르며 브라질 팬들은 이 경기를 보면서 두 명이 자살하고 다섯 명이 심장 마비로 죽는 비극을 겪는다.

다만 이들은 32년 전에 일어난 마라카냥의 비극과 32년 후에 일어날 미네이랑의 비극의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브라질의 정신을 지키며 당당하게 싸우다 졌다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준결승도 못 간 것은 사실이라 산타나 감독은 사임을 했다.

 

산타나의 정신을 기억하다.

 

이후 산타나는 알 아흘리를 거쳐 브라질 대표팀 2기를 맡았으나 플라티니와 티가나를 앞세운 프랑스에 의해 8강에서 승부차기에 패배하며 또 탈락했다.

그리고 1990년대 상파울루의 전성기를 열며 한 번의 전국 리그 우승, 두 번의 주 리그 우승, 두 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경험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팬들은 그를 '마스터'라고 불렀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1996년 뇌경색에 걸려 건강이 안 좋아진 산타나는 결국 상파울루를 떠나야 했다.

상 파울루 시절의 산타나

 

1997년에는 파우메이라스에서 감독직 복귀를 시도했으나 건강 문제로 현직에서 완전히 은퇴했으며 2006년에 장염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산타나의 축구는 브라질 축구의 정신 그 자체였다. 공격적으로 나서며 화려한 개인기와 환상적인 패스워크로 상대를 시종일관 압도하기를 원했으며 이는 무승부만 거둬도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상황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브라질 팬들은 이 축구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며 자랑스러워했고 비록 우승엔 실패했지만 산타나는 위대한 감독으로 추앙했다. 반대로 실리 축구로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우승한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에게는 브라질스럽지 못했다며 비난을 가했다.

분명 세상 사람들은 텔레 산타나가 대단한 감독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우승컵을 많이 획득한 감독은 아니여서 축구계에서 명장이라는 주제로 대화하면 잘 언급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텔레 산타나 건조폼 (출처: 에펨네이션 법정스님의 소유)


그렇지만 가장 브라질스러운 텔라 산타나란 이름을 한 번쯤은 기억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축구를 잠시나마 보여주며 브라질 축구팬들에게 산타나의 정신을 각인시킨 명장이기 때문이다.

가장 브라질리언다운 감독, 축구계의 이상주의자, 텔레 산타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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