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마다 성공을 거둔 푸스발 카이저의 도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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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마다 성공을 거둔 푸스발 카이저의 도전 정신

토르난테 2020. 7. 1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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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의 새로운 도전

 

역대 최고의 수비수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프란츠 베켄바우어라고 말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하프백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약관의 나이에 유럽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바비 찰튼과 월드컵에서 자웅을 겨루었다.

이후 리베로로 전업한 이후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두고 요한 크루이프와 라이벌리를 형성했으며 결국 분데스리가와 챔피언스리그, 유로와 월드컵을 모두 우승하고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은퇴했다.

 

주장으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든 베켄바우어

 


베켄바우어가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1983년에는 서독 대표팀은 데어발 체제에서 유럽 챔피언과 월드컵 준우승을 이뤘다. 하지만 유프 데어발과 서독 국가대표팀의 동행은 유로 84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밀려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면서 끝이 났다.

디 만샤프에서는 보통 감독이 사임하면 수석코치가 뒤를 이었다. 네르츠, 헤어베어거, 쇤, 데어발 모두 디 만샤프의 수석코치를 거쳐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베켄바우어는 야인에서 바로 데어발의 후임 감독으로 올라 디 만샤프의 부흥과 월드컵 우승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3-5-2 시스템의 재해석

 

 

베켄바우어의 전임 감독 데어발은 투 톱에 대항하고자 새로운 시스템인 3-5-2 시스템을 독일에 성공적으로 이식시켰으며 측면 수비수가 측면을 전담하는 대신 스토퍼를 한 명 더 두는 방식으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보냈다.

베켄바우어도 그 점은 본받았으며 초보 감독이던 시절인 1986 멕시코 월드컵까지는 데어발과 유사한 방식을 채택했으나 마라도나를 막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2. 1986 월드컵의 서독의 베스트 11

 


하지만 1986 월드컵은 준우승이란 성적에도 불구하고 경기력이 좋지 못했고 베켄바우어는 3-4-1-2와 유사했던 데어발의 3-5-2를 3-3-2-2의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새 전술의 구심점으로는 바이에른 뮌헨과 인터 밀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마테우스와 브레메에 있었다.

 

3. 1990 월드컵의 서독의 베스트 11

 


보통 서독의 리베로는 고전적인 리베로와 다르게 공격 가담을 통해 빌드업을 주도했으며 이는 베켄바우어와 슈틸리케가 보여줬던 모습이다.

하지만 베켄베우어는 바이에른 뮌헨의 리베로 아우겐탈러가 자신과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으며 아우겐탈러에게는 수비라인 커버라는 전통적인 리베로의 롤만 맡겼으며 위르겐 콜러와 부흐발트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리베로이지만 자신과 달랐던 아우겐탈러보다 오히려 자신과 더 유사한 면이 있었던 다재다능한 마테우스를 피보테에 뒀으며 그에게 기존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본호프나 드렘러와는 다르게 기존의 리베로들이 맡았던 역할을 맡겼다는데 이를 포어 리베로라고 한다.

 

베켄바우어 감독의 페르소나인 로타어 마테우스

 


그리고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측면에는 윙백인 브레메와 베르톨트가 포진했는데 베르톨트는 공격 가담을 자제하고 수비 진영으로 오는 선수를 직접 마킹했다. 그러나 브레메는 그 당시로서는 거의 없던 측면 수비수의 플레이메이킹을 최초로 시도했으며 측면에서 플레이메이킹을 시도하며 롱패스를 찔러주는 방식으로 공격을 지원했다. 왼쪽 측면은 왼쪽에 포진한 스토퍼인 부흐발트가 커버했으며 부흐발트는 수비 커버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보여줬던 센터 백의 오버래핑 이후 크로스를 올리는 모습을 이미 1990년에 보여줬다.

 

브레메와 마테우스의 중원 싸움을 돕는 선수로는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진된 젊은 유망주 토마스 헤슬러가 왕성한 활동량으로 3선 지역을 커버하며 상대 공격형 미드필더들을 1차적으로 봉쇄했다. 좌측의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숏 패스와 롱 패스, 모두에 능했던 플레이메이커 우베 바인이 맡았지만 조별 예선에서의 부진으로 뛰어난 드리블러 피에르 리트바르스키에게 자리를 내줬으며 이후에는 리트바르스키가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스트라이커들을 지원했다. 투 톱에는 다재다능한 스트라이커인 푈러와 클린스만이 포진했다.

 

인터 밀란 소속으로 게르만 삼총사라 불렸던 서독의 핵심 선수인 마테우스, 브레메, 클린스만의 사진.

 


이러한 공격적인 3-5-2 시스템의 운용은 유로 88에서는 리누스 미헬스의 네덜란드에게 패해서 미완으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거두게 하며 전술을 완성한다.


Tyrant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은 경기당 득점이 가장 적게 나왔으며 대체로 수비축구를 앞세우며 가장 재미없는 월드컵 중 하나로 이야기가 많이 나온 대회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서독 대표팀에게는 예외였다. 서독은 마치 폭군(Tyrant)처럼 상대 팀을 압도적인 공격력과 거칠고 집요한 수비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이끄는 전통의 강호 유고슬라비아를 4-1로 대파했으며 아시아 예선을 2등으로 통과한 UAE에게 5-1로 대승하며 세계의 벽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 경기에 콜롬비아와 비겼지만 역시 경기 내내 압도하다가 마지막에 실점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무승부를 거둔 것이다.

16강전에서는 유로에서 서독을 압도했던 네덜란드를 만났다. 여기서 베켄바우어는 "조별예선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네덜란드는 두렵지 않다."는 요지의 인터뷰로 상대를 도발했으며 실제로 여기에 동요된 레이카르트는 푈러에게 침을 뱉고 동반 퇴장을 당했다. 푈러의 비중이 작은 건 아니지만 네덜란드에서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포어 리베로인 레이카르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며 네덜란드는 공수 균형이 무너지며 서독에게 패한다.

 

푈러에게 침을 뱉는 레이카르트. 판정 결과는 동반 퇴장이지만 공격과 수비의 균형을 맞춰주는 레이카르트의 퇴장은 네덜란드가 더 큰 손해를 봤다.

 


8강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며 4강에서는 잉글랜드와의 명경기 끝에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6년전 포그츠가 크루이프를 전담 마킹했듯이 부흐발트가 마라도나를 전담 마킹했다. 마라도나가 묶이자 아르헨티나의 필드 플레이어들을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했으며 결국 서독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지만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에 올린 고이코에체아가 독일의 파상공세를 번번이 막아냈다.

 

마라도나를 집중 마킹하는 부흐발트

 

결승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6년전 포그츠가 크루이프를 전담 마킹했듯이 부흐발트가 마라도나를 전담 마킹했다. 마라도나가 묶이자 아르헨티나의 필드 플레이어들을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했으며 결국 서독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지만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에 올린 고이코에체아가 독일의 파상공세를 번번이 막아냈다.

그리고 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페드로 몬손은 클린스만에게 거친 반칙을 해서 퇴장당했으며 센시니가 푈러에게 한 반칙은 브레메의 페널티 킥 결승골로 이어졌으며 공격수 구스타보 데조티는 위르겐 콜러에게 공격자 파울을 가하며 퇴장당하며 서독에게 4년 전의 복수를 허용하며 우승컵을 내줬다.

서독은 이 대회에서 수비 전술로 일관한 다른 팀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공격루트와 전술적인 관전 포인트를 제공하며 재미있는 경기에도 성공하면서 과정도 잡았고 그런 과정을 겪으며 우승하며 결과까지 잡으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팀이 되었다.

 


독일 통일의 선물로 월드컵 우승을 바치다.

 

베켄바우어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한 두 번째 인물이 되었으며 주장과 감독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한 최초의 인물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7.우승 메달을 들고 환호하는 베켄바우어와 선수들

 


이후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었고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통일되었다. 그리고 베켄바우어가 감독, 마테우스가 주연으로 우승한 이탈리아 월드컵은 이 독일 통일의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이후 마르세유와 바이에른 뮌헨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베켄바우어는 1994년에 바이에른 뮌헨 회장이 되었고 1995-96 시즌 후반기에는 사임한 레하겔 대신 감독직을 대행하며 바이에른 뮌헨에게 UEFA컵 우승을 선물하기도 했으며 그가 데려온 명장 오트마 히츠펠트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바이에른 뮌헨을 세계 최강의 클럽 중 하나로 부활시켰다.

베켄바우어는 1990 월드컵을 기점으로 감독직에서도 성공을 거뒀으며 개인으로서는 새로운 도전의 성공을 이뤄냈고 조국에는 통일된 조국에 최고의 선물을 주게 되었다.

두 번의 월드컵에서 각각 다른 임무로 우승한 그는 1998년에 독일 축구 협회의 부회장직에 올랐고 2006년에는 독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또 다른 성공을 거둔다.

선수, 감독, 구단 경영인, 축구 행정가로서 모두 성공한 베켄바우어의 도전, 사나이라면 존경할 만 하지 않는가?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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