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70위~6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70위~61위

토르난테 2024. 7. 2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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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위 빌 니콜슨

 


생년월일: 1919년 1월 26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토트넘 핫스퍼


'리얼 퍼팩트 스퍼스맨'

 

유소년 시절부터 현역 시절을 거쳐 지도자 생활을 모두 오직 토트넘 핫스퍼에서만 헌신한 리얼 퍼펙트 스퍼스로 전술적으로는 중원에 공격진에서 한 명을 내려 중원에 힘을 주며 3-3-4 포메이션을 창조해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많은 공격 기회를 만들었는데 유사시에는 양 측면 공격수까지 볼을 받으러 내려오는 대형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로 볼의 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선수로서도 토트넘의 레전드였지만 감독으로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었던 빌 니콜슨은 다소 생소한 포지션인 3-3-4 포지션을 잘 활용하며 16년간 재직하면서 1960-61 시즌 리그와 FA컵 도메스틱 우승을 이뤄낸 것을 포함해 현재까지 구단 역사상 마지막 정규리그 우승 및 FA컵 3회 우승, 그리고 리그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1-62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는 페예노르트와 두클라 프라하를 꺾고 4강에 진출해 디펜딩 챔피언 벤피카와도 막상막하의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이듬해에는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컵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1-72 시즌에는 AC 밀란과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연달아 격파하고 초대 UEFA컵 우승을 차지했다.

빌 니콜슨은 토트넘이 거둔 2회의 1부 리그 우승에서 첫번째 우승은 선수로, 두 번째 우승은 감독으로 이뤄냈는데 이런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토트넘 핫스퍼 구단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에 있는 거리를 '빌 니콜슨 거리'라 명명하기도 했다.

 

 

69위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생년월일: 1938년 11월 5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낭만파 좌익축구의 거두'

아름다운 공격 축구를 추구하며 선수들의 창의적인 플레이 및 화려한 기술을 중시하는 축구 철학인 메노티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스스럼없이 하는 수벨디아-빌라르도주의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약체로 분류되던 우라칸에서 첫 지휘봉을 잡은 메노티는 4-1-2-3 포메이션의 아름다운 공격축구를 바탕으로 팀을 성장시켰고 아르헨티나의 최강팀 중 하나인 라싱 클럽을 5-0으로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73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74 서독 월드컵 이후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맡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79년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이뤄냈고 1983-84 시즌에는 FC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승리라는 결과보다 경기력이라는 과정을 중요시한 메노티는 실제로 승리를 위해 선수들에게 폭력적인 수비를 지시했던 클레멘테를 크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매력을 느꼈는데 마르셀로 비엘사를 비롯해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68위 오스카르 타바레스

 


생년월일: 1947년 3월 3일
국적: 우루과이
주 소속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축구에서 전술은 짧은 담요와 같다"

과거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변방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우루과이 대표팀을 다시 세계 정상급으로 올린 명장으로 전술적인 유연성이 대단해 자신이 가진 자원과 상대가 가진 자원을 잘 분석해 맞춤형 전술을 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포를란과 고딘 같은 대표팀 핵심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역할을 대표팀에선 종종 보여줬는데 골 사냥꾼으로 유명한 포를란이 타바레스 휘하에서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우수한 모습을 보였고 아틀레티코에서는 발밑이 약점으로 지적받던 고딘이 타바레스 휘하에서는 리베로로서의 우수한 역량을 보여줬다.


1983년 우루과이 U-20 대표팀의 감독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우루과이의 명문 페냐롤의 다섯 번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0년에는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을 맡아 조국을 16강에 올렸다. 보카 주니어스에서는 1992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페르투라 우승을 이뤄냈고 세리에 A의 칼리아리 칼초에서도 강등권에 머물러 있던 팀을 중위권까지 끌어올렸지만 AC 밀란에서는 큰 실패를 맛보며 오랜 기간 방랑기를 경험했다.

2006년에 우루과이 대표팀에 다시 부임한 타바레스는 우루과이를 남미를 대표하는 강호로 천천히 끌어올리며 2010 남아공 월드컵 4강, 2011 코파 아메리카 우승, 2018 러시아 월드컵 8강이라는 성과를 이뤄내는 등 1970년 이후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대표팀을 다시 월드컵의 강자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타바레스는 2011년에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며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 감독에 선정되었다.

 


67위 로베르토 만치니

 


생년월일: 1964년 11월 27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장사들을 통솔하는 덕장'

21세기 초반, 유럽 무대 정상급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관리자적인 측면에서는 팀 리빌딩에 능했고 전략가적인 측면에서는 단단한 수비와 중원을 구성해서 쉽게 지지 않는 팀을 만들고, 공격은 공격진의 개인 기량에 맡기는 스타일로 특히 신체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선수들의 기술 발달은 이미 상향평준화되어 더 상향되기 어렵기 때문에 팀 간 전력을 변별할 수 있는 요소는 선수들의 신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감독 데뷔 시즌인 2000-01 시즌에 피오렌티나의 지휘봉을 잡은 만치니는 감독 데뷔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말년을 보낸 라치오에서는 재정난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2003-04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재차 이뤄냈다. 인테르 밀란에서도 세리에 A 3연패와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이뤄내 네라주리의 독주체제를 굳히며 2007-08 시즌 판키나도르를 수상했고 만수르 체제의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2011-12 시즌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역전우승을 이뤄내는 등 훗날 맨체스터 시티가 유럽 최강팀으로 올라서는데 기반을 마련했다.

클럽 팀을 지휘하던 시절에는 도메스틱 컵 대회에 강해 다섯 팀에서 총 6회의 도메스틱 컵대회를 우승했지만 유럽대항전에서는 약세를 보였는데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은 뒤에는 안정적인 기본 플랜과 중간중간 적절한 승부수로 UEFA 유로 2020 우승을 이뤄내며 2021년 FIFA 올해의 감독과 UEFA 올해의 감독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고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과 글로브 사커 어워즈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IFFHS 세계 최고의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정되었음은 물론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2등급의 수훈을 받았다.

 


66위 룰라

 


생년월일: 1922년 3월 1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산투스 FC

'축구황제를 감독하는 사나이'

본명은 루이스 알폰소 페레즈로 비선수 출신의 지도자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불렸는데 브라질 대표팀에 버금가는 강력한 화력의 4-2-4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산투스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했다.

FC 산투스의 유스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54년에 1군 감독으로 승격된 룰라는 1956년에 바우루 유소년 팀에서 펠레 영입을 시작으로 구단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8회 우승과 브라질 전국 리그 5연패를 이뤄내며 브라질 무대를 정복했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각각 2회 연속으로 우승하며 산투스의 황금기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펠레, 페페, 지투, 지우마르, 하무스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을 비춰주는 찬란한 조명이었던 룰라는 산투스에서 945경기 619승 144무 182패, 승률 65%를 기록했다. 실제로 산투스는 룰라가 물러난 이후에는 펠레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에두와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건재했음에도 룰라 시절과 같은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65위 페르디난트 다우치크

 


생년월일: 1910년 5월 30일
국적: 슬로바키아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다섯 대회를 정복한 슬라브인 사령관'

선수 시절 슬라비아 프라하의 리그 4회 우승을 이뤄낸 전설적인 풀백이었던 다우치크는 그 시대 중유럽 지역의 여러 지도자들과 같이 다뉴브 학파식 스위칭 플레이를 받아들였기에 유기적인 스위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도자 시절에도 브라타슬라바, MTK 헝가리아 등 중유럽의 명문팀을 이끌며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의 슬로벤스칸 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명성을 떨친 다우치크는 중유럽과 동유럽을 덮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쿠발라와 함께 공산주의 정권에서 탈출했고 FC 바르셀로나는 쿠발라를 영입하기 위한 조건으로 그를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사령탑으로 임명된 과정이 다소 잘난 사위를 둔 덕으로 보였지만 다뉴브 학파의 직계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던 다우치크는 그 행운을 자신의 업적으로 전환할 수 있던 사람이었던 다우치크는 첫 시즌부터 1950-5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1-52 시즌에는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라틴컵을 포함해 다섯 개의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친코 코파스 바르셀로나라 불리는 시대를 이뤄냈고 이듬해에도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코파 에바 두아르테 3관왕을 이뤄내며 바르셀로나의 첫 전성기를 열었음에도 일부 주축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지휘봉을 잡은 아틀레틱 빌바오에서도 코파 델 레이 2연패를 이뤄냈고 1955-56 시즌에는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따돌리고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내며 전성기를 누렸다.



64위 빌 스트루스

 


생년월일: 1875년 6월 16일
국적: 스코틀랜드
주 소속팀: 레인저스 FC

'원조 우승 청부사'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 축구계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원랜 육상선수 겸 석공으로 축구와 인연이 없었지만 1920년에 보트 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초대 감독 윌튼의 뒤를 이어 레인저스의 2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34년의 장기집권을 이뤄내며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특히 1949년에는 영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했다.

34년 동안 스코틀랜드식 빠른 축구를 바탕으로 레인저스를 영국 축구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의 자리로 올린 스트루스는 정규리그 18회 우승 및 스코틀랜드 컵 10회 우승, 그리고 리그컵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전국단위 우승컵만 30개를 들어올렸고 지역 단위 컵 대회인 글래스고 컵에서는 22회 우승하며 무려 52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국가 단위 트로피만 해도 30회의 우승컵을 차지했다.

자타공인 레인저스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 스투르스는 감독직을 물러나고 부회장 역할을 수행하던 1956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해 레인저스의 홈구장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이 내려다 보이는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먼 훗날인 2005년에는 레인저스의 회장 데이비드 머레이 경이 스트루스의 헌신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메인 스탠드를 "빌 스트루스 메인 스탠드"로 명명하였고, 그곳에 흉상을 배치하게 된다.



63위 조지 램제이

 


생년월일: 1855년 3월 1일
국적: 스코틀랜드
주 소속팀: 아스톤 빌라

'아스톤 빌라 왕조의 시조'

축구사 최초의 명장으로 불리는 감독으로 잉글랜드 축구계에 만연한 롱볼 축구에 반기를 들고 스코틀랜드식의 짧고 빠른 패스를 도입해 1890년대 골든 에라, 즉 황금시대라 불렸던 아스톤 빌라의 약진을 이끌었다.

아마추어 선수로 6년, 프로 감독으로 40년, 총 46년의 축구 인생을 오직 아스톤 빌라에서만 보낸 램제이는 빌란스의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와 FA컵에서 각각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런던 채러티 실드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총 14개의 트로피를 들었다.

"나는 아스톤 빌라라는 땅에 도토리를 심었고, 그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왔다."라고 호언장담한 램제이의 말에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을 정도로 그가 아스톤 빌라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대단했다.



62위 에메 자케

 


생년월일: 1941년 11월 27일
국적: 프랑스
주 소속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보르도 와인과 같은 아트 사커의 디렉터'

프랑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1980년대에는 젊고 빠르면서도 지구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활용한 4-4-2 시스템을 활용했고 1990년대에는 일명 크리스마스트리 포메이션이라 불리는 4-3-2-1 시스템을 바탕으로 견고한 수비력에 더해 중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축구를 했다.

리옹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지롱댕 보르도에서 제1의 전성기를 맞은 에메 자케는 4-4-2 전술을 도입했고 팀 내 노장들을 정리하는 한편 유스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했는데 1980-81 시즌에 3위로 도약한 것을 시작으로 리그앙 3회 우승 및 쿠프 드 프랑스 2회 우승 및 1986-87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프랑스 올해의 감독상을 2회 수상하며 마르세유 왕조가 등장하기 이전 보르도를 프랑스 최강의 클럽으로 올렸다.

두 번이나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며 최악의 세대라 불렸던 프랑스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지네딘 지단, 릴리앙 튀랑과 같은 젊은 선수들을 등용한 자케는 소위 철의 포백이라 불리던 리자라쥐-블랑-드사이-튀랑의 수비진과 데샹을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와 지단을 중심으로 한 두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세워 4-3-2-1 포메이션을 선보이며 파라과이, 이탈리아, 크로아티아를 연파한 뒤에 호나우두와 히바우두를 앞세운 브라질 대표팀을 3-0으로 꺾고 자국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에메 자케도 프랑스 올해의 감독 및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그리고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 감독에 선정되었다.

 

 

61위 루이스 아라고네스

 


생년월일: 1938년 7월 28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아르마다 군단과 로히 블랑코의 철혈제독'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롱런했던 감독으로 기본적으로 화끈하면서도 조직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며 이름을 날렸고 2000년대 중후반에는 강력한 중원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점유율 축구와 기존의 화끈함을 더해 재밌는 경기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선수 은퇴 직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해서 뛰어난 지도력을 선보였고 35년의 감독 생활 중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만 여섯 번 부임했는데 아라고네스는 1974년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1975-76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6-77 시즌에는 로히 블랑코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며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방만한 운영으로 강등당하자 손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이끌며 2001-02 시즌 세군다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켰으며 2002-03 시즌에도 팀의 라리가 잔류에 성공하며 소방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외에 다른 클럽에서는 다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스페인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는 라울, 살가도, 바하라 등 노장들을 제외하고 신예 선수들을 발탁했고 비야레알에서 이름을 날린 브라질 출신의 마르코스 세냐를 귀화시켜 등용하는 등 대표팀의 세대교체와 체질개선을 이뤄냈고 그 결과로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했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받은 델 보스케가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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