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50위~4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50위~41위

토르난테 2024. 7. 23. 15:37
728x90
728x90

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인물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 모종의 이유로 순위가 소폭 바뀌어서 초본에 51위었던 디에고 시메오네가 50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60위에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포함되었습니다.

 


50위 디에고 시메오네

 


생년월일: 1970년 4월 28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두줄 수비의 반란을 이끈 연봉 600억의 사나이'

 

현대 축구계에서 수비축구의 대가로 평가받는 인물로 4-4-2 시스템을 수비적으로 재해석해 라리가 중하위권 클럽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인을 제시하며 또 다른 바람을 불러왔고 특히 선수시절부터 유명했던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감독이 된 이후에는 한층 진화했는데 페르난도 토레스는 그를 두고 "시메오네의 리더십은 내가 만난 감독들 중 세계 최고다."라고 평가했으며 알레띠의 레전드 가비 역시 "우리는 시메오네를 믿는다. 나에게 있어 그는 최고의 감독이며, 그는 팀을 승리로 이끈다."라고 인터뷰했다.

라싱 크루브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의 여러 클럽 및 이탈리아의 칼초 카타니아를 거쳐  2011년, 몰락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감독으로 부임해 빠른 속도로 팀을 수습하는데 성공해서 2011-12 시즌 UEFA 유로파리그 우승 및 2012-13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2011-12 시즌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았다.

 

대망의 2013-14 시즌에는 두줄 수비 바탕의 4-4-2 시스템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해서  메시의 바르셀로나와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가 양분하던 라리가 무대에서 양강을 밀어내고 라리가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2017-18 시즌에는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4-4-2 시스템을 버리고 나겔스만과 휘터가 발전시킨 독일식 3-5-2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채용해 2020-21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인 IFFHS가 선정한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세계 최우수 클럽 감독에 선정되었고 연봉 4000만 유로를 수령하며 역대 축구 감독 연봉 랭킹 1위에 오른 시메오네는 2011-12 시즌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을 시작으로 라리가 최우수 감독 3회 수상 및 2014년 FIFA 올해의 감독 3위, 그리고 2016년 IFFHS 세계 최우수 클럽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실제로 구단은 그를 일부 실책에도 불구하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한정해서는 알렉스 퍼거슨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49위 아르센 벵거

 


생년월일: 1949년 10월 22일
국적: 프랑스
주 소속팀: 아스날 FC 


'축구의 이상을 찾는 교수님'

 

알렉스 퍼거슨과 함께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철저한 식단 운용과 과학적인 훈련으로 선수단의 체력 상태를 최선으로 끌어올렸고 다소 지루한 실리축구를 구사했던 아스날을 단번에 높은 라인에서 빠른 전개로 상대를 공략하는 공격적인 팀으로 변모시키며 명성을 떨쳤음은 물론 경제학 석사와 명예박사학위를 따냈을 정도로 경제관념에도 능해 팀 운영에도 적극 참여해 저예산으로 팀을 운영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와 경쟁했다.

RC 스트라스부르 U-19팀과 AS 낭시에서 경험을 쌓은 뱅거는 AS 모나코의 지휘봉을 잡아 1차 전성기를 이끌며 1987-88 시즌 리그앙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에는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1-92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우수한 성적에 더해서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선구안을 바탕으로 훗날 프랑스 대표팀의 주축이 되는 에마뉘엘 프티, 릴리앙 튀랑과 같은 어린 재능들을 발굴했고 조지 웨아 역시 뱅거의 밑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일왕배 및 일본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고 일본의 식단 문화에서 식단 관리에 힌트를 얻어 한층 성장한 뱅거는 아스날의 지휘봉을 잡아 퍼거슨과 라이벌리를 구성하며 2003-04 시즌 무패우승 및 2차례의 도메스틱 더블을 포한해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 및 FA컵 7회 우승, 그리고 커뮤니티 실드 7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유럽 대항전 우승과는 인연이 없어 1999-2000 시즌 UEFA컵과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각각 갈라타사라이와 FC 바르셀로나에게 고배를 마시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리그 4위와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에 만족한다는 조롱을 들었지만 경기장 이전으로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라 재평가를 받았다.

아르센 뱅거 개인도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프랑스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및 1995년 J리그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고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3회 수상 및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에 4회 선정되었고 1998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아스날 감독 재임 중이었던 2006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0년에는 2001–2010 IFFHS 세계 최고의 감독에 선정되었으며 2023년에는 프리미어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8위 제프 헤어베어거

 


생년월일: 1897년 3월 28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

28년간 디 만샤프트의 감독을 맡았던 명장으로 유럽 대륙에 2-3-5 시스템이 유행하던 시절에 잉글랜드 최강의 팀 아스날이 활용한 WM 시스템과 독일 최고의 클럽 샬케가 활용했던 짧은 패스워크 위주의 전술인 일명 크라이셀을 도입해 독일 축구의 큰 발전을 이룩했다.

1928년 독일 대표팀 수석 코치로 활약하다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부진으로 사수 네어츠가 구속되면서 대표팀 감독직에 처음 부임했던 헤어베어거는 당대 가장 잘 나가는 클럽팀이었던 아스날의 축구를 참조해 WM 시스템을 도입했고 때때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 운용을 보여주며 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를 8-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제압했던 경기를 포함해 안슐루스 이전까지 독일 대표팀의 11경기 연속 무패를 이끌며 팀을 완성시켰으나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대표팀에 중용할 것을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스쿼드에 포함했고 이 때문에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1차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으로 분단한 뒤에도 서독 축구의 재건을 이끌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당대 최강의 팀 헝가리를 상대로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던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올랐으며 이런 업적들은 훗날 서독이 유럽을 대표하는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47위 마리우 자갈루

 


생년월일: 1931년 8월 9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셀레상의 현자'

선수 시절에도 우수한 축구 지능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던 선수로 감독으로서도 상황에 따라 공격 축구와 수비 축구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브라질 축구는 물론 아시아 축구에도 큰 발전을 이뤄낸 축구인이다.

선수시절 전성기를 보냈던 보타포구에서 감독직을 시작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 및 1968년 타사 브라질 우승을 이뤄내 주목받은 자갈루는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펠레, 아우베르투, 제르송과 같은 각 라인의 중심축들과 활발한 소통을 통해 팀원 모두를 살리는 전술을 고안해내며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이끌며 6전 전승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70 셀레상의 다수가 빠진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바뀐 브라질의 현실을 직시해 수비 축구로 4위에 올리며 선전했으나 우승과 화려함 모두 차지하지 못하자 팬들은 자갈루를 비난하며 그해 유행한 독감을 자갈루 독감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이에 충격받은 자갈루는 1970년대 하반기에 많은 투자를 이뤄내던 중동으로 떠났는데  중동에서도 약체로 평가받는 쿠웨이트를 이끌고 1976 아시안컵 준우승을 이뤄내는 업적을 세웠고 사우디아라비아 축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동과 여러 브라질 팀을 돌아다니다가 1994년에 다시 셀레상의 지휘봉을 잡은 자갈루는 신예 호나우두, 카를루스, 히바우두와 베테랑이었던 둥가, 호마리우, 아우다이르를 아우르며 완벽한 신구조화를 이뤄냈고 1997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및 컨페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상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우승후보 1순위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결승전에서 호나우두가 컨디션 난조로 부진했고 결국 프랑스에게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하며 물러났다.

 


46위 플라비우 코스타

 


생년월일: 1906년 9월 14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바스쿠 다 가마

'승리의 급행열차의 특등 기관사'

비센치 페올라, 마리우 자갈루와 함께 현대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로 아직 2-3-5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브라질 축구계에 잉글랜드식 WM 포메이션을 선보였으며 여기에 유동적인 스위칭 플레이도 일부 보여주며 한층 더 화려하면서도 원활한 전개를 보였다.

리우 데 자네이루 주의 플라멩구와 바스쿠 다 가마의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플라비우 코스타는 첫 감독직을 시작한 플라멩구에서는 무려 네 번이나 감독으로 부임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6회 우승을 포함해 27개의 크고 작은 공식전과 비공식전 우승을 이뤄냈고 바스쿠 다 가마에서는 승리의 급행열차라고 불리던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과 194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 대회인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 데 캄페오네스 우승을 포함해 12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바스쿠 다 가마의 감독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브라질 대표팀 감독도 겸직했는데 바스쿠 다 가마의 주전 선수들을 주 전력으로 꾸려 1949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나 조국에서 열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결승 리그에서 스웨덴과 스페인을 각각 7-1과 6-1로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라카냥 경기장에서 우루과이에게 역전패하며 한동안 국민역적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만 9회 우승했고 비공식전을 포함해 무려 6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5위 알프 램지

 


생년월일: 1920년 1월 22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날개 없는 경이로움'

선수 시절에는 토트넘 훗스퍼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는 4-4-2 다이아몬드 계열의 포메이션의 창시자로 양 측면의 메짤라들이 윙어가 되기도 하고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기도 하며 인사이드 포워드가 되기도 하는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며 날개 없는 경이로움이라 불렸다.

토트넘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빌 니콜슨에 밀려나며 입스위치 타운에서 감독 데뷔를 했던 램지는 1956-57 시즌 풋볼 리그 3부 우승, 1960-61 시즌 풋볼 리그 2부 우승, 1961-62 시즌 풋볼 리그 1부 우승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며 단번에 영국 최고의 감독의 자리에 올랐음은 물론  까마득한 후배 바비 롭슨과 함께 입스위치 타운의 홈구장 바깥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영광을 누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더 큰 업적을 세웠는데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서독을 연파하며 우승을 이뤄내 쥘리메컵을 차지했고 UEFA 유로 1968에서도 3위에 올랐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나쁜 대진운으로 인해 8강에서 물러났음에도 펠레의 브라질 및 베켄바우어의 서독과 명경기를 펼쳤다. 이런 알프 램지의 업적을 인정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2002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 중 하나로 그의 이름을 헌액했다.



44위 카를 라판

 


생년월일: 1905년 9월 26일
국적: 오스트리아
주 소속팀: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빗장의 원조'

카테나치오의 원류로 평가받는 '베로우 시스템'의 창시자로 두 명의 풀백 중 한 명을 최후방에 두고 윙 하프를 오늘날의 사이드백 자리에 내려 수비하는 방식의 플레이를 취했고 두 윙 하프가 내려가면서 생긴 중앙의 공백을 메토도 시스템과 유사하게 인사이드 포워드들을 유동적으로 내려서 볼을 받게 하면서 보완했다. 축구 내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전술에 대한 기만술에도 능했는데 라판은 불어를 잘했음에도 기자들의 특정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고 심지어는 경기 전에 팀 라인업을 발표하지 않거나 잘못된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베로우 시스템을 바탕으로 아마추어 클럽인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감독으로 부임해 프로들과의 경쟁에서 정규리그 5회 우승 및 컵대회 7회 우승을 이뤄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세르베트의 감독을 맡아 정규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말년인 1964-65 시즌에는 로잔 스포르의 우승을 이뤄냈다. 스위스 대표팀 감독도 종종 맡았는데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임시로 대표팀을 맡아 헤어베어거 체제의 독일을 이기고 8강에 진출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감독직을 수행하며 이탈리아를 4-1로 꺾고 8강에 진출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8강전에서는 3-0으로 앞섰다가 5-7로 역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대 유럽 축구계의 지장으로 불리던 라판은 매니저로서는 지나친 음주나 흡연 정도를 제외하면 선수들의 사생활을 거의 터치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으나 전술적인 부분에서 복종하지 않는 선수들을 자르는 부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전성기 시절에는 선수들의 작은 불만에도 귀를 기울이는 열린 감독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든 뒤에는 선수들의 불만을 일축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고 한다.



43위 빅토르 마슬로프

 


생년월일: 1910년 4월 27일
국적: 러시아
주 소속팀: 디나모 키이우

'압박 축구의 원류'

선수의 개인 능력이 중시되던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집단주의 축구', '조직력 축구'라 불리는 조직적인 단위의 압박 시스템을 재창한 혁명가로 4-2-4를 수비적으로 재해석한 4-4-2 포메이션을 창시했으며 상대 공격수를 홀로 수비하기보다는 팀 전체가 하나가 되어 지역 단위의 일대 다수의 수비를 지시했는데 그가 제시했던 수비방식이 브라질의 초기 존 디펜스와 함께 지역방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상술한 조직적인 축구를 바탕으로 토르페토 모스크바와 디나모 키이우에서 전성기를 누린 마슬로프는 토르페도 모스크바에서 1960년 소련 탑 리그 우승과 소비에트 컵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디나모 키이우 감독으로도 정규리그와 소비에드 컵에서 각각 3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소련 축구계에서는 변방으로 취급되던 아르메니아 지역의 아라라트 예레반의 감독을 맡아서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1975년 소비에트 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가 제창한 집단주의 축구는 존 디펜스와 압박 시스템의 원류로 평가받는데 자신이 중용하지 않았던 제가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는 아이러니하게도 지도자 시절에는 마슬로프에게 큰 영감을 받아 압박을 위한 선행 작업으로 과학 축구를 도입했고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토미슬라브 이비치와 같은 감독들이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42위 호세 비야롱아

 


생년월일: 1919년 12월 12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마드리드 시장님'

마드리드 연고의 두 팀과 마드리드를 수도로 삼은 스페인 대표팀에서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던 지도자로 다뉴브 학파의 적통으로 불리는 구스타브 세베슈의 매직 마자르가 보여준 소셜리스트 풋볼을 동경했으며 전방 다섯 명의 공격진에게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지시했다.

상술한 내용대로 소셜리스트 풋볼의 스위칭 전술을 적극 활용한 비야롱아는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공격진을 구성하며 1954-55 시즌 라리가와 라틴컵에서 우승하며 더블 크라운을 기록했고 1955-56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며 최초의 유러피언 컵 우승 감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음은 물론 1956-57 시즌에는 라리가와 유러피언 컵, 그리고 라틴컵을 우승하며 3관왕을 이뤄내는 등 저승사자 군단의 대약진의 기틀을 완벽하게 세웠지만 마드리드에서 자신의 목표를 모두 이루자 팀을 떠났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도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해 코파 델 레이 2연패 및 1960-61 시즌 라리가 준우승과 1961-62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내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명성에 비해 성공을 이뤄내지 못한 스페인 대표팀을 맡았는데 나이가 많은 외국인 귀화선수들을 대거 제외하고 젊은 스페인 출신 선수들로 팀을 꾸려 UEFA 유로 본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UEFA 유로 1964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디펜딩 챔피언 소련을 격파하고 앙리 들로네를 차지하며 마드리드 시장이라는 별명값을 확실하게 했다.



41위 카를로스 비안키

 


생년월일: 1949년 4월 26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남미 클럽축구의 마지막 자존심'

남미 클럽축구계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던 시기에 유럽 챔피언들을 연달아 격파하던 남미 클럽 축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4-3-1-2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하며 공격형 미드필더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주목받았으며 용병술과 통솔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스타드 드 랭스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랭스와 니스 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으나 벨레스 사르스필드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낸 것을 시작으로 1994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텔레 산타나의 상 파울루를 승부차기 끝에 꺾어 대회 3연패를 저지했고 코파 인터아메리카나에서는 북중미 챔피언인 코스타리카의 CS 카르타히네스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무실점으로 우승했다.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를 4-0으로 대파한 AC 밀란을 2-0으로 꺾고 국제대회 3관왕으로 마무리했다.

AS 로마의 지휘봉을 잠시 잡았으나 보카 주니어스로 돌아온 비앙키는 보카 주니어스의 대약진을 이끌며 정규리그 4회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000년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잡았고 2003년에는 AC 밀란을 잡아 두 번이나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비앙키 개인도 IFFHS 세계 최우수 클럽 감독 2회 수상 및 남미 올해의 감독상 5회 수상이라는 업적을 이뤄냈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60위~5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40위~31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