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축구 과학자가 축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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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축구 과학자가 축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일까?

토르난테 2020. 10. 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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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과학

 

현대 축구에서는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팀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한 팀 운영 방식이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상대 팀 분석과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위한 식단과 훈련 프로그램 개발 같은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며 선수들의 몸상태를 최상으로 만드려고 노력한다.

바이에른의 관리 시스템은 마른 체구의 고레츠카를 근육질의 체형으로 벌크업에 성공시켰다.


오늘날에는 당연한 업무지만 1970년대만 해도 축구 클럽은 이러한 업무들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 감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감독의 이름은 소련 태생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이며 '축구는 개인이 아닌 팀원 간의 유대에 기인한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실현시키는 방식으로 단순히 1대 1 경합에서 승리하는 방식이 아닌 팀 단위의 전방위적인 압박을 생각했다.

하지만 팀원들이 전방위적인 압박을 하려면 우월한 체력은 필수였으며 이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스포츠 과학이었다.

물론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는 과거에 훌륭한 축구선수였지만 스포츠 과학에 있어서는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식은 빌릴 수 있는 영역이었다.

 

훌륭한 참모진과 함께 한 위대한 계획

 

삼국지를 읽어보면 가장 성공한 군벌인 유비, 조조, 손권은 결국 각 분야의 참모진을 굉장히 잘 활용한 인물로 묘사된다.

조조는 훌륭한 인맥과 탁월한 대전략 안을 제시한 예주 지역의 명사 순욱을 참모장으로 삼아서 뛰어난 기획력으로 군사 작전 입안을 담당한 순유, 훌륭한 임기응변 능력으로 조조의 측근에서 모략을 짜는 술사인 정욱과 곽가,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내실을 다지는 행정관으로 진군 같은 인재들을 중용하여 자신보다 강대한 세력인 원술, 원소 등을 누르고 천하의 패자로 자리 잡는다.

유비도 마찬가지로 탁월한 대전략 안과 효율적인 정책 입안이 가능한 제갈량을 참모장으로 삼고 작전 입안은 성실하고 치밀한 황권을,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계략을 잘 꾸미는 술사로는 방통과 법정을 중용했으며 일명 간손미라 불리는 간옹, 손건, 미축을 각각 분위기 메이커, 외교관, 재정 담당관으로 기용하며 조조에 대항할 세력으로 급부상했으며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외칠 수 있는 유파는 청요직으로 중용하며 정치적인 균형도 맞췄으며 손권도 이와 유사했다.

유비의 삼고초려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도 이러한 참모진의 도움을 받았다. 바로 우크라이나의 과학자 아나톨리 젤렌초프였다. 그는 축구 과학을 기획한 로바노프스키의 발상을 현실로 마련하는데 도움을 줬으며 이는 자신을 대표하는 철학인 압박을 위한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로바노프스키의 팀에는 통계학자와 물리학자를 코치로 두었으며 이들의 지식은 로바노프스키의 전술의 핵심인 압박을 위한 체력 유지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며 이때 로바노프스키의 디나모 키예프와 소련 대표팀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시스템이었다.

로바노프스키와 그의 참모진

로바노프스키와 그의 참모들은 자신의 저서 [The Methodological Basis of the Development of Training Models]에서 자신들의 이상적인 축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로 자신의 철학에 의한 선수들의 기술 재정비를 요구했다.

로바노프스키의 축구 철학인 압박 시스템에 맞춰서 선수들의 몸상태와 기술을 훈련했다. 다만 압박은 선수들이 한 공간에 집중되기 때문에 공간이 생기고, 상대 팀에게 역습을 허용할 수 있다는 위험 요소가 존재했다. 이를 위해 로바노브스키는 볼을 소유한 상태에서는 상대의 수비가 어렵게 경기장을 넓게 사용했으며 볼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압박 도중 역습으로 인해 실점할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경기장을 좁게 쓰게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로 상대의 전술적 대응에 의한 아군의 전술적 대응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로바노프스키는 이를 위해 상대팀을 철저하게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분석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응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주문했으며 가능하면 모두가 만능 플레이어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단순하게 기계적인 플레이를 구사하기보다는 임기응변식의 경기를 하길 원했고 항상 우위를 점하는 축구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까지 가장 효율적인 체력 상태 유지다.

체력은 로바노브스키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에 압박의 강도 조절에 상당히 신경을 썼으며 특히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뒤에는 최상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업 선수들을 출전시키며 로테이션을 활용하기도 했으며 무승부를 노리고 내려앉다가 패배하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로바노프스키의 축구의 목적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로테이션을 하며 후보들의 실전 감각도 기르고 주전들의 체력 안배를 하며 다른 대회의 우승도 노릴 수 있게 만들었다.

 

로바노프스키 체제의 디나모 키예프와 소련

 

로바노프스키의 디나모 키예프는 1974-75 시즌 컵 위너스 컵을 우승하고 유러피언 컵 우승팀이자 베켄바우어와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가 버틴 서독의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슈퍼 컵에서 이기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인다.

베켄바우어는 전방위적인 압박에 고전했으며 베켄바우어가 오버래핑한 자리를 슈바츠첸벡이 커버하기에는 디나모 키예프의 넓은 경기장 운용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올레그 블로힌은 베켄바우어와 크루이프를 모조리 제치고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디나모 키예프 vs 셍테티엔의 유러피언 컵 경기 전술 분석도



1975년과 76년에는 소련 대표팀의 감독을 겸직하기도 한 로바노프스키는 이후 소련 감독을 사임하고 다시 키예프에 전념했다가 사임하고 소련을 맡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1984년에 디나모 키예프 감독으로 복귀했으며 이후 1986년부터는 소련 대표팀 감독과 디나모 키예프 감독을 겸직했다.

1986 시즌 디나모 키예프 멤버 (1985-86 컵 위너스 컵 우승멤버)


1985-86 시즌에 컵 위너스 컵을 우승했을 때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4-1-3-2 시스템을 극대화했는데 리베로 발타차가 후방에 배치되며 스토퍼 쿠즈네초프와 양 사이드 백인 베소노프와 데미야넨코를 로바노프스키의 시스템에 따라 지휘했으며 양 윙백이 오버래핑을 할 때는 수비형 미드필더 야코벤코가 내려오며 3백을 형성하기도 했으며 양 측면 미드필더들이 후방으로 내려와 커버하기도 했다.

양 측면 미드필더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공격 시에는 경기장을 넓히며 윙어처럼 움직이거나 사이드 백이 전진할 때는 중앙을 커버하는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며 수비 시에는 이들이 경기장을 좁히며 자바로프와 야코벤코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격진은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보다는 다재다능한 블로힌과 벨라노프 투 톱을 선호했으며 자바로프가 중앙으로 전진해 이들과 협력해 스위칭 플레이를 펼쳤다.

이 팀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가 가능한 원동력인 선수들의 멀티 포지션이 강점이었다.

로바노프스키의 페르소나 올레그 블로힌

 

베소노프와 데미야넨코는 각각 측면 수비수는 물론이고 측면 윙어도 소화할 수 있었으며 수비형 미드필더인 야코벤코는 유사시에는 중앙 수비수를 맡을 수 있었으며 양 측면 미드필더인 라트는 레프트 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야렘추크는 중앙 미드필더와 라이트 백을 볼 수 있었다. 자바로프와 블로힌, 벨라노프도 상황에 따라 공격진 어디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이런 디나모 키예프의 활약으로 소련 리그는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로바노프스키의 견해를 따르는 자와 그의 견해를 반대하는 자들의 사상적 대립이 일어난다.

특히 디나모 키예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콘스탄틴 베스코프는 로바노프스키의 시스템 축구에 반대하며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창의적인 자유를 부여해 선수들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길 원했으며 실질적으로 1979년과 1987년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 사상으로 라이벌리를 구축했던 로바노프스키와 베스코프

이들의 라이벌리는 소련 탑 리그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의 충돌로 발전한 소련 탑 리그의 팀들은 유럽 리그에서도 경쟁력을 갖춰 1983년에 12위에 불과했던 UEFA 리그 계수를 디나모 키예프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두 팀의 힘으로 1986년에는 3대 리그 진입에 성공했고 1987년과 1988년에는 무려 분데스리가를 제치고 2위 리그로 명성을 높였다.

그리고 1986년에 로바노프스키의 소련 감독 겸직 이후에는 디나모 키예프의 멤버 거의 대다수의 멤버가 소련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라이벌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전설적인 골키퍼 리나트 다사예프와 리베로 비기즈 히디야툴린을 제외하면 키예프 선수들이 중용되었다.

20명의 명단 중 무려 11명이나 대표팀에 콜업했으며 절반 이상이 주전 선수들이었다.


훌륭한 조직력과 강한 압박을 앞세워서 유로 88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으나 토털 풋볼을 진화시킨 미헬스와 오렌지 삼총사에게 2-0으로 아쉽게 패했다.

그는 1990년까지 디나모 키예프에서만 8번의 소련 탑 리그 우승과 6번의 소비에트 컵 우승, 그리고 두 번의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과 한 번의 UEFA 슈퍼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세 번의 소련 슈퍼 컵 우승도 이뤄내며 18개의 우승컵을 획득했다.

 

로바노프스키가 남긴 것.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동유럽에 일대 혼란이 오면서 그의 팀은 무너졌다. 그리고 로바노프스키는 중동으로 몸을 피해 UAE 대표팀과 쿠웨이트 대표팀을 맡다가 1997년에 조국 우크라이나로 돌아와서 다시 디나모 키예프를 맡았다.

그는 셰브첸코와 레브로프 투 톱을 완성시키며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거꾸러트렸으며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탈락했지만 선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레브로프와 셰브첸코의 영혼의 투 톱은 로바노프스키의 유작이 되었다.

 

하지만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2002년 5월 7일, 메탈부르크 자포리지아와의 경기가 끝나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어 뇌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오랜 감독 생활 동안 쉬지 않고 일한 탓에 생긴 합병증으로 5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우크라이나에서는 샤흐타르가 새롭게 부상하며 브라질 선수들을 부르며 디나모 키예프를 밀어내고 우크라이나의 패자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디나모 키예프에는 크고 작은 공식대회에서 32개의 우승컵을 선물했으며 디나모 키예프에는 그를 기려 경기장 이름을 딴 로바노프스키 디나모 스타디움으로 개장했다.

로바노프스키 디나모 스타디움

 

소련 시절을 포함해서는 우크라이나에는 세 명의 발롱도르 위너를 배출하는데 블로힌과 벨라노프는 아예 수상하던 해의 소속팀이 디나모 키예프이며 셰브첸코도 밀란에서 수상받았지만 그를 월드클래스의 스트라이커의 반열로 올려준 은사는 로바노프스키이다.

세계 축구계에는 선진적인 축구 과학으로 서방세계에 많은 것을 남겼으며 그저 전술과 선발 명단만 짜고 훈련 지휘만 하던 감독의 영향력을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까지 확대했으며 그저 군기반장이나 감독의 제자에 불과했던 코치를 참모와 같은 역할로 진화시키며 감독을 헤드 코치에서 매니저로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로바노프스키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관리자형 감독이 프리미어리그에 자리잡았으며 퍼거슨, 뱅거, 무리뉴, 클롭, 펩과 같은 관리자형 감독들의 원조격이 되는 인물이 된다. 특히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부임해서 1군 선수들 중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을 추방했으며 뱅거는 아스널에 부임해서는 식단부터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로바노프스키는 이런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UEFA는 이런 그의 공로를 잊지 않았으며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장 10인 중 한 명으로 축구 과학자(the soccer scientist)라는 평가를 남겼다. 참고로 선정된 10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빅 이어가 없는 감독임을 감안하면 그가 끼친 영향력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초월하는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 박수용의 토르난테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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