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세계 최강의 축구 구단이었던 어떤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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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세계 최강의 축구 구단이었던 어떤 구단

토르난테 2020. 9. 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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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명언은 1974 월드컵에서 베켄바우어의 서독이 우승을 한 뒤에도 기자들이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계속 비교를 하자 날려준 일침이자 명언이었다.

 

이 유명한 명언의 주인공 프란츠 베켄바우어

 

결국 인기있는 팀이야 선호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해에 가장 강한 팀은 대륙 컵과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팀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가장 강한 팀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던 바이에른 뮌헨이다. 그리고 이전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AC 밀란과 같은 이런 가장 강한 팀들은 있었다.

그럼 196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은 어디일까? 유럽 중심의 세계관에 갇힌 사람들은 레알 마드리드, 인터 밀란, 벤피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정도를 꼽을 것이고 축구를 넓게 본다면 펠레의 산투스를 언급할 것이다.

 

역대 최강 팀중 하나로 꼽히는 1963년의 펠레의 산투스

 

하지만 펠레의 산투스가 1960년대에 두 번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우승한 반면에 이 팀은 무려 세 번이나 우승했으며 남미 대표로 나간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도 세 번 중 두 번이나 우승했다.

이 팀은 어디일까? 바로 지금은 몰락한 리그이지만 당대에는 강력한 축구 리그를 가지고 있었던 우루과이 리그를 대표하는 팀 페냐롤이다.

 

구성원들의 탄탄한 기본기와 훌륭한 축구 지능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팀

 

페냐롤의 특징은 브라질 대표팀이나 인터 밀란만큼 전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축구의 기본에 굉장히 충실했으며 선수 대부분이 훌륭한 기본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축구 지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많았다.

센터 하프 출신으로 리베로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모두 능숙하게 보는 곤칼베스나 양쪽 윙과 스트라이커를 모두 잘 보는 사시아 같은 선수들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1960년대 페냐롤의 심장 곤칼베스

그리고 이런 선수들이 있어서 대세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강세에 보이는 포지션을 잘 활용하는 팀이었다.

페냐롤은 1960년에 파라과이의 올림피아를 꺾고 처음 남미 챔피언이 되었으나 유럽 챔피언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선 비기고 원정에선 5-1로 패한다.

그래서 노장인 호베그와 보르게스를 밀어내고 페루의 용병인 호야와 쿠비야의 백업 윙어 사시아를 주전으로 올렸으며 사시아를 최전방 공격수로 기용하고 좌측 윙어에는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드리블 능력을 가진 호야를 기용한다.

 

1961년의 페냐롤로 좌측에는 약팀을 상대할 때의 전형, 우측에는 강팀을 상대할 때의 전형이다.

 

페냐롤은 다재다능한 센터 하프 곤칼베스를 축으로 한 하프백들의 배치에 따라 전술이 갈렸는데 약팀을 상대로는 곤칼베스에게 중원을 전담하고 양 하프백을 윙백처럼 기용하며 공격에 가담해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여줬고 강팀을 상대할 때는 곤칼베스와 양 하프들을 후방으로 내려 중앙 수비에 집중했으며 곤칼베스는 이 때도 리베로의 역할을 맡아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공격 작업은 곤칼베스의 패스를 오늘날의 중앙 미드필더의 위치에서 받은 리나짜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리나짜가 양 윙에게 벌려주거나 내려오는 사시아에게 패스하며 사시아와 양 윙어가 만든 공간을 인사이드 포워드 자리에 있는 스펜서가 빈 공간을 침투하여 득점하는 형태와 양 측면에서 크로스를 스펜서가 헤딩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961년 페냐롤의 스타팅 멤버들

 

이렇게 변화를 꾀한 로베르토 스카로네 체제의 페냐롤은 13승 4무 1패로 우루과이 리그 4연패에 성공했으며 결승전에서는 자우마 산투스-줄리뉴라는 강력한 오른쪽 라인을 가졌으며 1961년의 브라질 챔피언 파우메리아스를 홈에서는 1-0으로 이기고 원정에서는 1-1로 비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구트만 벨라가 지휘하고 에우제비우와 아우가스가 선봉에 선 유럽 챔피언 벤피카에게 유럽 원정에서 1-0으로 졌지만 홈에서 사시아의 선제골과 스펜서, 호야의 멀티골로 5-0으로 대파했으며 최종 결승전에서도 사시아의 멀티골로 벤피카를 이기며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1961년 한 해의 세계 최강자는 페냐롤이었다.

 

와신상담 이후 다시 세계 챔피언에 오르다.

 

1962년에 페냐롤은 스카로네 감독이 우루과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가며 벤피카에서 보드진과의 갈등으로 사임한 구트만 벨라를 새 사령탑으로 영입한다.

구트만 체제에서도 리그에서도 우승해 리그 5연패를 달성하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1962년에 펠레가 이끄는 산투스가 대두했으며 이들이 결승에 진출한다. 페냐롤도 우루과이 국내의 라이벌 클루브 나시오날을 제치고 결승에 갔다.

산투스와 페냐롤은 당대 최강의 팀이었으며 페냐롤의 홈에서는 산투스가 2-1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산투스의 홈에서는 페냐롤이 3-2로 승리를 거둔다. 중립 지역인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3차전에서 페냐롤은 베테랑 윌리엄 마르티네스의 대체자 오마르 카스타노의 자책골로 사기가 떨어졌으며 펠레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3-0으로 패한다.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 펠레에게는 당대 최강의 팀들도 무릎을 꿇었었다.


이 충격적인 패배로 구트만 감독은 사임했으며 페냐롤은 구단의 전설적인 골키퍼이자 우루과이에게 월드컵 우승을 선물한 로케 마스폴리를 감독으로 임명한다.

마스폴리 체제에서 3년간 와신상담을 거친 이후 페냐롤은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했으며 세계 축구의 흐름이 포 백 시스템으로 흐르자 마스폴리 감독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마스폴리가 현역으로 뛰며 우승한 우루과이 대표팀은 2-3-5 시스템이지만 리베로를 활용한 4-3-3과 유사했던 칼 라판의 볼트 체인지에 강력한 공격력을 얹히는 작업을 시작한다.

 

1966년의 페냐롤의 기본 대형

 

파라과이 출신의 용병이자 빌드업에 능한 레즈카노를 리베로의 역할을 맡기고 수비라인 지휘와 지원을 맡겼으며 나머지 세 명의 수비수는 대인 방어에 집중했다.

그리고 곤칼베스는 중원에서 피보테 역할을 맡아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를 했으며 이를 도와주는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코르테스였다. 코르테스는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윙어들이나 로차에게 볼을 운반했으며 로차의 패스나 윙어들의 크로스를 에콰도르인 공격수 스펜서가 마무리지으며 득점했다.

그리고 골키퍼도 세대교체를 이뤘는데 야신이 남미의 야신이라 인정한 마주르키에비치였다. 이 골키퍼는 펠레를 고전시킨 골키퍼로도 유명하지만 훗날에는 펠레에게 농락을 당하기도 했다.

1965년에 리그 우승을 달성해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나섰다. 그러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살인적인 일정으로 바뀌며 16경기나 치뤘기 때문에 자국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리버 플레이트를 꺾고 우승했는데 코르테스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공간을 만들고 디아스는 미드필더 지역까지 전진해 상대를 괴롭혔으며 우루과이의 공격은 로차가 주도했으며 스펜서는 득점에 집중했다.

 

1966 코파 리베라도레스 경기, 출처: https://www.imortaisdofutebol.com/

 

리버 플레이트도 오네가가 펄스 나인으로 활약해 수비를 유인하며 윙어인 쿠비야와 마스가 중앙으로 침투하며 페냐롤의 골문을 노렸으며 아마데오 카리조가 적극적으로 빌드업에 나섰지만 홈에서는 페냐롤이 2-0으로 이겼고 원정에서는 리베르 플라테가 3-2로 이겼지만 골 득실을 계산하지 않았던 당시의 룰로 인해 중립지에서 3차전을 치뤘다.

펄스 나인 전술과 카테나치오 전술의 장군멍군으로 정규 시간 90분 동안에 2-2로 끝이 나며 연장전을 치뤘으며 연장전에 스펜서와 로차의 연속 골로 페냐롤이 4-2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에 환호하는 마스폴리 감독과 페냐롤 선수들

 

그리고 연말에는 인터콘티넨탈컵에서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2-0으로 이기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계 최고의 팀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유럽 원정에서 남미 팀이 이기기에는 체력적인 부담도 상당했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스펜서는 첫 경기 홈에서 멀티골을 비롯해 원정에서도 득점하며 이 대회 우승에 크게 공헌한다.

스펜서는 이 시기의 활약으로 아직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대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60년대 페냐롤이 이룬 업적은 리그 7회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과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이 정도면 1960년대를 대표하는 팀이라고 불릴만하지 않는가?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리그는 발전하는데 비해 우루과이 리그는 적은 인구수의 한계로 인재풀이 줄어들면서 1970년대에는 리그 자체가 쇠퇴하며 페냐롤도 피게로아라는 용병이 있음에도 1960년대만큼의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대 다시 남미 무대에서 경쟁력을 회복하지만 이미 남미 무대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은 유럽으로 진출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남미 무대 자체의 경쟁력이 유럽 무대에게 밀리는 시기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우루과이 리그는 시장성의 한계로 쇠퇴하고 지금은 남미에서도 잊힌 리그가 되었으며 우루과이 국가대표팀 선수들도 유럽 빅리그에서 뛰거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구단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페냐롤이 이룬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기억에는 에레라의 그란데 인테르나 버스비의 맨유, 그리고 펠레의 산투스에 밀려도 영원히 기록에는 남으며 기록에 남는 한 재평가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

출처: 트위터 Uruguay Football ENG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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