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독일 축구의 혼이였던 3-5-2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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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독일 축구의 혼이였던 3-5-2 시스템

토르난테 2020. 9. 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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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혼을 정립했던 선구자

 

서독의 유로와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헬무트 쇤이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부진의 책임을 지고 은퇴하자 그의 수석코치였던 유프 데어발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때의 세계 축구의 전술적인 흐름은 미헬스 시대의 토털 풋볼을 따라 하기 위해 4-3-3을 시도했으나 효율적인 점유와 공격진의 스위칭에서 한계를 느끼고 4-4-2를 구사하며 중원을 틀어막아 압박에 최적화된 축구를 했으며 이탈리아 팀들은 카테나치오와 토털 풋볼의 방식을 혼합한 변형 4-4-2 시스템인 조나 미스타를 사용하고 있었다.

데어발은 스리 톱을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네 명의 수비수가 효율적이지만 투 톱을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와 토리노에서 유행하는 조나 미스타에 관심을 가졌다. 조나 미스타 대형은 라이트백이 오른쪽 스토퍼로 내려가며 한 명의 리베로와 두 명의 스토퍼, 즉 세 명의 수비수가 최소한으로 대기하고 레프트백이 전진해서 오늘날의 윙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오른쪽 측면에는 윙어가 자리 잡았다.

카테나치오와 토털 풋볼의 개념을 혼용한 조나 미스타의 기본대형

이 오른쪽 윙어는 과거 그란데 인테르라 불렸던 에레라의 카테나치오 체제의 인테르에서는 라이트 윙이 토르난테라 불리며 후방으로 내려와 수비를 지원했었으며 조나 미스타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윙어가 수비진으로 귀환하면 최대 다섯 명이 수비하는 대형이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프 데어발은 최소한으로 대기하는 세 명의 수비진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의 윙백을 두고 미드필더진과 공격진을 모두 중앙에 배치했다. 투 톱을 상대하기에는 세 명의 수비수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으며 측면 수비수는 공격과 수비를 모두 겸하며 한쪽 측면을 거의 혼자서 책임지는 형태인 3-5-2 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데어발의 초기 3-5-2 시스텐의 밑그림


이 3-5-2 시스템은 미드필더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전술로 활용되었지만 데어발이 이 체제로 유로를 우승하고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달성한 이후에는 디 만샤프와 분데스리가 클럽에서는 오랜 기간 정석적인 포메이션으로 군림했다.

 

유럽을 정복하다.

 

유로 예선을 거치면서 정립된 데어발의 3-5-2 시스템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백 스리 시스템은 수비적이다라는 통념과는 다르게 초창기에는 굉장히 공격적인 시스템이었다.

스토퍼들은 기본적으로 대인 수비에 집중했으며 수비형 미드필더로 빌드업에 능했던 울리 슈틸리케를 리베로로 삼았으며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는 수비적인 스타일의 미드필더를 배치하지 않았으며 소속팀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던 베른트 슈스터와 한지 뮐러를 동시에 기용했으며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당대 최고의 공격수 칼 하인츠 루메니게를 기용했다.

유로 80 서독의 기본 대형

베른트 슈스터와 한지 뮐러는 모두 정교한 패스에 능했으며 슈스터의 경우에는 1선에 침투하여 드리블로 상대를 교란하거나 중거리 슈팅으로 직접 타격하는 플레이에도 굉장히 능했으며 루메니게는 전천후 공격수라 불리며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덕목은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미드필더 조합은 화려하지만 헌신적이며 수비 가담에 적극적인 미드필더가 없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기 쉬운데 이들과 수비의 가교 역할을 리베로인 슈틸리케가 전진하며 오늘날의 라볼피아나 시스템과 유사하게 수비형 미드필더 지역과 최후방 지역을 왕복하며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다.

슈틸리케는 데어발의 서독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양 측면에는 칼츠와 브리겔이 대기햇으며 이들은 모두 빠른 주력을 이용한 공격과 수비 가담 능력, 그리고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를 수비하는 능력을 모두 겸비한 당대 최고의 사이드백이었다.

만프레트 칼츠는 역대 최고의 오른발 크로서로 손꼽히며 정교한 크로스로 스트라이커 흐루베쉬를 지원했다. 이는 흐루베쉬와 칼츠의 소속팀 함부르크에서도 주 공격 루트로 사용되었던 전술이다. 브리겔은 철인 3종 경기 출신으로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뛰어나니며 끊임없이 중거리 슈팅을 날리며 공격의 활로를 열어 중전차라고 불렸다.

유로 80을 우승한 흐루베쉬와 칼츠, 흐루베쉬의 헤딩과 칼츠의 크로스는 당대 함부르크와 서독의 최고의 공격 루트였다.

공격진은 보통은 루메니게가 트레콰르티스타의 지역에 자리잡고 왼쪽에는 알로프스, 오른쪽에는 흐루베쉬가 자리 잡으나 측면 수비수들이 수비 가담을 하러 내려가면 장신의 타겟 스트라이커 흐루베쉬가 중앙에 머물고 루메니게는 우측, 알로프스는 좌측을 커버한다. 그리고 윙백들이 오버래핑하면 중앙으로 침투해 중앙 수비진을 교란한다.

슈틸리케가 전진하고 풀백이 내려온 상황에서의 대형으로만 보면 펩 체제에서의 바르셀로나와 유사한 대형을 갖춘 모습을 보여줬다. 즉 백 스리와 백 포를 자유자재로 바꿨다.

슈틸리케의 전진과 풀백의 후진 시 대형

이런 압도적인 점유율과 화려한 공격 축구로 서독은 네덜란드를 알로프스의 해트트릭으로 3-2로 이겼으며 비록 그리스와 비겼지만 2승 1무로 조 1위로 결승에 진출했으며 결승에서도 돌풍의 팀 벨기에를 상대로 시종일관 압도하며 흐루베쉬의 헤딩 두 방으로 2-1로 승리하며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유프 데어발과 서독 대표팀은 이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성공인 월드컵 우승을 위해 3-5-2 시스템을 개량하기 시작한다.

 

세계 정복을 위하여!

 

데어발은 헬무트 쇤의 휘하에서 서독 대표팀을 코치하던 시절, 쇤이 유로와 월드컵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준비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럽 내에서는 독일 대표팀은 기술적으로도 훌륭한 축구를 구사했기에 압도적인 점유와 공격 축구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로 72 예선에서 탈락했던 네덜란드, 그리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모두 출전한 1974 서독 월드컵은 달랐다. 이들은 독일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그렇기에 쇤은 유로 72에서 보여준 전술들을 포기하고 한층 더 수비적인 전술과 그들보다 강력한 피지컬을 활용하며 우승할 수 있었다.

4.1974 서독 월드컵은 실리 축구의 승리였다.

데어발은 이때 코치로서 쇤에게 배운 대로 1982 스페인 월드컵은 다르게 준비했다. 남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브라질, 디펜딩 챔피언이며 당시 남미 최고의 스타 마라도나가 합류하는 아르헨티나가 출전했으며 유로 예선에선 탈락했었지만 플라티니를 중심으로 화려한 공격 축구를 선보이던 프랑스도 예선에서 통과했다.

데어발은 이들을 상대로 유로에서 보여줬던 기술 축구로는 승산이 적다고 판단했으며 좀 더 수비적인 선수 조합과 대형을 갖춘다.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서독의 기본 대형

상대적으로 수비적인 공헌도가 떨어지는 슈스터와 한지 뮐러를 배제했으며 레프트 백 시절에 1974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상대적으로 수비적인 면모를 겸비한 중앙 미드필더 브라이트너를 중용했으며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유사시에는 수비수로 기용할 수 있었던 바이에른 뮌헨의 살림꾼 볼프강 드렘러를 브라이트너의 보디가드로 삼았다.

신예 윙어이자 공격형 미드필더인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를 트레콰르티스타 지점에 배치했으며 루메니게는 전진시켜 흐루베쉬 또는 피셔와 공격진을 구성하게 했다. 양 측면 수비수의 활용은 이전 유로 80과 동일했다. 이 과정에서 슈스터는 데어 발과 브라이트너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영원히 하차한다.

서독은 예선을 무난히 통과했지만 본선 첫 경기에서 알제리에게 패하는 이변을 맞이한다. 전술적인 문제보다는 선수들의 안일함을 통솔하지 못한 데어발의 실책이었지만 언론에서는 슈스터를 제외한 것까지 싸잡아서 비난당하기도 했다.

칠레와의 경기에서는 4-1로 화끈하게 이기며 명예회복을 하나 싶었지만 알제리의 조별 리그 일정이 끝난 시점에서 서독이 1-0으로 이기면 알제리를 따돌리고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본선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온다. 이에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선수들은 서독의 선제골 이후에 함께 볼을 돌리며 같이 2차 리그에 진출했으며 이는 전 세계인의 비난을 받으며 "히혼의 수치"라고 불렸고 이 대회 이후로 조별 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같은 시간에 치러지는 것으로 룰까지 바뀌는 상황이 일어났다.

서독 대표팀은 히혼의 수치로 인해 탈락해 분노한 알제리 관중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서독은 2차 리그에서는 정신을 차렸으며 첫 경기 잉글랜드전에서는 피터 쉴튼의 선방에 가로막혀 0-0으로 비겼다. 서독은 리트바르스키와 피셔의 활약으로 개최국 스페인을 2-1로 제압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서로 부진하며 무승부를 기록했고 서독은 조 1위를 달성하며 잉글랜드와 스페인을 따돌리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서독은 플라티니를 위시해 마법의 사각편대를 보유한 프랑스와의 연장전에서 3-3으로 끝냈으며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다만 이때도 슈마허와 바티스통에 관해서 오심 논란이 있었다.

결승전에서 데어발은 조나 미스타를 앞세우며 견고한 수비력을 보여준 이탈리아와 만난다.

1982 월드컵 결승전, 서독과 이탈리아의 라인업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대인 수비의 절정을 보여준다.

서독은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뚫기 위해 이전보다 더 공격적인 3-4-3 시스템을 채용했으며 이탈리아는 반대로 조나 미스타 대형보다도 더 수비적이며 트레콰르티스타를 생략한 3-4-3 대형으로 맞섰다. 같은 3-4-3이지만 이탈리아 측은 사이드 백을 더 수비적으로 내렸고 서독 측은 더 공격적으로 올렸다.

이탈리아는 대인 수비 시스템으로 재미를 봤는데 베르고미는 리트바르스키를, 오리알리는 브라이트너를, 젠틸레는 루메니게를, 콜로바티는 피셔를 대인 마킹으로 저지했으며 카브리니와 타르델리를 활용한 이탈리아의 역습과 파울로 로시의 골 결정력은 날카로웠으며 결국 3-0까지 만들었으며 서독이 만회골을 넣었으나 3-1로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서독은 호어스트 흐루베쉬와 한지 뮐러를 투입하며 공세를 강화했으나 이탈리아의 견고한 수비앞에서는 무력했다.

이후 데어발은 유로 84까지 활약했으나 좋은 경기력에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불운으로 사임하고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팀을 물려받아 3-5-2 시스템을 강화한다.

3-5-2 시스템은 이후에도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메인 전술이자 혼으로 남았다.

데어발의 후임 감독인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베르디 포그츠는 이 전술로 각각 월드컵과 유로를 제패했으며 오트마어 히츠펠트, 오토 레하겔 등 독일 출신의 명장들은 이 포지션으로 분데스리가를 제패했으며 특히 히츠펠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온고지신 (溫故知新)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영원할 것 같았던 3-5-2 시스템도 1990년대를 기점으로 몰락의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1990 월드컵에서 수비 축구가 판을 치자 "공격수가 볼과 최종 두 번째 상대편보다 상대편의 골라인에 더 가까이 있을 때 ‘선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다’고 한다."라며 동일선상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오프사이드 적용 대상을 이득을 취하려는 공격수에서 이득을 취하는 공격자로 줄였으며 이에 대부분의 축구팀들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주 전술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세 명의 수비수와 두 명의 윙백이 있으며 최후방에 리베로가 대기하는 백 스리 시스템보다 네 명의 수비수만 있는 백 포 시스템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하기 쉬운 상황이라 백 스리 시스템이 빠르게 몰락했다. 물론 유로 96의 서독과 1996-97 시즌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3-5-2 시스템을 사용하면서도 오프사이드 트랩을 잘만 했지만 이는 불세출의 천재 마티아스 잠머의 수비 지휘 능력 덕분이며 다른 팀들은 이를 사용하지 못해 결국 잠머의 은퇴와 함께 백 스리의 오프사이드 트랩은 사라졌다.

축구 역사상 불후의 천재 중 한 명인 마티아스 잠머

설상가상으로 1994 월드컵 이후 브라질처럼 양 사이드 백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4-4-2가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유행한 사키이즘과 융화되며 각 측면에 한 명으로는 측면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크루이프즘이라며 유행한 4-3-3 전략이 재유행함에 따라 3 톱에 취약한 전통적인 3-5-2는 몰락하게 되었으며 2002 한일 월드컵 이후에는 독일도 백 포 시스템을 채택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은 게겐 프레싱을 앞세워 4-2-3-1 시스템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이에 힘입어 독일 국가대표팀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3-5-2는 독일인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진다.

하지만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은퇴하고 마리오 고메스가 기량이 떨어진 이후에 4-2-3-1의 원 톱의 역할을 수행할 공격수가 독일에 부족해지게 되었고 요하임 뢰브는 우격다짐으로 약한 몸싸움 능력으로 인해 원 톱에는 부족한 베르너를 활용했다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조 꼴찌로 탈락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첫 네이션스컵에서도 꼴찌로 탈락한다.

이에 뢰브는 원 톱 체제를 버리고 찾은 것이 이탈리아에 잔존했던 3-5-2 시스템이었다. 마침 호펜하임 시절에 율리안 나겔스만도 3-5-2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3-1-4-2 시스템으로 돌풍을 이르킨 전력도 있었다.

뢰브는 3-5-2 시스템에 기동력을 베이스로 잡는 전술을 활용했다. 공격수가 없기에 윙어였던 그냐브리와 자네를 공격수로 삼아 그들의 장기인 기동력을 앞세운 플레이를 했으며 수비 가담 능력이 뛰어난 고레츠카를 변형 공격형 미드필더로 삼는 변칙적인 3-5-2 시스템을 보여줬으며 이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상승세를 타던 네덜란드 대표팀을 유로 예선에서 3-2로 격파했다.

이후에도 뢰브는 이 시스템을 활용했으며 사네가 부상당했을 때에도 다른 윙어들을 활용했다. 아마도 돌아오는 유로 2021에서 독일의 혼이었던 3-5-2의 부활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술은 돌고 돈다. 훌륭한 감독이 되려면 과거에 활용된 전술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전술을 보여주는 것은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았던 상황을 돌파하는 신의 한 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뢰브는 과연 온고지신에 성공하며 3-5-2 시스템을 부활시켜 새로운 돌파구를 맞이할 수 있을까?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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