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마자르가 현대 축구 팬들에게 남긴 것은?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매직 마자르가 현대 축구 팬들에게 남긴 것은?

토르난테 2020. 4. 28. 21:14
728x90
728x90

주여, 헝가리인의 화살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소서! (A sagittis Hungarorum libera nos, Domine!)

유럽 인들을 공격하는 마자르족 상상도

이 기도문은 10세기경에 서유럽 수도원들에게서 보인 기도문이다. 왜 당대에 이런 기도문이 유행했던 것일까? 

마자르 족은 주변 민족의 위협에 896년에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한 10만 가구의 마자르 인들은 산맥을 동쪽 유목민들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중부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900년경 다뉴브 강 동쪽의 영토를 접수한 마자르인들은 북으로는 발트해, 서로는 도버 해협, 남으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하였다. 

마자르 족에게 의해 황폐화된 마을

이 원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럽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여 전리품을 얻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주변국들이 감히 자신의 땅을 넘볼 엄두도 못 내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로 약화되어 있던 서유럽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마자르 족은 뛰어난 기동력과 훌륭한 기사술을 앞세워 전투 중 거짓 퇴각 후 반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으며 정면으로 돌격하는 전술에만 익숙한 게르만 기사들을 수월하게 격파하였다. 

955년 독일 국왕 오토 1세에게 레히펠트 전투에서 대패하여 서유럽 원정에 실패하며 기세가 꺾였으며 기독교 국가들의 협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라는 말처럼 가톨릭으로 귀의해 977년에 지금의 헝가리 공국이 되었다. 그리고 오토 2세는 마자르족을 무찌른 공을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축구 강국으로써의  약 천여 년 뒤에 등장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매직 마자르의 주축 멤버들 (1953)

압도적인 기량에 신출귀몰한 전략 전술이 더해져서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딱 세 번을 제외하고는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강팀이었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총전적은 62전 50승 9무 3패를 기록했으며 그나마 세 번의 패배 중 오스트리아전과 벨기에 전은 친선전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 

1950년 05월 14일, 빈에서 오스트리아에게 패배한 이후 1954년 7월 4일까지 4년 동안 32경기 연속 무패를 자랑했으며 연승 기록도 1951년 5월 27일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6-0으로 이긴 경기로부터 1953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와 비기기 전까지 13경기 연속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국가대표팀 ELO 랭킹 역대 탑 10

거기다 피파랭킹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집계하던 ELO 랭킹에서는 항상 1등을 고수했으며 특히 1954년 6월 30일에는 역대 국가대표팀 ELO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상술한 표를 보면 2014년대 바이에른 뮌헨 멤버들을 주축으로 강력한 전력을 보인 독일과 1910년대에 이미 프로리그를 활성화하며 압도적인 전력을 보였던 잉글랜드, 펠레와 가린샤가 활약하던 브라질, 유로와 월드컵을 연패하며 티키타카 전술로 세계 축구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이 모두 "매직 마자르" 또는 "골든 팀"이라 불리는 헝가리보다는 낮은 ELO High rating을 보유하고 있다. 

그 정도로 무서운 강팀이었다. 오죽하면 헝가리와 예선을 치르게 될 폴란드가 기권하여 본선 진출도 무혈입성으로 이룬 팀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1954년 7월 4일에 서독에게 패했다. 999년 전에 선조들이 독일 국왕 오토 대제에게 패한 것처럼 헤어베르거 감독과 주장 프리츠 발터에게 패했다. 

월드컵 우승으로 환호하는 서독

서독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에서 복구되지 못했으며 이에 축구 강국으로써의 지위도 잃은 지 오래된 잘 쳐줘야 중상위권 레벨의 팀이었으며 조별 예선에서도 이미 헝가리에게 3-8로 대패를 당한 팀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논란이 있는 승리였지만 서독은 당시로서는 합법적으로 헝가리를 꺾었으며 0-2로 뒤지던 경기를 3-2로 역전승한 명경기라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베켄바워나 게르트 뮐러를 위시한 서독의 40년대생의 어린이들은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고 훗날 이들이 황금세대로 등장하여 축구로 유럽과 세계를 평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베른의 기적을 보고 꿈을 키운 서독의 황금세대 멤버들인, 게르트 뮐러, 마이어, 베켄바우어

오토 대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와 독일 축구가 유럽의 중심으로 잡는 일련의 과정이 참 유사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시험의 상대로는 마자르족, 즉 헝가리가 있었다. 일명 '최종 보스' 역할을 할 정도로 헝가리는 강했으며 헝가리를 이긴 것으로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여기서 독자들은 헝가리의 저런 성적에 대한 비결이 궁금할 것이다. 이제 그 비결을 이제 설명하려고 한다.

팔진도 (八陣圖)와 소셜리스트 풋볼 (Socialist Football)

삼국지 연의에서 제갈량에 의해 육손이 갇힌 팔진도 상상도

팔진도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인 제갈공명이 고안한 진법으로 병사를 훈련시키고 행군이나 숙영을 하거나 싸움을 할 때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하여 만든 군사 배치와 작전 방안이었다. 이 진법의 특징은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을 막음으로써 쇠뇌를 쏘는 병사들의 공격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우수한 진법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기에 삼국지연의를 거쳐 변화무쌍함의 극한에 달하는 진법으로 재창조되었다. 오나라 최고의 지략가 육손도 유비를 추격하다가 이 팔진도의 변화무쌍함에 당해 고생을 하였으며 위나라가 자랑하는 사마의도 제갈량과 진법을 겨룰 때 제갈량의 팔진도를 돌파하려고 휘하에 장수들을 보냈다가 그 장수들이 팔진도의 변화무쌍함에 대처하지 못하고 사로잡히며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굴욕을 겪어 사마의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준 것으로 묘사된다.

매직 마자르를 이끈 전략가 세베스 구스타브

헝가리의 명장 세베스 구스타브의 소셜리스트 풋볼도 축구장의 팔진도와 유사한 느낌을 줬으며 공격과 수비의 대형이 상황에 맞게 수많은 대형으로 바뀌며 상대를 공략했고 상대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저 플레이의 비결은 무엇일까? 

정답을 말하기 전에 세베스 구스타브의 부임 전 헝가리 축구의 실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데아크 페렌츠는 한 시즌 리그 66골을 득점한 경험이 있다.

헝가리 국가대표팀도 다른 팀들처럼 최전방 센터 포워드 데아크 페렌츠를 주 득점원으로 삼아서 플레이했다. 중유럽 컵 1948-53 대회에서도 초기에 헝가리는 스위스를 7-4로 이기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었지만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3-2로 패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원정에서도 5-2로 패하자 헝가리 축구협회는 갈로비치 티보르 감독을 경질하고 세베스 구스타브를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세베스 구스타브는 헝가리 국가대표팀을 대대적으로 개혁한다. 

자 이제 정답을 공개하겠다. 정답은 바로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조직력을 앞세운 스위칭 플레이에 있다. 소셜리스트 풋볼이라는 명칭부터가 사회주의자 풋볼이란 뜻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축구에 담은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사회주의자였던 세베스 구스타브의 색채가 강하게 담긴 축구이다. 

매직 마자르 베스트 11



세베스 구스타브는 두 가지를 생각한다. 첫 번째는 1930년대 분더 팀의 진델라를 가짜 공격수로 기용하며 했던 스위칭 플레이에 있다. 센터 포워드인 히데구티 난도르는 원래 데아크 페렌츠에 밀려 벤치를 지키던 선수였으나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는 세베스 구스타브의 눈에 들었다. 아예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로 내린다. 그리고 인사이드 포워드인 푸스카스 페렌츠와 코치시 산도르를 오늘날의 투 톱과 유사한 스트라이커로 자리를 이동하며 최전방으로 침투한다. 

코치슈와 푸스카스

그리고 1선에 배치된 아웃사이드 포워드인 치보르 졸탄과 부다이 라슬로를 오늘날 윙어에 해당하는 2선으로 후진 배치함으로써 하프백들과 히데구티의 패스를 받기 용이한 위치로 옮겨 측면에서의 플레이를 강화시켰다. 이는 고전적인 아웃사이드 포워드에서 오늘날의 윙어로 발전하는 시초가 된다. 

물론 윙어들과 공격수들은 주기적으로 포지션을 체인지하며 플레이했으며 이는 철저한 1:1 대인마크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던 WM 시스템의 수비진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였고 일반적인 WM 시스템이 몰락의 길을 걷는 시초가 된다. 

그리고 세베스 구스타브는 이 스위칭 플레이를 공격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들에게 다재다능함을 요구했으며 어떤 선수라도 어느 위치에서나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했고 이는 하프백과 수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초로 주목받은 헝가리의 형제 수비수 휘글 카로이와 요제프 휘글, 이들은 후배 수비수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다행히 헝가리는 이에 대한 교본이 있었다. 과거 2-3-5 피라미드 시스템이나 메토도 시스템이 유행하던 시절 휘글 게이트라 불렸던 휘글 카로이와 휘글 요제프의 사례라는 훌륭한 교본이 있었다. 형인 카로이는 하프까지 전진하며 하프백중 하나를 불러오며 스위칭하는 풀백이었으며 동생인 요제프는 강력한 킥력에서 나오는 롱 패스로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 

이는 헝가리의 수비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로란트 줄라는 휘글 카로이의 전진성을 본받아 일반적인 센터 백의 위치가 아닌 센터 백과 센터 하프의 중간 지점에서 활약했으며 자유롭게 여러 지역으로 커버 플레이를 펼쳤다. 이는 훗날의 독일식 리베로나 포어 리베로에 영향을 주었다. 

역습 상황에서 로란트가 전진하면 레프트 하프인 자카리아스 요제프가 왕성한 활동량으로 그 공간을 커버했으며 이는 칼 라판이 처음 고안한 베로우 시스템에서 나온 초기의 백 포 대형과도 굉장히 유사하다. 그 외 유사시에는 자카리아스와 로란트 모두 중앙으로 내려와 현대적인 백 포의 모태가 되는 유형을 구사했다. 

매직 마자르의 위대한 주장 보직 요제프

그럼 레프트 하프인 자카리아스가 내려가면 그 빈 공간은 누가 채우는가? 바로 라이트 하프인 보직 요제프가 버텨준다. 보직 요제프는 매직 마자르의 중원의 핵이었으며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왕성한 활동량을 이용해 중원을 장악했으며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를 활용한 경기 운영으로 팀 전체를 조율하는 훌륭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였으며 기습적인 공격 가담을 통해 종종 득점을 터뜨리기도 했다. 보직이 버티는 동안 로란트나 자카리아스는 다시 하프로 돌아와서 중원 싸움에 힘을 배가해줬다. 

공격적인 하프백 역할을 맡은 보직 요제프 역시 분더 팀의 공격적 하프인 슈미슈틱이나 아주리 군단과 볼로냐의 안드레올로를 모티브로 사용되었으며 추가로 1선에 침투하여 득점까지 하는 역할도 부여받으며 현대의 미드필더의 시조가 되는 선수다. 

레프트 풀백 란토스 미할리는 1920년대의 레프트 풀백 휘글 요제프와 마찬가지로 강력하면서 정확한 킥력을 무기로 삼아 전방으로 중장거리 롱패스를 뿌려주면 이를 후진 배치된 윙어 치보르가 받아 전개하는 방식은 매직 마자르의 중요한 공격 루트였다. 라이트 풀백 부잔스키 예노는 주로 상대의 에이스를 집중 공략해 맨 투 맨 마킹을 하면서 상대의 에이스의 경기 영향력을 지워서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세계 최초로 빌드업을 시도한 골키퍼 그로시치 줄라

마지막으로 골키퍼인 그로시치 줄라는 당대 골키퍼는 필드 플레이어에 비해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편견을 뒤집고 수비 뒷공간을 폭넓게 커버하며 스위퍼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하기도 했으며 당시에 골키퍼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확한 패싱력으로 적절한 볼 배급을 해주는 스위퍼 키퍼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물론 이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완성시킨 마누엘 노이어에게 묻힌 감이 있지만 소련의 레프 야신이나 아르헨티나의 아마데오 카리조와 함께 골키퍼의 빌드업을 최초로 시도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태된 선수들도 있는데 세베스 구스타브는 자신의 축구에 부적합한 전형적인 득점만을 노리는 공격수인 데아크 페렌츠를 소외시켰다. 그리고 데아크 외에도 세베스의 축구 철학에 부적합한 기존의 노장 선수들은 도태되어 마자르 군단에 합류하지 못하고 은퇴한다. 

두 번째는 조직력의 극대화이다. 세베스는 칼 라판이 그라스호퍼와 세르베트의 멤버들을 스위스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채워 좋은 성과를 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칼 라판은 스위스 대표팀을 구성하면서 그라스호퍼 클럽의 선수들을 위주로 손벌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칼 파란이 그라스호퍼의 감독직을 스위스 대표팀 감독직과 겸임했으며 세르베트에서도 감독직을 수행한 경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저 카드를 포기하면 세베스가 원하는 축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세베스는 당국의 상황을 이용하기로 한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권의 사회주의 독재국가였으며 클럽 소속들은 프로선수가 아닌 명목상으로는 아마추어 선수였다. 

게다가 헝가리는 부다페스트 혼베드라는 군인 팀을 운용하고 있었으며 독재 국가에서 강력한 권력을 자랑하는 비밀경찰인 AVH이 인수한 부다페스트 보로스 로보고 즉 오늘날의 MTK 부다페스트라 불리는 팀을 소유하고 있었다. 

1954 헝가리 선수 구성단이다. 혼베드 출신이 8명이고 보로스 로보고 출신이 6명이다.


세베스는 헝가리 정부에 요청하여 대표팀 주전급 선수들을 혼베드와 보로스 로보고로 옮기기를 요청했고 헝가리 정부는 주전 선수 중 스위칭 플레이의 비중이 낮은 부잔스키를 제외하고 나머지 열 명의 선수를 모두 저 두 팀으로 옮긴다. 심지어 원래는 한 팀으로 옮기길 원했으나 그러면 헝가리의 축구 리그인 넴제티 버이녹샤그가 도태되는 부작용을 우려해 두 팀으로 나눈 것이다.  

주축 멤버 대부분은 혼베드나 보로스 로보고 출신이었으나 부잔스키는 맨 마킹 담당이며 스위칭 플레이에서의 영향력이 적어 도로기에 남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이렇게 국가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인위적으로 옮기면서 조직력도 잡은 매직 마자르를 막을 상대는 없어 보였다.

파죽지세 (破竹之勢)

파죽지세의 주인공 두예의 게임 초상화

직역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기세라는 뜻으로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기세를 의미한다.

중국 삼국시대 막바지의 이야기로 오나라가 손호의 폭정 때문에 쇠락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해에서 곽마의 난이 일어나 병력이 분산되었다. 

이 틈을 노린 진나라의 사마염은 두예를 진남대장군으로 삼아 오나라를 공격했다. 두예는 초장부터 성과를 보여 강릉을 지나 무창까지 점령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전과였다. 그래서인지 작전회의에서 한 장수가 전염병과 장마를 핑계로 이쯤에서 그만 진군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두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지금 우리 병사들의 사기는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 요. 대나무는 처음 두세 마디만 칼날이 들어가면 그다음에는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단 말이오?”라고 말하며 그 의견을 일축했다.

그는 그 기세로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을 침공해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세베스 구스타브가 이끄는 헝가리는 상술했던 전술로 기반을 다진 이후 초반에 거둔 2승 2패의 성적을 이어받았으며 첫 경기인 1949년 5월 8일에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6-1로 승리한 것을 포함해 남은 4경기에서 3승 1무의 성적을 거두며 결국 1953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승점 2점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한다.

1952 헬시키 올림픽 헝가리 멤버들

헝가리의 파죽지세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계속된다. 루마니아를 2-1로 꺽고 이탈리아를 상대로 3-0으로 대승하며 분위기를 타며 8강에서는 터키를 7-1로 대파한다.

준결승전에서는 그레놀리 삼총사가 빠진 디펜딩 챔피언 스웨덴을 상대로 6-0으로 대승을 거두며 결승전에서는 지난 대회 준우승국인 유고슬라비아를 만났다.

유고슬라비아는 레프트 백을 겸하면서도 7골을 득점한 브란코 제베츠와 팀의 공격의 에이스로 6골을 득점한 라이코 미티치를 앞세워 헝가리를 공략했으나 헝가리의 스위칭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푸스카스와 코치시, 치보르가 이끄는 헝가리의 공격을 유고슬라비아는 블라디미르 베아라의 선방으로 간신히 막다가 70분에 푸스카스가 드디어 베아라를 뚫고 왼발 슈팅으로 득점했으며 치보르의 쐐기골로 2-0으로 유고슬라비아와 베아라를 무너트리고 금메달 수상에 성공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수여받는 매직 마자르

이런 헝가리의 강력한 모습을 보고 폴란드는 1954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헝가리를 만나자 기권해버렸으며 헝가리는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다. 

그리고 친선전으로 전술과 팀을 완성시키는데 집중하는데 이런 완성형 전술을 잘 보여준 게 1953년 11월 25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을 6-3으로 꺾은 것과 1954년 5월 23알 월드컵 출정식을 앞두고 잉글랜드를 부다페스트로 불러내서 7-1로 대파한 경기에서 잘 나온다. 

잉글랜드는 1950 브라질 월드컵 실패에도 자신들은 운이 나빠서 실패한 것이지 아직도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홈인 웸블리에서는 진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웸블리에서의 빌리 라이트와 푸스카스 페렌츠의 인사.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6-3으로 승리한다.

잉글랜드의 월터 빈터버텀 감독은 히데구티가 미끼임을 잘 알고 수비진의 에이스 빌리 라이트를 위시한 수비진에게 푸스카스와 코치 시를 주시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세베스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오히려 히데구티의 감춰왔던 센터 포워드로서의 재능을 발휘시켰고 푸스카스와 코치시에게 끌려다니던 잉글랜드의 수비진들은 히데구티에게 헤트트릭을 당한다. 그렇다고 푸스카스를 제대로 막은 것도 아니어서 푸스카스에게도 멀티골을 허용한다. 즉 암도진창의 계에 완전히 당한 것이다. 

고우영 초한지에서 묘사한 암도진창의 계

'적을 제어하기 위해 행동을 고의로 노출시키고 기습공격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다.'라는 뜻의 암도진창과 딱 걸맞는데 히데구티가 미끼고 실은 푸스카스와 코치시라는게 어느 정도 드러나자 이에 대한 대비책이 나올 거란 걸 예상한 세베스가 그동안 숨겨왔던 전략인 센터 포워드로서의 히데구티의 능력을 꺼내 들며 잉글랜드를 대파한 것이다.

잉글랜드는 이 대패에 복수를 다짐했으며 1954년 5월 23일 스위스 월드컵 직전 평가전 상대로 헝가리로 낙점하고 복수전을 펼친다. 

대승에 환호하는 헝가리 관중들

하지만 웸블리에서도 헝가리에게 대패했는데 부다페스트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번엔 아예 수비수인 란토스에게 선제골을 얻어맞으며 푸스카스, 코치시, 히데구티에게 골문을 유린당하고 마지막으로는 주전 부다이를 대신해 나온 서브 멤버인 토트 요제프에게도 골을 먹히며 7-1로 대패한다. 잉글랜드를 넘어 축구 역사에도 손꼽히는 위대한 수비수인 빌리 라이트도 푸스카스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헝가리는 이처럼 마지막 평가전을 기분좋게 마친 뒤 스위스로 향한다.

스위스에서도 헝가리의 파죽지세는 계속된다. 첫 경기 대한민국은 나라 사정이 어려워 경기 시작 20 시간 전에야 스위스에 도착할 정도로 상황이 나쁜 팀이었다.

양 팀의 주장 푸스카스와 민병대

외신의 평가는 "대한민국은 헝가리에게 20-0으로 패한다." 였으나 홍덕영 골키퍼의 선방으로 9-0으로 패하며 선방한다. 헝가리는 축구 약소국 대한민국을 9-0으로 누른 이후 1위 진출전에서 서독을 8-3으로 대파하며 8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베르너 리브리히에 의해 푸스카스가 부상을 입는다.

반칙이 난무하던 8강전 헝가리vs브라질의 경기. 일명 베른의 전투라고 한다.

헝가리는 8강에서 전대회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만났다. 그러나 폭우 속에서 진행된 이 경기에서는 브라질의 수비수 니우통 산투스가 히데구티의 유니폼 하의를 찢어버려 경기가 과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경기는 점차 과열되었고, 폭력적인 반칙이 속출했다. 헝가리의 주장인 보직가 브라질의 핵심 수비수 니우통 산투스에게 범한 반칙이 양 선수간의 싸움으로 번져 결국 양 선수 모두 퇴장당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공격수인 움베르투 토치가 로란트 줄러를 발로 걷어차며 퇴장당했으며 경기는 4-2의 헝가리의 승리로 끝났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오던 브라질의 미드필더 핀헤이류가 헝가리 관중석 쪽에서 날아온 병에 맞아 쓰러지자 브라질 선수단이 헝가리 선수단의 라커룸에 들어가 난투극을 벌였다.

파울이 난무하는 8강전 헝가리vs브라질의 경기

난투극에 휘말리며 체력적으로 큰 손해를 본 헝가리는 준결승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만난다. 우루과이와의 경기는 2-2로 연장전까지 갔으나 연장전에서 결국 코치시의 활약으로 4-2로 이긴다.

1950년 05월 14일, 빈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오스트리아에게 패배한 이후 1954년 6월 30일 우루과이전까지 4년 동안 32경기 연속 무패를 거두며 파죽지세를 이어갔지만 힘든 대진과 베른의 난투극 사건으로 인해 매직 마자르의 선수들은 지쳐갔다.

권불십년(權不十年)과 호복기사(胡服骑射)

프리츠 발터와 푸스카스 페렌츠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강력하고 탄탄한 권력이라도 십 년을 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는 헝가리 대표팀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1954년 7월 4일 베른에서 열린 결승전을 앞두고 헝가리 선수단은 만신창이었다. 거기에는 1954 스위스 월드컵의 경기 진행 방식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대전 방식 때문이었는데 조별리그에서 1위 팀은 1위 팀끼리 또는 2위 팀은 2위 팀끼리 8강과 4강에서 맞붙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헝가리는 브라질과 우루과이라는 험난한 상대를 만났고 서독은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수월한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만났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 대표팀은 결승전을 앞두고 헝가리의 우승을 설레발치는 군중들이 헝가리 대표팀이 머무는 숙소에서 야단법석을 피워 헝가리 대표팀은 숙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승전에 임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올라온 서독은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축구화에 징을 박아 대비했다. 

결승전을 위해 입장하는 푸스카스와 프리츠 발터

경기 시작 후 헝가리는 푸스카스와 치보르의 빠른 득점으로 10분도 안돼서 2-0으로 만들었으나 몰록과 헬무트 란의 추격골로 18분 만에 2-2로 따라 잡혔다. 헝가리는 파상공세를 하였으나 프리츠 발터가 이끄는 서독은 잘 버텼다. 

그리고 전반전 종료 이후 서독은 금지약물에 관한 제도가 없던 당시의 상황을 악용하여 하프타임에 서독 대표팀은 메스암페타민을 먹고 경기에 임했다. 실제로 헝가리 대표팀 선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독 대표팀 선수들의 눈이 풀려있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서독의 골키퍼 투렉은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계속 선방했으며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고, 헬무트 란이 기가 막힌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3번째 득점을 뽑아내었다. 헝가리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파상공세를 일으켰고, 경기 종료 2분을 남겨놓고 경기를 다시 동점으로 만드는 듯 보였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그리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어 1954 스위스 월드컵은 서독의 우승으로 끝났다. 

환호하는 서독 대표팀

하지만 이것은 매직 마자르의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매직 마자르는 승승장구했으나 1956년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인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며 공산정부는 이를 소련의 군대에 의지해서 진압한 것이었다.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 도중 소련군의 전차가 시민군에게 파괴되었다.

매직 마자르의 일원 다수가 출전한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이때 유러피언 컵 문제로 빌바오로 원정을 나간 상태였는데 이것에 환멸을 느낀 푸스카스와 코치시, 치보르는 팀을 이탈해 각각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거처를 옮겼으며 세베스는 경질당하며 매직 마자르의 신화는 끝난다. 

즉 정치권에 기대 흥한 팀이 정치권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망한 것이다.

매직 마자르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은 축구계에 많은 것을 남겼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은 팀들은 천하를 호령했다.

호복기사라는 말이 있다. 

중국 한단에 있던 호복기사소상. 지금은 조원공원에 있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이 보병과 전차 위주의 군제로는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데 한계를 느끼고 경기병 위주로 군제를 개혁한 일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면서 화살을 쏜다는 뜻으로 비효율적인 전통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성을 추구하여 근원적인 문제와 체질을 개혁하려는 문제 해결 자세를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매직 마자르의 신화를 본 여러 팀들은 호복기사의 자세로 이 팀을 본받는다. 

1956-57 시즌에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는 소셜리스트 풋볼을 보고 디 스테파노와 리알을 앞세워 공격진의 스위칭을 앞세워 유러피언 컵 5연패를 이뤄냈으며 피오렌티나도 자카리아스의 수비 합류를 본받아 백 쓰리와 백 포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앞세워 저평가받은 전력을 가지고도 세리에 A 우승과 유러피언 컵 준우승의 성적을 이뤘다.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구현한 독일식 리베로의 모티브도 로란트 줄라의 역할에서 경기 지배력을 더 강화한 케이스였으며 브라질과 벤피카에서 유행한 4-2-4도 저런 변화무쌍한 수비진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이 소셜리스트 풋볼은 네덜란드에서 한 천재에 의해 재창조되었는데 그는 바로 아약스의 감독인 리누스 미헬스였다. 

아약스에서 유러피언 컵 우승을 하고 획득한 빅 이어를 자랑하는 미헬스와 크루이프

미헬스는 소셜리스트 풋볼에서 영감을 얻은 뒤 소셜리스트 풋볼의 마지막 방점인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이루는 세부 전술을 가다듬고 공은 사람보다 빠르다는 명제를 찾아 패스 워크를 주고받는다는 방법론을 중점으로 전략을 짜며 현대 축구의 시조 격인 토털 풋볼을 이루게 된다. 

세베스 구스타브는 헝가리 대표팀을 물러나면서 잊힌 채로 야인으로 살다가 1986년에 숨을 거뒀으며 이때 매직 마자르의 멤버들은 2015년 1월 11알 부잔스키 예노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업적과 이들이 이룬 기록은 역사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매직 마자르의 구성원들 상상도

현대 축구에는 여러 복잡한 전술들이 있으며 이들은 고도로 발전한 위대한 전술들이다. 그렇기에 과거 전술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선각자들의 여러 시도 끝에 점차 발전한 게 현대 축구의 전술들이다. 

완성된 그림을 보다가 밑그림을 보면 그 밑그림이 초라할 것이다. 하지만 밑그림 없이 완성된 그림이 나오던가?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