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발상의 전환 - (팀의 평균적인 개인 기량이 떨어진다고 해서 경기를 이길 수 없을까?)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축구의 발상의 전환 - (팀의 평균적인 개인 기량이 떨어진다고 해서 경기를 이길 수 없을까?)

토르난테 2020. 4. 2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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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위구조 (圍魏救趙)

위위구조란 병법 삼십육계 중 승전계의 제2계이다.

마릉 대전 상상도

전국시대 위나라는 방연이라는 걸출한 병법가를 얻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뒤에, 그의 지휘로 조나라로 쳐들어간다.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제나라는 그에 전기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조나라를 구원토록 한다. 

이때 손빈을 군사로 데리고 가서 조나라를 어떻게 공격할지 논의했는데 손빈은 조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조나라에 있는 위나라의 병력들은 한 국가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정예병일 수밖에 없고, 여기에 빨려 들어가면 조나라는 구할지 몰라도 자신들도 큰 피해를 입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제나라의 군대가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포위하니 본진을 비워두고 출정했던 위나라의 군대는 허겁지겁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손빈은 적들이 철수하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복병을 숨겨놓아서 큰 피해를 입히고, 원래 목적이었던 조나라도 구해낼 수 있었다.  이 전투를 마릉 대전이라고 한다.

즉 발상의 전환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전략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축구계에도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이다. 고로 초기에는 최대한 많은 공격수를 투입해서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펼쳤다.

하지만 여기서 한 뛰어난 현인은 발상의 전환을 한다. "골을 내주지 않으면 단 한 골이면 이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는 세계 최초로 수비에 집중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가진 전력에 비해 준수한 성과를 냈다.  그는 누구일까?

볼트 체인지의 아버지 칼 라판 (국적이 잘못 나와있다.)

그의 이름은 칼 라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라피드 빈 소속으로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을 이끈 훌륭한 하프백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31년에 스위스의 세르베트로 이적해 감독 겸 선수를 맡았다. 세미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라 전력이 약했던 세르베트였다.

그는 여기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결국 해답을 얻었다. 그 해답은 상술했던 "골을 내주지 않으면 단 한 골이면 있다."였다.


모르가르텐 전투 (Battle of Morgarten)

중세의 중무장한 기병, 즉 기사는 전력이 매우 강했다. 기병은 보병에 비해 기동력이 뛰어났으며 높이의 우위를 지녔기에 보병으로 기병을 일 대 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모르가르텐 전투 상상도

그러나 이 명제는 스위스의 4개 주가 가담한 스위스 서약 동맹과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투에서 깨지게 된다. 

합스부르크 군의 중무장한 기병이 주축이 되고 보병이 보좌하는 2만의 군세를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나 스위스 측 지휘관 베르너 슈타우프파허는 1500명의 창병과 약간의 궁수들로 모르가르텐 계곡에서 레오폴트의 선봉대인 중기병 8천 명이 들어오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대를 급습한다.

외길 정면에서는 할버드로 무장한 창병 부대가 기사단을 막아 세우고, 산 중턱에서는 스위스 군이 돌을 굴리며 합스부르크 군을 기습했다. 2천이 안 되는 군대를 가진 스위스는 선봉인 8천의 군세와 병과의 우위를 지닌 적을 상대했음에도 지형과 상대의 약점을 활용한 전략 전술을 앞세워 대승을 거두었고 후방에 대기하던 부대들도 철수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축구도 한때는 전력이 약한 팀이 전력이 강한 팀을 꺾는 일은 오늘날처럼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1930년대 세계 축구계에는 채프먼이 고안한 WM 시스템이 유행하게 되었다. WM은 공격진 다섯 명과 수비진 다섯 명이 대칭적으로 붙는 포메이션이라 기본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을 가진 팀이 이길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칼 라판은 우수한 전략 전술을 고안하면 보통 수준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모인 팀이 수준급의 선수들이 모인 팀을 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세르베트는 상술했듯이 세미프로들로 구성된 팀이었기에 이런 방식의 정면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라판은 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다.

"선 수비 후 역습 축구"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칼 라판의 베로우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라판의 초기 베로우 시스템

라판은 보통 두 명이 후방에 배치되는 당시의 2-3-5 시스템에서 풀백 두 명이 담당하는 후방에 양 하프 백을 후진 배치해서 4명의 수비수를 배치해 후방을 지킨다.

그렇게 되면 윙 하프들을 내린 대가로 4-1-5와 유사한 구도가 나오게 되어 수비에는 용이하지만 혼자서 중원 싸움을 해야 했던 센터 하프에게 과부하가 걸리게 되어 중원 싸움이 어렵게 되는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에 칼 라판은 새로운 대형을 생각한다. 새로운 대형은 다음과 같다.

라판의 완성된 베로우 시스템

이에 칼 라판은 처음에는 중원 싸움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선수비 후역습 체제로 나섰으나 여기서 인사이드 포워드들을 후진 배치하면서 4-1-2-3과 같은 구도를 나타내게 된다. 물론 최소한 한 골은 넣어야 이길 수 있으므로 아웃사이드 포워드들과 센터 포워드는 공격에 치중했다. 

마지막으로 앞에 풀백 한 명과 윙 하프 두 명이 3명의 공격수를 마킹할 때 이때 풀백 중 한 명은 최후방에서 뒷공간 커버플레이를 하는 역할을 맡는데 훗날에 리베로로 불리게 될 스위퍼가 탄생하게 된다.

스위퍼는 세 명의 수비수 중 한 곳이 상대 공격수에게 돌파당하면 돌파당한 공간을 커버하며 상대를 막음으로써 상대 공격수를 지치게 했다.

이 시스템은 베로우(Verrou) 시스템이라 불렸으며 이 말을 한국어로 해석하면 빗장이란 뜻을 가진다.

1931년 플레잉 코치로 처음 세르베트에 부임한 이래 1935년까지 다섯 시즌을 머물면서 1932-33 시즌과 1933-34 시즌에 스위스 리그 우승을 하는 기적을 이루어낸다.

라판은 1935-36 시즌을 앞두고 그라스호퍼 클럽으로 떠나서 다섯 번의 스위스 리그 우승을 이루었으며 1948-49 시즌에 세르베트로 돌아와 1948-49 시즌 스위스 컵 우승과 1949-50 시즌 스위스 리그 우승을 이룬다.

라판은 이러한 실적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1963년까지 스위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직하게 된다. 중도에 사임했던 기간들이 있긴 하지만 그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총 12년간 재임했다.


알프스 산맥

알프스 산맥

유럽에서 높은 산맥으로 산 위에는 빙하가 존재할 정도로 높은 산맥이며 이 산맥을 넘는 고개도 험준하여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이 산맥을 쉽게 넘을 수는 없었다.

스위스는 이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였고 국력이 강하지 못했어도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군의 수비를 강화하면 제 아무리 강군이라도 이 산맥을 넘다가 스위스군에게 참패하기 일수였다.

물론 한니발, 나폴레옹,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라는 서양사 불멸의 명장들은 저 산맥을 넘는 데 성공했지만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스위스 축구도 위와 같았다. 선수들 개개인의 기량은 항상 저평가를 받았어도 끈끈한 조직력과 견고한 수비력으로 본선에 진출하면 허무하게 패하는 그림은 잘 보여주지 않았다.

이 스위스 국가대표팀의 정체성을 살린 구세주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시절 스위스를 속국으로 삼았었던 오스트리아 태생의 칼 라판이었다.

스위스 축구협회는 1937년에 1938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칼 라판을 대표팀 감독으로 등용했다. 스위스 리그에서의 성과를 국대에서도 기대한다는 메시지였다.

라판은 스위스에서도 베로우 시스템을 정립한다.

상술했던 세르베트나 그라스호퍼 클럽에서의 구도와 비슷하다.

1938 월드컵 스위스 대표팀의 포진

두 명의 풀백 중 레프트 풀백인 어거스트 레만은 중앙에서 센터 포워드를 상대한다. 그리고 양 윙 하프인 스프링거와 뢰르처는 오늘날의 사이드 백처럼 움직이며 아웃사이드 포워드를 상대하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이들이 돌파당하거나 인사이드 포워드의 기습적인 침투에 대비해 주장이자 라이트 풀백인 세베리노 미넬리가 스위퍼 역할을 맡아 돌파당한 지역을 커버하며 다시 수비한다.

세계 최초의 스위퍼 세레비노 미넬리

세베리노 미넬리는 스위스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추앙받는 위대한 선수였으며 영리한 축구 지능에서 나오는 훌륭한 커버 플레이를 보여주며 수비를 지휘하여 칼 라판의 선 수비, 후 역습의 중요한 카드가 된다.

어거스트 레만은 인사이드 포워드 출신이나 1937년에 그라스호퍼 클럽으로 이적한 뒤로는 칼 라판에 의해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며 세미 프로임에도 훌륭한 기량을 보이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잉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1차 저지선을 이끌며 스텐리 메튜스를 꽁꽁 묶어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

양 윙 하프를 수비적으로 배치했기에 센터 하프인 시리오 베르나티는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베르나티는 넓은 활동량과 유럽에서 가장 공격적인 센터 하프였지만 혼자서는 다른 팀의 인사이드 포워드와 하프백들을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인사이드 포워드들의 지원을 받았다.

공격의 핵이자 주 득점포 앙드레 아베글린

인사이드 포워드인 알프레드 비켈은 그라스호퍼 클럽에서, 아마도는 세르베트에서 칼 라판의 지도를 받아 이 시스템에 굉장히 익숙했다. 고로 능숙하게 센터 하프를 보호했다. 그리고 남은 공격수 세 명은 득점에 전념했다. 특히 센터 포워드 앙드레 아베글린은 특출난 기량으로 스위스 대표팀에서는 유일하게 해외 팀인 프랑스의 쇼쇼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용병으로 활약하던 실력파 선수였다.

칼 라판이 조직력과 시스템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저 선수들의 소속팀을 봐도 알 수 있다.

1938 프랑스 월드컵 스위스 선수단

실력파 선수인 앙드레 아베글린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는 모두 세르베트나 그라스호퍼 클럽에서 칼 라판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들이다.

특히 22명의 라인업에서 그라스호퍼 클럽의 선수를 무려 9명이나 선발했으며 그중 주전 멤버만 7명이 그라스호퍼 클럽 소속이었다. 게다가 에이스이자 해외파인 아베글린도 1934년까지는 그라스호퍼 클럽 소속으로 뛰어서 해외파였음에도 호흡을 맞추는데는 큰 문제는 없었다.

칼 라판은 이 시절에 이미 조직력이란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이 그라스호퍼 클럽에서 데리고 있던 선수들은 대거 주축으로 삼아 팀 워크를 강화시켰다.

칼 라판이 이끄는 스위스 국가대표팀은 밀라노에서 포르투갈과의 단판 예선 경기를 펼쳤다.

포르투갈에는 약관의 나이의 천재 공격수 페르난도 페이로테우가 있었다. 그는 훗날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383경기에서 603골을 득점하는 득점 기계로 성장하는 천재 스트라이커지만 이 날에는 칼 라판의 베로우 시스템에 걸려들어서 페널티 킥을 한 골을 득점하는데 그쳤다.

스위스는 포르투갈을 2-1로 제압하고 본선에서는 최근 상승세를 거두고 있는 독일 대표팀과 만나게 된다.

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8-0 대승을 거뒀던 독일

전력상으로는 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를 대파한 독일의 멤버에다가 안슐루스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의 분더 팀 멤버 일부를 흡수해서 강해 보였지만 스위스와 다르게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

축구를 하나도 모르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수년간 조직력을 다져온 팀을 해체하고 급하게 분더 팀 멤버 일부를 넣은지라 조직력에서 문제가 생겼다.

제프 헤어베르거 역시 팀 워크란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 독일 최강의 클럽인 샬케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짜며 선전했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독재자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었으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분더 팀 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스체판, 레너, 프란츠 바그너, 야네스와 묀첸베르크 등 훌륭한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조직력에 문제를 노출했다.

1938년 6월 4일 독일 vs 스위스의 경기에서 스위스의 역습 상황

분명 주전 선수들의 기량은 스위스보다 몇 수 위에 있었으나 베로우 시스템으로 잘 다져진 스위스 대표팀의 조직력에 고전했으며 세간의 예상과는 다르게 1대 1로 비기며 재경기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재경기에서는 독일이 오스트리아 출신 하네만의 선제골과 스위스의 뢰르처의 자책골로 2-0으로 앞서며 공격을 강요했다.

하지만 스위스 대표팀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와서 단단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안슐루스로 억지로 합쳐진 대표팀인 독일 대표팀과는 다르게 서로를 믿으며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42분 빌라셰크의 만회골과 비켈의 동점골, 그리고 에이스 아베글린의 멀티골로 4-2로 역전하며 독일을 무찌르고 8강에 진출한다.

특히 독일은 묀첸베르크-골드브루너-야네스라는 검증된 조합을 버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슈마우스와 모크를 야네스의 파트너로 채택하면서 수비 조직력이 흔들려 실점하여 재경기의 여지를 줬다가 결국 수비 조직력이 무너지며 유리한 상황에서도 굳히지 못한다.

스위스는 전 대회에서 대진운으로 당시에는 약체였던 네덜란드를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는 저평가를 받았으나 칼 라판의 체제에서 더욱 견고해진 스위스는 강적 독일을 꺾고 8강에 진출한다.


한니발 바르카와 샤로시 죄르지 (Hannibal Barca and Sárosi György)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 상상도

하지만 알프스 산맥도 넘은 지휘관들은 있었으며 한니발에 의해 최초로 돌파당했다.

당시 로마의 집정관 스키아비오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설마 알프스를 넘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마르세유 지역에서 한니발을 기다렸다가 론 강에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16일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로 도착했으며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대승하며 로마군을 위험에 빠트렸었다.

칼 라판의 스위스는 8강에서 다뉴브 학파의 최후의 보루인 헝가리를 만났다. 샤로시 죄르지가 주장이자 에이스로 팀을 이끄는 헝가리는 그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로 급성장했다.

샤로시 죄르지. 헝가리는 동양과 같이 성을 앞에 호칭한다.

샤로시 죄르지는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처럼 스위스의 베로우 시스템을 공략하는데 성공했으며 쳉겔레르 줄라, 사슈 페렌츠, 빈체 예노, 코후트 빌모슈등과의 스위칭 플레이로 베로우 시스템에 맞섰다.

커버 플레이를 더했지만 결국에는 대인 마크에 기초를 둔 베로우 시스템은 이 스위칭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 공간이 뚫리면 미넬리가 돌파당한 공간을 커버하면 됐지만 1차 방어진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미넬리는 혼자서 다섯 명의 공격수를 맡아야 했으며 이는 무리에 가까웠다.

결국 전반 40분에 샤로시 죄르지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며 종료 직전 쳉겔레르 줄러에게 쐐기골을 먹히며 아쉽게 탈락했다.

8강에서 탈락하자 라판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을 사임했다. 그러나 1942년부터 7년간 다시 대표팀을 맡아 중립국인 스위스 대표팀의 내실을 다졌으며 1950년 월드컵 예선 통과에 공헌하나 사임하고 그 이후 감독직을 물려받은 프랑코 안드레올리는 개최국 브라질과 비기는 성과를 보이지만 1승 1무 1패로 결국 탈락한다.

이후 개최국으로서 월드컵 참가를 앞둔 스위스 축구협회가 그를 다시 사령탑으로 등용했다. 스위스는 듀얼 토너먼트로 벌어진 조별 예선에서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2-0으로 이겼지만 1위 진출전에서 잉글랜드에게 0-2로 패했으며 벨기에를 이기고 다시 돌아온 이탈리아를 무려 4-1로 대파하고 8강전에 진출한다.

1954 월드컵 8강 스위스vs오스트리아 5-7

8강전에서 만난 조국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3-0으로 앞섰으나 이때 방심해서 전반을 4-4로 끝마쳤으며 결국 5-7로 역전당하며 아쉽게 탈락한다. 그리고 빙심한 이후에는 베로우 시스템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고 해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조직력과 투지에서 실패한 경기였으며 칼 라판은 또다시 사임한다.

칼 라판이 사임한 이후 스위스는 1958 월드컵 지역예선 UEFA 9조에서 스코틀랜드와 스페인에 밀려서 탈락했으며 결국 스위스 축구협회는 1960년에 칼 라판을 다시 부른다.

칼 라판은 전대회 준우승국 스웨덴을 제압하고 본선에 진츨했으나 개최국 칠레와 독일,이탈리아에 밀려 3전 전패의 성적으로 탈락한다.

칼 라판은 1963년까지 스위스 대표팀을 맡았다가 로젠 스포츠와 계약하면서 사임했으며 1968년 로젠 스포츠를 끝으로 감독을 은퇴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1970–71 시즌에는 라피드 빈의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아 팀을 운영하다가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라판이 스위스 축구계를 완전히 떠난 1968년 이후 스위스 국가대표팀은 월드컵과 유로에서 다시 등장하는 데 까지 20년이 넘게 걸렸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오랜만에 본선에 등장했을 정도로 암흑기를 겪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뜻이다.

칼 라판은 현직에 머물 때는 스위스 축구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스위스의 월드컵 최고 성적인 세 번의 8강 진출 중에서 두 번은 그의 손으로 직접 이뤘다.

그리고 스위스 축구를 넘어 이웃나라인 이탈리아 축구의 정체성이 카테나치오로 설립되는 데에도 엄청난 공헌을 했다.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전력의 다수를 잃고 암흑기를 거친 아주리 군단은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스위스의 베로우 시스템을 돌파하지 못하고 두 번 연속으로 패했으며 이는 베로우 시스템의 스위퍼를 본받아 수비진에서 자율성을 보장받는 플레이어인 리베로의 탄생을 주장한 이탈리아의 기자 지안니 브레라의 주장에 큰 힘을 실어줬다.

1940년대 말에 살레르니타나의 쥐세페 비아니 감독은 자신도 칼 라판과 조건이 비슷함을 깨닫고 그의 전술을 본받았으며 비아니 감독의 후임 감독 네레오 로코는 이런 전술로 살레르니타나를 세리에 A 2위까지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로코의 1961-62 시즌 AC 밀란

그리고 그레놀리 삼총사가 노쇠하거나 은퇴한 밀란에 부임해 젊은 선수들인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지안니 리베라 등으로 세대교체를 이루고 기존의 WM전술에서 하프 백인 베니테즈를 센터 백으로 내려 포 백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기존의 센터 백 자리에 있던 체사레 말디니를 리베로로 내리며 라판의 4-1-2-3의 대형보다 더 수비적인 4-2-1-3 대형으로 고착화시키면서 밀란의 성공시대를 이끈다.

그리고 에레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번 더 개량해 "그란데 인테르" 즉 위대한 인터 밀란의 시대를 이끌며 카테나치오의 왕으로 자리 잡았으며 부진을 겪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도 이들을 본받아 팀의 정체성을 카테나치오로 잡으며 유로 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루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베로우가 빗장을 프랑스에서 쓰는 단어라면 카테나치오는 빗장을 이탈리아에서 쓰는 단어이다. 그는 이렇게 이탈리아 축구의 정체성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라판의 유산은 유럽식 포 백 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4-1-2-3과 유사한 대형은 잘 나가던 매직 마자르의 MM 시스템도 결국 수비 시의 스위칭은 레프트 하프인 자카리아스 요제프와 센터 하프인 줄라 로란트가 수비 지역으로 내려오며 포 백과 유사한 수비 대형을 갖췄다. 1950년대 중반 피오렌티나의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감도도 WM 체제에서 하프 백인 키아펠라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여 수비 시에 4-1-2-3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는 구단의 첫 세리에 A 우승과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을 이루는데 공헌을 했다.

유로 72의 서독으로 라판의 대형을 자신의 방식으로 유지시켜 대회 내내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950년대 후반 남미와 벤피카에서 유행한 4-2-4 대형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애용되었으며 굳이 선 수비 후 역습을 취하지 않아도 저 대형 자체를 자신의 방식으로 썼던 독일 대표팀이나 네덜란드 대표팀도 있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축구를 발전시키는 기본 포메이션으로 저 대형을 애용했다.

그리고 라판은 국가대표팀 스쿼드를 짜는 과정에서도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상술했듯이 자신이 지휘한 그라스호퍼 클럽에서 주축 대부분을 데려와 훌륭한 조직력을 유지시켰다.

이 과정도 훗날 여러 국가대표팀에서도 모방했다.

1950년대 매직 마자르도 공산 정권이 국가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모두 부다페스트 혼베드와 MTK 헝가리아라는 두 팀으로 몰아 조직력을 다듬었으며 1970년대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헬스는 크루이프와 불화가 있던 PSV 에인트호번 선수들을 제외하고 아약스에서 크루이프와 함께했던 동료들을 다수 데려와 아약스 위주에 팀을 짰으며 소련과 디나모 키예프의 감독을 겸임하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도 소련 대표팀 대부분을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로 구성해 유로 88에서 준우승을 이루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4 월드컵 우승 팀의 주축엔 람, 슈바인슈타이거, 뮐러, 크로스, 보아텡 등 바이에른 선수들이 중심이었다.

1970년대와 201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독일-바이에른 뮌헨, 1980년대 상반기에 좋은 성적을 거둔 이탈리아-유벤투스, 그리고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이끌었던 스페인-바르셀로나같이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뼈대를 일치시키는 전술의 원조는 바로 칼 라판에 의해 나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칼 라판의 볼트 체인지는 결국 선수들의 수준에서 한계가 있던 스위스로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냈어도 국제대회를 호령하지는 못했으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라이트 팬들한테는 잊혀졌지만 축구 전문가들은 이 라판의 유산을 토대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과연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던 인물이다. 말은 쉬워 보여도 이를 실천해서 성과를 보여 후세에 무언가를 남기는 발상의 전환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렇기에 위대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선각자 칼 라판

칼 라판, 이 남자는 빗장의 이름을 딴 베로우 시스템을 모방했지만 결국 자신의 한계를 잠그고 있던 빗장을 깨고 문을 열어 새로운 길을 간 멋진 남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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