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공격수 Top 11~20

국가의 영웅들/독일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공격수 Top 11~20

토르난테 2025. 2. 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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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독일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준일은 2025년 2월 8일입니다.

 


20위 에드문트 코넨

 


생년월일: 1914년 11월 10일
A매치 기록: 28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30년대 독일 무대에서 활약한 센터포워드로 2009년에 발간된 잡지 11 Freunde에서는 코넨을 그레이 하운드처럼 유연하고 가치 있는 선수이며, 빠르고 강력했다고 평가했으며 골 결정력이 대단히 우수했다.

자르브뤼켄과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활약한 코넨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40-41 시즌에는 오늘날의 DFB포칼의 전신인 참메르포칼에서 득점왕을 이뤄내기도 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코헨은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4골을 득점하며 팀을 준결승에 올렸다. 그러나 1930년대 하반기에는 다코스타 증후군으로 인해 국가대표 커리어 역시 중단되었다가 1939년에나 복귀했으며 마지막 A매치 경기 헝가리전에서는 팀이 1-3으로 밀리고 있을 때 프리츠 발터와 함께 5-3 역전극을 이뤄내며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를 경질 위기에서 구해냈다.

 

19위 카를 호만

 


생년월일: 1908년 6월 18일
A매치 기록: 26경기 20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VfL 벤라트

1930년대 독일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인사이드 레프트 겸 센터 포워드로 매우 민첩하고 폭발력이 있는 공격수라 이를 바탕으로 수비수들을 쉽게 따돌렸고 박스 안에서의 적절한 위치 선정 및 정확한 슈팅력을 바탕으로 한 깔끔한 마무리까지 겸비했고 부드러운 볼 컨트롤에서 나오는 부드러우면서도 재빠른 원터치 플레이 역시 겸비했다.

어린 시절부터 벤라트의 유스팀에서 축구를 하다가 벤라트에서 데뷔해 활약한 호만은 같은 리그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의 독주에 밀려 많은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서도 1929-30 시즌 서부 독일 연합 축구 대회 베르크마르크 우승 및 가울리가 니더라인 2회 우승, 그리고 서부 독일 협회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서독 대표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앗던 호만은 1934 이탈리아 월드컵 8강전에서는 스웨덴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해 조국의 준결승행을 이끌었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이 부임한 뒤에는 선호도에서 루돌프 겔레슈에게 밀리며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18위 오토 지플링

 


생년월일: 1912년 8월 3일
A매치 기록: 31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발트호프 만하임

1930년대 독일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인사이드 포워드로 특히 번뜩이는 센스로 이름을 날렸으며 센터 포워드 자리에 설 때는 펄스 나인 역할을 맡아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며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에게 양질의 패스까지 공급했으며 득점력도 준수했다.

발트호프 만하임의 창단 멤버로 시작해 선수 생활 전부를 이 구단에서만 활약한 원 클럽맨 지플링은 베치르크스리가 라인자르 4회 우승과 가울리가 바덴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지역리그 통합 7회 우승을 이뤄냈고 지플링 개인도 1934년에 열린 독일 챔피언십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중용된 지플링은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해 조국의 4강 진출을 이뤄냈고 1937년 5월 16일. 독일은 덴마크를 상대로 브레슬라우 엘프라는 역사적인 시합을 펼쳤는데 지플링은 덴마크를 상대로 5골을 득점함은 물론 마티아스 진델라 못지않은 펄스 나인의 진수를 보여주며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지플링은 1939년에 27세의 나이로 흉막염으로 쓰러지며 타계하는 비극을 겪었다.

 

17위 위르겐 슈파르바서

 



생년월일: 1948년 6월 4일
A매치 기록: 49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80cm
주 소속팀: FC 마그덴부르크

1970년대 초중반 동독 축구 황금기에 이름을 날린 처진 공격수 겸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어난 테크닉과 드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유려한 플레이메이킹과 중요한 순간에 한 건 해주는 영웅적인 클러치를 바탕으로 동독 축구계의 스타플레이어로 추앙받았다.

커리어의 전부를 마그덴부르크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슈파르바서는 DDR 오베리가 3회 우승 및 FDGB 포칼 4회 우승을 이뤄내며 마그덴부르크를 동독 무대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성장시켰으며 1973-74 시즌 유러피언 컵 4강전에서는 스포르팅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득점에 성공해 팀을 결승에 올리는 활약을 펼쳐 우승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동독 대표팀에서도 크라이세와 함께 에이스 중 한 명으로 활약한 슈파르바서는 1965 UEFA 청소년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1974 서독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결승골을 득점하며 조 1위로 8강 2차 리그에 올랐다. 이 골은 동독이 서독에게 흡수되기 직전까지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선전 도구로서 이용되었다.

 

16위 요하임 슈트라이히

 


생년월일: 1951년 4월 13일
A매치 기록: 98경기 53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FC 마그데부르크

서독의 게르트 뮐러에 대한 동독의 대답이라 불릴 수 있는 동독 축구사 최고의 골게터로 요한 크루이프를 닮은 외모와 다르게 플레이스타일은 탄탄한 피지컬과 필리포 인자기를 상회하는 신기의 위치선정,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로 이름을 날렸던 스트라이커였다.

DDR 오베리가 통산 최다 득점자에 랭크되누 슈트라이히는 한자 로스토크에서 데뷔해 활약하며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팀이 강등당했고 이에 슈트라이히는 카를 차이스 예나 이적을 추진했지만 동독 축구협회의 반대로 인해 마그데부르크로 이적했고 마그데부르크에서도 FDGB 포칼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슈트라이히 개인도 오베리가 득점왕 4회 수상 및 동독 올해의 축구선수에 2회 선정되었다.

동독 대표팀 소속으로도 통산 최다 출전 및 통산 최다 득점을 기록한 슈트라이히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대부분 선발로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서독전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은퇴하고 독일이 통일한 이후에도 그의 활약상은 통일 독일 팬들에게 인정받아 2021년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5위 마리오 고메스

 


생년월일: 1985년 7월 10일
A매치 기록: 78경기 31골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9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초반 독일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다소 투박하지만 강력한 신체능력과 우수한 위치 선정 능력과 뛰어난 골 결정력을 보여줬으며 단순히 타겟맨으로서 패스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거침없는 황소 드리블로 상대 수비진을 와해시키고 직접 득점하기도 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데뷔해 2006-07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며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해 주목받았던 고메스는 2009-10 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첫 시즌에는 부진했으나 2010-11 시즌과 2011-12 시즌은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2010-11 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2011-12 시즌에는 52경기에 출전해 41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쳤으나 분데스리가와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각각 훈텔라르와 메시에게 밀려 득점 2위를 기록했고 팀도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준우승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2012-13 시즌, 자신의 부상을 틈타 주전 자리를 차지한 마리오 만주키치에 밀려났지만 만주키치가 결정할 때 기회를 잘 잡아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에 공헌하며 팬들에게 전설로 남았지만 바이에른을 떠나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이후에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2회 선정된 고메스는 디 만샤프트에서는 UEFA 유로 2008 준우승과 2010 남아공 월드컵 준결승을 벤치에서 겪었으나 유로 2012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참가해 3골을 득점하며 조국의 준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이후 대표팀과 멀어졌다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다시 뽑혔으나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고 조별 리그 탈락의 쓴맛을 경험했다.

 

14위 올리버 비어호프

 



생년월일: 1968년 5월 1일
A매치 기록: 70경기 37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우디네세 칼치오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헤딩머신으로 압도적인 피지컬을 활용한 포스트 플레이에 강점이 있었으며 엄청난 파워의 헤더를 보여줬는데 분명 머리로 슈팅을 하는데 발로 힘껏 차는 수준의 파워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리그 세리에 A를 보유한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보낸 비어호프는 1997-98 시즌에 우디네세의 세리에 A 3위 도약을 이끌며 개인적으로도 호나우두를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고 AC 밀란으로 이적해서도 1998-9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에도 셰우첸코와 함께 투톱 조합으로 이름을 날렸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2회 받은 비어호프는 디 먄샤프트에서도 핵심선수로 활약했는데 UEFA 유로 1996 결승전에서 동점골을 득점했고 연장전에서는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골든골을 득점해 조국의 유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팀원들이 대부분 부진하는 와중에 분전하며 3골을 득점하며 분전했고 이 활약을 인정받아 1998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13위 호어스트 흐루베쉬

 

생년월일: 1951년 4월 17일
A매치 기록: 21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함부르크의 전성시대를 이끈 스트라이커로 헤딩에 특히 능해 헤딩 야수라 불렸으며 실제로 함부르크와 디 만샤프트에서 칼츠의 크로스와 흐루베쉬의 헤딩은 중요한 공격 루트로 자리 잡았을 정도로 당대에 유명세를 떨쳤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야수가 바나나를 먹으면 골이 터진다고 했을 정도로 강력한 콤비였다.

오랫동안 하부리그에서 활약하다가 28세의 늦은 나이로 함부르크에 입단해 활약한 대기만성형 선수였던 흐루베쉬가 함부르크에서 이룬 족적은 어마어마한데 분데스리가 우승 3회, 유리피언 컵에서도 두 번의 결승전에 진출해 1982-83 시즌에는 빅이어를 들었고, UEFA컵 결승 진출 1회를 이뤄냈으며 흐루베쉬 개인도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1980-81 시즌 포칼 득점왕, 그리고 1981-82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이뤄냈으며 옹즈 몽디알이 선정한 유럽 베스트에 2회 선정되는 활약을 보여줬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짧지만 굵은 활약을 보여준 흐루베쉬는 UEFA 유로 1980 결승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해 우승에 기여해 1980 발롱도르 투표에서 6위에 랭크되었고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뽑은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선발과 백업을 오가며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이뤄냈다.

 

12위 한스위르겐 크라이세

 


생년월일: 1947년 7월 19일
A매치 기록: 50경기 25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디나모 드레스덴

1960~70년대 동독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스타플레이어로 소위 판타지스타 스타일의 플레이어였는데 스피드는 다소 느렸지만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났음은 물론 심리전에 능해 상대 수비수를 드리블로 손쉽게 제쳤고 '우수한 골 게터이자 창조자'라는 말이 아쉽지 않게 득점력과 플레이메이킹 모두에 능했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판타지스타 유형의 선수들과는 다르게 헤딩으로 골문을 노리는 부분 역시 뛰어나 '황금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선수 생활의 전부를 디나모 드레스덴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이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크라이세는 DDR 오버리가 5회 우승 및 FDGB포칼 2회 우승을 이뤄내며 1970년대 동독 무대를 마그덴부르크와 함께 양분했고 크라이세 개인도 DDR오베리가 득점왕 4회 수상 및 1973년 동독 올해의 축구선수에 선정되었고 1970년과 1973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표를 받기도 했다.

동독 대표팀에서도 슈파르바서와 함께 에이스 중 한 명으로 활약한 크라이세는 1965 UEFA 청소년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서독을 격파하는데 공헌하며 8강 조별 리그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11위 클라우스 피셔

 


생년월일: 1949년 12월 27일
A매치 기록: 45경기 3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된 공격수로 영리한 위치선정과 페널티 박스에서의 감각적인 움직임과 정확한 슈팅을 보여주며 스트라이커로서의 기본기는 당연히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피셔는 독일 축구사를 대표하는 바이시클킥 스페셜리스트로 아예 별명이 미스터 바이시클킥이었을 정도로 바이시클킥에 능했다.

분데스리가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되었을 정도로 꾸준하게 득점력을 유지한 피셔는 샬케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1971-72 시즌 포칼 우승과 두 번의 분데스리가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냈고 특히 1975-76 시즌에는 29골을 득점하며 게르트 뮐러를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으며 1999년에 선정된 샬케의 세기의 일레븐과 명에의 주장에 선정되는 등 구단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이후 쾰른과 보훔에서도 쏠쏠하게 활약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게르트 뮐러 은퇴 이후에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예선에서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으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본선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이유로 UEFA 유로 1980에는 소집되지 못했으나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렸고 결국 1982 스페인 월드컵 2차 조별 리그에서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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