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21~30

국가의 영웅들/독일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21~30

토르난테 2025. 1. 2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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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독일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준일은 2025년 1월 28일입니다.

 


30위 페터 그로서

 


생년월일: 1938년 9월 28일
A매치 기록: 2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65kg
주 소속팀: 1860 뮌헨

분데스리가 초창기 독일 무대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 겸 인사이드 레프트로 기복이 다소 심하기는 했지만 높은 수준에 볼 컨트롤과 드리블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를 두명 쯤은 쉽게 제칠 수 있었으며 우수한 패싱력으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도 능했다.

오베리가 시절에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으나 바이에른 뮌헨이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출범 멤버로 활약하지 못하자 1860 뮌헨으로 떠난 그로서는 1860 뮌헨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1963-64 시즌 DFB포칼 우승, 1964-65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 및 1965-66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이때 독일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으나 볼프강 오베라트와 귄터 네처에 밀려 거의 활약하지 못했다.

말년에는 현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활약했는데 무려 213경기에 출전해 44골을 기록했고 1973-74 시즌 오스트리아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29위 피오트르 트로호프스키

 


생년월일: 1984년 3월 22일
A매치 기록: 35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2000년대 함부르크에서 활약한 2선 자원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와 좌우 윙어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고 키는 작았지만 유려한 드리블로 수비수들을 따돌린 뒤 중앙으로 킬패스를 찔러주며 찬스를 만들거나 강력한 양발 슈팅으로 직접 득점을 노렸다.

바이에른 뮌헨의 유스 출신이지만 2004-05 시즌 겨울이적시장에 함부르크로 이적한 트로호프스키는 라파엘 반 더 바르트. 메흐디 마다비키아와 함께 함부르크의 공격을 이끌며 2005-06 시즌 분데스리가 3위와 2007-08 시즌 분데스리가 4위라는 성적을 기록하는데 공헌했고 유럽 무대에서도 인터토토컵 2회 우승 및 2008-09 시즌 UEFA컵 4강 진출을 이뤄내며 함부르크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고 세비애에서도 2013-14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종종 소집되어 활약한 트로호프스키는 비록 토마스 뮐러, 루카스 포돌스키, 메수트 외질 등의 뛰어난 플레이어들에게 밀려 주전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백업으로 UEFA 유로 2008 준우승 및 2010 남아공 월드컵 3위라는 성적을 경험했다.

 

28위 베르너 크레머

 


생년월일: 1940년 1월 23일
A매치 기록: 13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MSV 뒤스부르크

1960년대 상반기 독일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다재다능함 2선 자원으로 좌우 측면과 인사이드 포워드를 소화했는데 피지컬은 약했지만 뛰어난 테크닉과 우수한 볼 컨트롤, 그리고 빠른 스피드와 날카로운 크로스는 물론 중앙으로 찔러주는 쓰루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데 능했다.

뒤스부르크의 구단명이 마이데리허였던 시절부터 데뷔해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린 크레머는 비록 팀 성적이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출범 시즌부터 쭉 팀을 분데스리가에 잔류시켰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연속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때 디 만샤프트에서도 소집되어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 참가해 로테이션 멤버로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다.

함부르크를 거쳐 보훔에서도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팀을 분데스리가로 승격시킨데 공헌한 크레머는 서독 대표팀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재능 있는 독일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유했지만 불성실하고 음주를 즐겼기에 기복이 심했기에 가진 재능을 다 만개하지는 못했던 게으른 천재로도 유명했다.

 

27위 율리안 브란트

 


생년월일: 1996년 5월 2일
A매치 기록: 48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0년대 중후반~20년대 초반에 분데스리가에서 이름을 날렸던 다재다능한 2선 자원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와 좌우 측면 공격수, 그리고 중앙 미드필더와 폴스 나인 역할까지 막힘없이 소화했으며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유려한 퍼스트터치와 정확한 패싱력, 더해서 우수한 전술안까지 겸비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러운 연계플레이로 이름이 높았으며 측면에서 플레이하는 상황에서는 정확한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기도 했다.

볼프스부르크 유스팀을 거쳐 레버쿠젠에서 성인 무대에 데뷔한 브란트는 2015-16 시즌에 DFB포칼 도움왕에 올랐고 2018-19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포함되었다.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뒤에도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적응을 마친 이후에는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2020-21 시즌 DFB포칼 우승을 시작으로 2022-23 시즌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선정 및 2023-24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2013년에는 프리츠 발터 메달 U-17 은메달을, 2014년에는 프리츠 발터 U-18 금메달을 수상하며 리로이 사네와 함께 1996년생 선두주자로 명성을 떨쳤던 브란트는 2014년에 열린 UEFA U-19 챔피언십 우승 및 2016 리우 올림픽에서는 남자 축구 종목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 도움왕에 올랐고 성인 대표팀 첫 대회인 2017 컨페드컵에서도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2018 러시아 월드컵부터 시작된 암흑기에도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6위 율리안 드락슬러

 


생년월일: 1993년 9월 20일
A매치 기록: 58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도르트문트의 천재 마리오 괴체에 대한 샬케의 대답으로 평가받았던 2010년대 독일 축구계의 기대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선수치고 패싱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창의적이면서 호쾌한 드리블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라인을 흔들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써 양발 모두를 활용한 중거리 슈팅으로 꽤 많은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샬케에서 데뷔해 고레츠카, 막스 마이어와 함께 로얄 블루스의 3대 기대주로 불렸고 실제로도 가장 앞서나가는 활약상을 선보였는데 2010-11 시즌 중간에 데뷔해 팀의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이뤄냈고 DFB포칼 결승전에서는 MSV 뒤스부르크를 상대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5-0 승리에 기여하고 DFB 포칼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이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샬케를 분데스리가 상위권에 올리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2013-14 시즌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선정 및 분데스리가 올해의 영플레이어 상을 수상했다. 이후 4500만 유로의 이적료로 볼프스부르크로 떠났다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해 리그앙과 쿠프 드 프랑스 4회 우승 및 쿠프 드 라리가 3회 우승을 기록했고 2019-20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청소년 시절인 2011년에 이미 프리츠 발터 메달 U-18 금메달을 수상한 드락슬러는 2012년에 처음 성인 대표팀에 데뷔해 백업 멤버로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고 UEFA 유로 2016에서도 4강 진출에 공헌했다. 그리고 2017 컨페드컵에서는 기존 주전들이 대거 빠지고 신예들이 출전했는데 그 구심점으로 팀을 이끌며 대회 우승 및 골든볼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독일의 암흑기의 휘말려 좋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25위 디터 에를러

 


생년월일: 1939년 5월 28일
A매치 기록: 47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FC 카를마르크스슈타트

1960년대 동독 축구를 대표하는 인사이드 포워드 겸 플레이메이커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를 지도했던 소스 카로이는 그를 두고 "에를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창조성과 기술, 득점력, 교활함, 그리고 터프함 모두 말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 전 유럽을 통틀어서 에를러보다 확실히 더 뛰어난 선수들은 몇 명 없었다고 자부한다."라고 평가했다.

오늘날의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인 SC 비스무트 카를마르크스슈타트에서 데뷔해 첫 전성기를 누리며 1959 오베리가 우승을 이뤄낸 에를러는 오늘날의 켐니츠 FC인 FC 카를마르크스슈타트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1966-67 시즌 오베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이를 인정받아 1967년 동독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했다.

동독 연령별 대표팀부터 핵심으로 활약했고 1959년부터는 동독 성인 대표팀에서 활약한 에를러는 소스 카로이 체제에서는 핵심으로 활약했으나 1968년 2월 2일 산티아고에서 열린 남미 투어에서 파울로 인해 그는 심판에 의해 퇴장당했고 당시 대표팀 감독인 하랄드 시거는 그를 주정해서 경질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항의로 대표팀 소집을 거부했기에 영구적으로 대표팀에 뽑힐 수 없게 되었다.

 

24위 다리우스 보시

 


생년월일: 1969년 6월 8일
A매치 기록: 24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VfL 보훔

1990년대 중후반에 독일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화려한 테크닉과 실속 넘치는 패스로 상대 수비수를 흔들며 아군의 골 찬스를 만들어주는 부분에 능했던 테크니션이었는데 팀 플레이에도 뛰어났지만 특히 화려한 플립 플랩과 절묘한 턴 동작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를 완벽하게 바보로 만드는 플레이에 능했다.

동독의 할레셔에서 데뷔해 활약하다가 독일이 통일되자 VfB 보훔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렸는데 1993-94 시즌 2.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1996-97 시즌에는 강등 유력 후보로 뽑히는 팀을 분데스리가 5위에 올리며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및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헤르타 BSC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1998-99 시즌 분데스리가 3위 및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워 2000년대 상반기 구단의 황금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말년에는 보훔으로 돌아가서 활약했는데 그의 활약 덕에 여러 번 강등 위기를 넘긴 보훔은 'Die Unabsteigbaren' 즉 생존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망주 시절에 이미 동독 A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보시는 통일 독일 이후에는 토마스 헤슬러와 안드레아스 묄러, 그리고 토마스 돌의 아성에 밀려 소집되지 못하다가 1997년 이후로 다시 소집되었는데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및 UEFA 유로 2000에서 대표팀 멤버로 활약했으나 팀의 암흑기라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23위 만프레트 부르그스뮐러

 


생년월일: 1949년 12월 22일
A매치 기록: 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70~80년대 분데스리가 최전성기 시절에 이름을 날렸던 다재다능한 공격 자원으로 패싱력은 다소 평범했지만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우수한 움직임과 준수한 스피드, 그리고 적절한 위치로 침투한 뒤에 정밀도 높은 슈팅을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뽐냈다.

분데스리가 개인 통산 득점 5위를 기록하며 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만프레트 부르그스뮐러는 로트바이스 에센에서 데뷔해 바이어 위어딩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베르더 브레멘에서 모두 리그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존재감을 뽐냈는데 특히 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1979-80 시즌 DFB포칼 득점왕과 1980-81 시즌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브레멘에서는 1987-88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및 DFB포칼 2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독일 대표팀에서는 중용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포지션 경쟁자들이 매우 쟁쟁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귄터 네처와 볼프강 오베라트가 물러난 뒤에도 로타어 마테우스, 하인츠 플로에, 에리히 비어, 펠릭스 마가트가 건재했던 당시의 서독 대표팀은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의 기회는 없었다.

 

22위 우베 란

 


생년월일: 1962년 5월 21일
A매치 기록: 14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84cm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0년대 하반기에 천재 유망주로 통했던 분데스리가 정상급 미들라이커로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활약했지만 플레이메이킹보다는 강력한 하드웨어를 이용한 전방 압박과 동료들과 연계하며 기습적으로 1선 침투에 이은 슈팅을 바탕으로 득점원으로서 더 강점을 드러냈다.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성인 무대에 데뷔한 우베 란은 1983-84 시즌 리그 우승과 DFB포칼 우승을 동시에 노렸지만 전자는 골 득실차로 아쉽게 실패했으며 후자는 결승전에서 패해 실패했다. 그럼에도 우베 란 개인의 활약은 세간으로부터 인정받았기에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 연속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에 선정되었고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1986-87 시즌에는 득점왕에 올랐음은 물론 1987 서독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며 계속 우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분데스리가 정상급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이때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4회 선정되었다.

이 시기 독일 대표팀에서도 청소년 시절부터 소집된 우베 란은 1984 LA 올림픽과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백업에 머물렀고 쾰른 이적을 기점으로 토마스 헤슬러와의 주전 경쟁에서 패해 몰락했고 헤르타 BSC,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그리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부활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21위 위르겐 포메란케

 


생년월일: 1953년 1월 22일
A매치 기록: 53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47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마그데부르크

1970년대 상반기 동독 축구계의 초신성으로 평가받았던 초특급 유망주로 그의 은사 하인츠 크루겔에 따르면 "축구선수로서 뛰어난 테크닉과 모범적인 태도에 대한 전망을 갖춘 우수한 테크니션입니다. 그는 유럽 최고의 클럽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선수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실제로도 뛰어난 테크닉과 패싱력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플레이메이커였다.

마그데부르크에서 데뷔해 선수생활 전부를 보낸 원 클럽맨이었던 포메란케는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동독 오베리가 3회 우승 및 FDGB컵 4회 우승을 이뤄냈고 1973-7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과정에서 4강 2차전 스포르팅 리스본과의 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득점해 2-1 승리를 이끌었고 결승에서도 AC 밀란의 지안니 리베라를 압도했고 1975년에는 동독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최연소 수상이었다.

약관의 나이인 1972년에 동독 대표팀에 소집된 포메란케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서독전 승리 및 조국의 8강행을 이끌며 동독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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