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5

국가의 영웅들/헝가리

헝가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5

토르난테 2024. 12. 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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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헝가리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4년 12월 15일 기준입니다.

 


15위 키시 러슬로

 


생년월일: 1956년 3월 12일
A매치 기록: 33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83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버셔시 SC


1980년대 헝가리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스트라이커로 빠른 스피드와 상대 수비수의 견제를 따돌리는 유려한 턴, 그리고 원샷원킬의 슈팅력을 바탕으로 많은 득점을 이뤄냈으며 드리블도 준수해 윙포워드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페치 MFC에서 데뷔해 버셔시에서 전성기를 누린 키시는 비록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1981년 마자르 쿠파 우승 및 1982-83 시즌에는 미트로파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도 활약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인 키시는 1982 스페인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노르웨이를 상대로 득점하며 본선행에 공헌했고 본선에서도 조별리그에서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교체로 투입된 지 7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역사상 첫 교체선수 해트트릭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4위 에스테르하지 마르톤

 


생년월일: 1956년 4월 9일
A매치 기록: 29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1980년대 헝가리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스트라이커로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원터치 플레이와 박스 안에서 마치 여우와 같은 움직임으로 일대일 찬스에서 강점을 보였던 공격수였으며 스피드 및 슈팅 기술과 제공권 경합 부분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초년에는 자리를 잡지 못해 여러 팀을 떠돌다가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정착해 전성기를 누린 에스테르하지는 혼베드 제2의 전성기를 이끌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리스의 AEK 아테네에서도 토마스 마브로스, 호칸 샌드베리와 함께 마법의 삼중주라 불리는 공격 편대를 구성하며 그리스 무대를 맹폭했으며 UEFA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득점하기도 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활약한 에스테르하지는 1986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에 큰 공을 세웠고 본선에서도 캐나다를 상대로 선제골을 득점했다. 은퇴한 뒤에는 동생 에스테르하지 페테르를 따라 작가의 길을 걸었으며 축구 행정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13위 살라기 줄러

 


생년월일: 1923년 1월 18일
A매치 기록:12경기 9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버셔시 SC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헝가리 무대에서 엄청난 득점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스트라이커로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현대적인 플레이를 갖춘 센터 포워드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양발과 머리를 모두 잘 활용했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적절한 판단력 및 적재적소의 패스센스를 바탕으로 한 연계에도 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데브레첸에서 활약하다가 버셔시 SC로 이적해 두각을 나타낸 실라기는 1955년 마자르 쿠파 우승 및 1957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 및 득점왕에 올랐으며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및 미트로파컵 2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실라기 개인도 버셔시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랐으며 비공식전을 포함해 919경기에 출전해 1114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는 푸스카시 페렌츠, 코츠시스 샨도르, 데아크 페렌츠, 히데구티 난도르 등과의 경쟁으로 많이 나오지 못했으나 1950년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적은 기회에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냈음에도 세베스 구스타브 감독의 외면을 받아 매직 마자르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12위 마초시 페렌츠

 


생년월일: 1932년 6월 30일
A매치 기록: 29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버셔시 SC


소위 '매직 마자르'라 불리던 황금세대 이후 세대의 선두주자 격의 스트라이커로 체구가 작은 탓에 몸싸움은 약했지만 재빠른 스피드와 유려한 볼 컨트롤을 활용한 드리블과 원터치 플레이에 강점을 보였으며 특히 직계 선배 푸스카스 못지않은 강력한 슈팅으로 유명했다.

광부 팀이었던 터터바녀에서 데뷔해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마초시는 1955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팀 동료 치보르 졸탄과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으며 버셔시로 이적한 뒤에는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 및 미트로파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소집되었으나 벤치에만 머물렀다가 푸스카스와 코츠시슈가 스페인으로 떠난 뒤에는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중용된 마초시는 1955년 9월 17일에 열린 중유럽컵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 멀티골을 기록했으나 정작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

 


11위 퇴뢰치크 안드라스

 


생년월일: 1955년 5월 1일
A매치 기록: 45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우이페슈트 도사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헝가리 축구계 최고의 포워드 중 한 명으로 스트라이커, 세컨드 스트라이커 및 좌우 윙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으며 유려한 볼 컨트롤과 기민한 몸놀림, 그리고 엄청난 가속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문전 앞에서 침착한 슈팅으로 마무리에도 능했음은 물론 다른 공격수들의 득점 찬스를 제공하는 이타적인 플레이에도 능했다.

우이페슈트 도사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누린 퇴뢰치크는 황금기 막바지에 데뷔해 넴제티 버이녹샤그와 마자르 쿠파에서 각각 3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1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1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도 잠시 활약했다. 나름대로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지만 큰 부상을 두 번이나 당해 잠재력을 다 펼치지는 못했다고 평가받았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퇴뢰치크는 UEFA 유로 1972 이후로 암흑기를 겪었던 대표팀을 이끈 퇴뢰치크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조국을 본선 무대에 올려놓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편파 판정의 희생양으로 퇴장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10위 퍼르커시 야노시

 


생년월일: 1942년 3월 27일
A매치 기록: 33경기 20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버셔시 SC


1960년대 헝가리 축구를 대표하던 양발잡이 공격수로 우수한 테크닉으로 상대를 홀리는 드리블과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로 슈팅과 패스 양면에 모두 능했음은 물론 빠른 스피드와 문전 앞에서의 침착함, 그리고 상대의 예측을 불허하는 창의적인 킬러패스 역시 겸비한 천재적인 공격수였다.

잠시 페렌츠바로시로 임대를 떠난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 전부를 버셔시에서만 보낸 퍼르커시는 넴제티 버이녹샤그 4회 우승 및 마자르 쿠파 3회 우승을 이뤄냈고 1962-63 시즌에는 인터시티 페어스컵 4강에 올랐다. 그리고 퍼르커시 개인도 1966년에는 정규리그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966년 9위, 1967년 10위에 랭크되었고 월드 사커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도 2회 선정되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퍼르커스는 1960 UEFA U-19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베네 페렌츠, 플로리언 알베르트 등과 함께 공격조합을 구성해 1962 칠레 월드컵 8강 및 UEFA 유로 1964 3위 및 1964 도쿄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성과를 이뤄냈고 1966년 월드컵에서는 월드컵 2연패를 이뤄낸 브라질을 상대로 세기의 골이라 불리는 골을 득점시키며 8강을 이뤄냈다.

 


9위 수서 페렌츠

 


생년월일: 1923년 12월 1일
A매치 기록: 24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우이페슈트 도사


1940~50년대 헝가리 축구 황금기에 활약했던 스트라이커로 이름이 같은 데아크 페렌츠와 유사하게 엄청난 득점력으로 유명했는데 양발과 머리를 모두 활용해 득점했는데 적어도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전해진다.

선수 생활 전부를 우이페슈트 도사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이자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인 수서 페렌츠는 21년간 우에페슈티에서 군림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4회 우승을 이뤄냈고 수서 개인도 정규리그에서만 393골을 기록했으며 친선전까지 포함하면 1008경기에 출전해 1132골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1947년 헝가리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한 수서는 대표팀에서는 세베슈 구스타브 데뷔 이전에는 주축으로 활약하며 1947년 발칸컵 우승 및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으나 세베슈 구스타브가 지휘봉을 잡은 이후에는 코츠시스 산도르에게 주전자리를 내줬다가 결국 백업에서도 밀려났다.

 


8위 파타키 미할리

 


생년월일: 1893년 12월 7일
A매치 기록: 24경기 21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10~20년대 헝가리 무대를 풍미한 왼발잡이 센터포워드로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볼 컨트롤과 유려한 몸놀림, 그리고 매우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왼발 슈팅과 타점 높은 헤더를 바탕으로 마무리에도 강점을 보였다. 게다가 득점과 기술만 우수한 게 아니라 전술안도 우수해 합리적인 팀 플레이에도 강점을 보였다.

페렌츠바로시에서 데뷔해 데뷔 시즌부터 1912-13 시즌까지 넴제티 버이녹샤그 3연패를 이뤄냈으며 이후 지미 호건 체제의 MTK 헝가리아의 독주 속에서도 페렌츠바로시와의 의리를 지켜 팀을 지탱했으며 MTK의 사이클링이 끝난 말년에도 넴제티 버이녹샤그 2회 우승을 추가해 5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마자르 쿠파 3회 우승도 이뤄냈으며 파타키 개인도 1926년 헝가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쉬로서 임레, 토스포티야 이스트반 등과 함께 주축으로 활약한 파타키는 러시아 제국과의 친선경기에서 4골을 몰아넣는 등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1912 스톡홀롬 올림픽에서도 주전으로 참가했으나 영국을 만나는 최악의 대진운으로 탈락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것에 대해 "매 순간, 매 경기를 녹백 유니폼을 입고 보냈지만 국가대표팀과의 만남을 앞둔 순간은 아직도 벅차게 기억난다. 나는 애국가를 들으면 늘 눈물을 흘렸는데 부모님은 저를 무한한 애국심으로 키우셨고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이상은 우리 가족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라고 술회했다.

 

 

7위 투러이 요제프

 


생년월일: 1905년 3월 1일
A매치 기록: 48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20년대 후반~30년대 헝가리 축구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스트라이커 겸 하프백으로 초년에는 정확한 위치선정과 우수한 양발 슈팅 및 헤더를 활용한 득점력과 우수한 패싱력으로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에도 능했던 다뉴브 스타일의 공격수였으며 센터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에는 공격수 시절의 경험을 이용한 우수한 심리전과 헌신적인 수비력으로 상대를 막았으며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을 하며 아군 공격수들을 지원했다.

페렌츠바로시에서 데뷔해 퍼터키 미하이의 후계자로 활약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I 3회 우승 및 마자르 쿠파 3회 우승, 그리고 1928년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1-32 시즌에는 리그 전승 우승을 이끌며 본인도 헝가리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MTK 헝가리아 이적 이후에는 센터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1935-36 시즌과 1936-37 시즌에 넴제티 버이녹샤그 2연패를 기록하며 헝가리 무대 최고의 센터하프로 군림했다.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끈 뒤에는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소집된 투러이는 공격수 시절에는 큰 대회에서의 활약은 저조하지만 그래도 분더팀이라 불리던 오스트라이를 상대로 멀티골을 터트리며 3-2로 승리하는데 기여했으며 센터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에는 주전자리를 차지하며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공헌했고 안슐루스로 중간에 취소된 중유럽컵에서도 샤로시 죄르지를 보좌하며 1위를 달리는데 기여했다.

 

 

6위 아바르 이스테반

 


생년월일: 1905년 5월 28일
A매치 기록: 21경기 24골 (루마니아 시절 기록 제외)
신체조건: 키 176cm
주 소속팀: 우이페슈트 도사


루마니아 출신이었으나 헝가리로 귀화해 전성기를 누린 센터포워드로 강력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엄청난 완력과 경이로운 폭발력에서 나오는 순간속도를 겨비해음은 물론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수와 저돌적으로 경합해 "위험하게 산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초년에는 루마니아에서 활약하다가 헝가리로 귀화한 뒤에 우이페슈트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린 아바르는 1929년 즁유럽의 챔피언스리그인 미트로파컵에서 스파르타 프라하, 라피트 빈, 그리고 결승전에서 만난 슬라비아 프라하를 모두 쓰러트리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특히 결승전 1차전과 2차전에 모두 골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총 10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이후에는 넴제티 버이녹샤그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우이페슈트를 헝가리 무대의 명문으로 성장시켰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두 번의 중유럽컵과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 아바르는 특히 1931-32 시즌 중유럽컵에서는 득점왕에 올랐고 1936년에 다시 루마니아의 라피트 부쿠레슈티로 이적해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쿠파 로마니에이 4회 우승을 이뤄냈고 1939-40 시즌에는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5위 티치 러요시

 


생년월일: 1935년 3월 21일
A매치 기록:72경기 51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푸스카스 세대 이후 헝가리 축구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국가의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공격수로 왼발, 오른발,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득점할 수 있었으며 테크닉도 준수해 스스로의 힘으로 상대 수비를 뚫어내며 최적의 슈팅 각도를 만들어냈다.

선수생활 전부를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보낸 원 클럽맨 티치는 푸스카스의 후계자로 넴제티 버이녹샤그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59년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4년에는 마자르 쿠파 우승을 이뤄냈다. 티치 개인도 넴제티 버이녹샤그 5회 연속 득점왕을 수상했고 1959년 미트로파컵에서도 득점왕에 올랐는데 히 친선 경기에서도 맹폭을 하기로 유명해 1959-60 시즌에는 공식전과 친선전을 포함해 86경기에 출전해 201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푸스카시와 코치슈의 후계자로 활약한 티치는 1 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866 잉글랜드 월드컵까지 3회 연속 참가해 1962 칠레 월드컵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진출을 이뤄냈고 UEFA 유로 1964에서는 팀의 주장으로 조국이 3위에 오르는데 공헌했다. 여담으로 라요스 티치는 친선 경기를 포함하면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득점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는데 1307경기에 출전해 1917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4위 샤퍼 알프레드

 


생년월일: 1893년 2월 13일
A매치 기록: 15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95kg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1910년대 하반기부터 192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거구의 센터포워드로 특유의 신체구조 때문에 지구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최전방에서 대기하다가도 자신에게 볼이 오면 대단한 폭발력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침투해 득점을 만들어내며 득점효율의 극한을 보여줘 세간에서는 '축구의 왕'으로 수식되었다.

MTK 헝가리아 왕조의 기틀을 세운 센터 포워드 샤퍼는 쉬로서 임레, 오르트 죄르지, 콘라트 칼만 등과 함께 활약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샤퍼개인도 1917-18 시즌 42골, 1918-19 시즌 41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2회 수상했는데 샤퍼가 머무르는 동안 MTK 헝가리아는 리그 66경기에서 60승 4무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샤퍼는 그중 14경기를 오스트리아와 경기했는데 전적은 14전 10승 2무 2패 16골을 기록했다. 말년에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다뉴브식 축구를 전파했는데 1920-21 시즌 남부 독일 챔피언십과 독일 챔피언십 더블을 이뤄내는데 공헌해 뉘른베르크 왕조를 열었고 1923-24 시즌에는 비너 아마추어 SV를 오스트리아 챔피언으로 올렸고 컵대회 2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25-26 시즌에는 스파르타 프라하의 정규리그 우승을 도우며 총 4개 국가에서 리그 우승을 이뤄낸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3위 타카시 요제프

 


생년월일: 1904년 6월 30일
A매치 기록: 32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유럽 정상급 센터 포워드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키가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엄청난 점프력을 바탕으로 기가 막힌 헤더를 선보였으며 유려한 볼 컨트롤과 대포알과 같은 오른발 슈팅으로 무수하게 많은 득점포를 기록해 명성을 날렸다.

유소년 시절에는 골키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첫 소속팀인 버셔시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옮긴 타카시는 중견팀 버셔시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1925년 헝가리 올해의 축구선수에 선정되었고 페렌츠바로시에서는 전성기를 누리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고 타카시 개인도 득점왕을 5회 수상했는데 특히 1931-32 시즌에는 페렌츠바로시의 정규리그 전승 우승을 이끌었고 타카시 개인도 리그에서만 42골을 득점하며 커리어 하이를 세웠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올라선 타카시는 1927년 프랑스와의 친선전에서 혼자 6골을 득점하며 13-1 대승을 이끌었고 1929년 중유럽컵에서는 강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멀티골을 터트리며 무승부를 이뤄냈다. 타카시 요제프는 친선과 공식전, 클럽과 대표팀 경기를 모두 합쳐 통산 528경기에 출전해 542골을 득점했다.

 


2위 데아크 페렌츠

 


생년월일: 1922년 1월 16일
A매치 기록: 20경기 29골
신체조건: 키 174cm
주 소속팀: 센틀뢰린치 AC

 

1940년대 최고의 페널티박스의 포처로 뛰어난 위치 선정과 정확한 슈팅으로 순수하게 득점에 치중하는 공격수였으며 요제프 비칸이나 게르트 뮐러,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못지않았던 득점력을 자랑했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측정 기준 개인 통산 793골을 기록한 데아크는 센틀뢰린치에서 활약하던 1945-46 시즌에는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는데 무려 66골을 득점하며 단일 시즌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고 1947년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한 뒤에도 1948-49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끌었고 83경기에 나서 121골을 기록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웠고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A매치 경기수보다 A매치 득점수가 더 많았던 데아크는 중유럽컵에서는 세베슈 감독의 철학과 맞지 않아 중도에 하차했음에도 10골로 푸스카스에 이어 득점 2위를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성향떄문에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물론 인생에서도 갖은 수난을 당했는데 정부의 이적 명령에 불복했다가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혀 체포당했으며 가족이 협박을 당함에 따라 비밀경찰팀 소속의 우이페슈티로 강제로 이적당하는 비운을 겪었는데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106경기에 나서 108골을 기록하며 1경기당 1골 이상을 유지해던 비운의 천재였다.

 


1위 코츠시스 산도르

 


생년월일: 1929년 9월 21일
A매치 기록: 68경기 75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195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 선수로 우수한 득점력 및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유려한 연계플레이를 겸비했음은 물론 특히 헤더를 활용해 득점하는 부분에서는 축구사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아 황금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소규모 구단 코비나이에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해 1948-49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은 코츠시스는 헝가리 공군의 이적요청을 받아들여 공군 산하의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이적해 푸스카스, 치보르, 부다이 등과 호흡을 맞춰 활약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코츠시스 개인도 정규리그 득점왕을 3회 수상했다.

'매직 마자르'라고 불린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코치슈는 푸스카스, 히데구티와 함께 절륜한 호흡을 자랑했는데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및 1953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에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며 매직 마자르의 시대를 열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평받았다. 특히 코치슈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5경기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석권했고 실질적인 대회 MVP로 평가받았는데 이 활약으로 1954 헝가리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 공산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난 코치슈는 같은 헝가리 출신의 쿠발라 라슬로의 지원으로 바르셀로나에 입단해 활약하며 라리가 2연패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진출을 이뤄냈으나 벤피카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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