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70~6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Total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70~61위

토르난테 2024. 10. 27. 13:19
728x90
728x90

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70위 드라간 자이치

 


생년월일: 1946년 5월 30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츠르베나 즈베즈다

유고슬라비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로 상대 수비진을 장판파의 조자룡처럼 휘저었으며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슈팅은 물론 크로스도 우수해 20세기 최고의 왼발 크로서로 평가받앆고 여기에 수비 가담까지 완벽하게 하며 시대마저 앞서 나간 불세출의 윙어였기에 매직 드라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츠르베나 즈베즈다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이자 최다 득점자인 자이치는 리그 5회 우승과 유고슬라비아 컵 4회 우승, 그리고 1968년 미트로파 컵 우승을 이뤄냈고 자이치 개인도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7회 선정되었으며 1968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3위에 올랐고 196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올해의 스포츠 선수상을 수상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던 자이치는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며 토너먼트에 진출한 네 팀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았던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이끌어 준우승을 차지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조국의 8강2차 조별리그 진출에 큰 공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자이르를 9-0으로 대파하기도 했다. UEFA 유로 1976에서도 준결승에 오르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특히 1968년에 자이치가 보여준 활약은 거장들로부터 크게 호평받았는데 역대 최고의 공격수 펠레는 그에 대해 "자이치는 발칸 반도가 낳은 기적입니다. 진정한 마법사죠. 그가 브라질리안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는 제가 이제껏 보아온 선수 중 가장 자연스럽게 축구하는 사나이예요."라고 평가했으며 역대 최고의 수비수 베켄바우어는 "1968년 발롱도르는 누가 뭐래도 드라간 자이치의 것이었습니다. 조지에게는 미안하지만, 1968년은 자이치의 해였어요. 그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줬죠."라고 말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69위 프랑크 리베리

 


생년월일: 1983년 4월 7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바이에른 뮌헨이 자랑했던 측면 라인인 로베리 라인의 일원으로 창의적인 패싱 센스에서 나오는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찬스 메이킹 능력은 물론 감각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진을 단숨에 붕괴시키는데 능했으며 피치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줘 분데스리가의 왕이라 불렸다.

올림피크 마르세유에서 2005-06 시즌 리그앙 올해의 영 플레이어상을 수상하며 올해의 팀에 들었으며 발롱도르 13위에 올라 이름을 알려 두각을 나타낸 리베리는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구단을 암흑기의 수렁에서 꺼내는데 성공해 2012-13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분데스리가 9회 우승, DFB 포칼 6회 우승, 그리고 2012-13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 이어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이뤄내며 트레블을 달성했고 이어서 슈퍼컵과 클럽월드컵도 제페했다.

레 블뢰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만큼의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지단, 앙리와 함께 프랑스의 공격을 이끌며 늙은 수탉이라 조롱받던 프랑스를 월드컵 결승에 올려놓았으며 2014년 명예 회복의 기회를 잡았으나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 때문에 대표팀에서 하차했고 이후 대표팀을 은퇴했다.

리베리는 바이에른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개인상을 휩쓸었는데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으며 ESM 올해의 팀에도 2회 선정되었고 특히 트레블을 이뤄냈던 2012-13 시즌에는 발롱도르 유력 후보에 올랐으며 실제로 기존 방식인 기자단 투표에서는 1위를 했으나 재투표로 인해 억울하게 피파 발롱도르  3위에 그쳤다.

 

 

68위 줄리뉴

 


생년월일: 1929년 7월 29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50년대 세계 최고의 라이트윙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가린샤가 대두하기 이전 최고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활약했는데 브라질리언답게 훌륭한 드리블과 개인기 스킬을 활용한 날카로운 컷인 플레이는 물론 크로스로 공격을 지원하는 능력도 당대 최고였다,

포르투게사에서 성장한 줄리뉴는 유럽의 피오렌티나에서는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 및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파우메이라스에서도 펠레와 라이벌리를 구성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0 시즌 전국리그에서도 펠레의 산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셀레상에서의 활약은 1953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과 1954 스위스 월드컵 8강으로 다소 아쉬웠으나 클럽에서의 활약이 너무나도 대단해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음은 물론 세 시즌만 활약한 피오렌티나에서도 1996년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는 위엄을 보였다.

 

 

67위 미카엘 라우드루프

 


생년월일: 1964년 6월 15일
국적: 덴마크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90년대를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갖춰야 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었으며 특히 상대 수비의 예측을 비웃는 창의적인 킬패스로 찬스를 만들고 팬텀 드리블을 구사해 상대 수비진을 무너트리며 팬텀 드리블을 유행시킨 부분으로도 유명하다..

유벤투스와 라치오 바르셀로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라우드루프는 비안코네리 군단에서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크루이프의 드림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라리가 4연패와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그리고 1991-92 시즌 마지막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크루이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자유계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친정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본인의 다짐대로 크루이프에게 복수에 성공했다.

덴마크 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라우드루프는 UEFA 유로 1984부터 1998 프랑스 월드컵까지 예선을 통과한 모든 대회를 참가했으나 하필이면 딱 UEFA 유로 1992만 감독과의 불화로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대회에서 덴마크가 우승했다. 그래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라우드롭은 노익장을 보여주며 덴마크를 8강에 올리며 올스타 팀에 들었다.

1982년과 1985년에 덴마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4-95 시즌에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라우드루프는 2004년에 UEFA 주빌리 어워드에 선정되며 덴마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66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생년월일: 1966년 2월 8일
국적: 불가리아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자타공인 불가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화려한 볼 컨트롤 능력과 뛰어난 왼발 슈팅력은 물론 우수한 공간 활용 능력을 통해 수많은 득점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던 공격수였다.

CSKA 소피아와 FC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낸 스토이치코프는 CSKA 소피아에서는 불가리아 리그 3회 우승과 불가리안 컵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리그 득점왕에 2회 올랐고 바르셀로나에서는 드림팀 1기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라리가 4연패를 포함해 5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1-92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1996-97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과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내는 등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면 불가리아 축구에서는 아예 역사를 새로 쓰는 활약을 보여줬던 스토이치코프는 항상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던 불가리아를 데리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는 활약을 했다. 스토이치코프 개인은 득점왕에 올랐으며 준결승에 오르는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멕시코, 독일을 모조리 이기고 올라왔는데 특히 아르헨티나와 독일은 각각 지난 월드컵 준우승팀과 우승팀이었다. 이 대화에서의 활약으로 스토이치코프는 대회 골든슈와 브론즈볼, 그리고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연말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발롱도르 수상 이외에도 스토이치코프는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불가리아 올해의 선수 5회 수상, 1992년 옹즈도르 1위 수상을 이뤄냈으며 은퇴 뒤인 2004년에는 UEFA 주빌리 어워드에 선정되며 불가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65위 마리오 켐페스

 


생년월일: 1954년 7월 1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발렌시아 CF

1970년대 하반기 남미 최고의 공격수로 투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저돌적인 드리블, 그리고 뛰어난 찬스 메이킹과 득점력을 모두 겸비한 미래형 공격수였다.

로사리오 센트랄에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에 2회 올랐던 켐페스는 발렌시아로 떠나 라리가 득점왕 2회 수상 및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으며 1978-79 코파 델 레이 우승과 1979-80 컵 위너스컵 우승과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루는데 공헌했고 남미로 돌아가서는 리버 플레이트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에 공헌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활약은 더 빛났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6골 2도움, 그리고 18회의 찬스 메이킹과 43번의 드리블 성공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며 팀의 우승에 이끌며 득점왕과 골든볼까지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판정 시비로 비판받았지만 그 누구도 켐페스의 훌륭한 활약만큼은 부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존중받았으며 그 해의 활약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는 물론 남미 올해의 선수와 옹즈도르, 그리고 훗날 선정한 명예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

 

 

64위 티에리 앙리

 


생년월일: 1977년 8월 17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아스날 FC

2000년대를 수놓은 4대 스트라이커로 통하며 재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힘을 겸비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휘저으며 빈 공간을 침투해 뛰어난 슈팅 스킬로 수많은 골을 기록했으며 동료들을 이용한 플레이에도 능해 수많은 찬스 메이킹을 기록하기도 했다.

AS 모나코에서 1996-97 시즌 리그앙 올해의 영플레이어를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낸 티에리 앙리는 유벤투스에서 실패하며 잊혀진 유망주가 되나 싶었지만 뱅거 체제의 아스날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2003-04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암흑기를 겪으며 몰락하나 싶었지만 펩 체제에서 다시 부활에 성공해 전설적인 6관왕을 이뤄내며 아쉬움을 해소했다.

뱅거가 스스로 자신이 가르쳤던 선수 중 최고로 평가했던 티에리 앙리는 클럽에서의 개인 커리어도 착실하게 잘 쌓았는데 PFA 올해의 팀에 6회 선정되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4회, FWA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으며 유러피언 골든슈와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각각 2회 수상했고 프랑스 올해의 선수에 5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0위 안에 7회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20골 20도움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기에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일조한 티에리 앙리는 아스날 이적 이후에는 주전으로 도약해 UEFA 유로 2000 우승과 2006 독일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황금기를 누렸다. 지단도 그를 두고 "티에리는 프랑스가 낳았던 위대한 선수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1998 월드컵에서 그를 만난 이래로 그가 특별한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티에리 앙리는 위대한 커리어를 가졌고, 축구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63위 군나르 노르달

 


생년월일: 1921년 10월 19일
국적: 스웨덴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AC 밀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최고의 중앙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188cm에 90kg에 달하는 엄청난 피지컬에서 나오는 강력한 몸싸움 능력과 벼락같은 슈팅력으로 상대 골키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스웨덴 시절 IFK 노르셰핑에서 알스베스칸 4연패를 이뤄냈고 알스베스칸 득점왕을 4회 수상한 노르달은 스웨덴 대표팀 소속으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 그레노리 트리오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공을 새웠다.

1948 런던 올림픽 직후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동료들인 리드홀름, 그렌과 함께 AC 밀란으로 이적한 노르달은 이탈리아 무대를 폭격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과 라틴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노르달 개인은 세리에 A 득점왕 5회 수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밀란으로 이적해 프로선수가 된 노르달은 아마추어들만 대표팀으로 뽑는 정책으로 인해 1950년대에는 스웨덴 대표팀으로 활약하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럼에도 1940년대의 업적으로만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노르달은 여러 대기록을 남겼는데 AC 밀란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 세리에 A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자 및 세리에 A 최다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2위 루이스 피구

 


생년월일: 1972년 11월 4일
국적: 포르투갈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 상반기 세계 최고의 윙어 중 하나로 헛다리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농락했으며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기막힌 크로스는 물론 동료들을 활용하며 패스로 경기를 주도하는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한 완성형 윙어였다.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데뷔해 라리가의 바르셀로나에서 첫 전성기를 보냈으며 전자의 클럽에서 컵 위너스컵 우승과 라리가 2연패를 이뤄내며 1999년 돈 발롱 어워드에서 라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었으나 2000년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자 바르셀로나 팬덤에서는 배신자로 규정되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라리가 2회 우승과 2001-02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2001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말년에 인테르에서는 세리에 A 4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200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는 청소년 대표 시절에 이름을 날렸고 성인 대표팀에서는 UEFA 유로 1996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유로 2000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4강을 이뤄냈으며 유로 2004에서는 데쿠, 호날두와 함께 결승에 진출하며 포르투갈 대표팀의 전성기를 열었고 개인적으로도 두 번의 유럽 선수권 대회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대회 올스타 스쿼드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61위 산드로 마촐라

 


생년월일: 1942년 11월 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와 라이벌 지안니 리베라와 함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손꼽히며 훌륭한 슈팅 스킬과 창의적인 패싱력, 탄탄한 볼 컨트롤과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필수적인 덕목은 물론 기동력도 탁월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선수 생활을 오직 네라주리 군단에서만 보낸 산드로 마촐라는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루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던 마촐라는 개인적으로도 963-6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고  1964-65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 안에 네 번 들었으며 1971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상대 수비진을 압박해주는 스타일 덕분에 아주리 군단에서는 리베라보다 더 중용되었으며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는 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결승행을 도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