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60~5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Total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60~51위

토르난테 2024. 10. 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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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60위 지안니 리베라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AC 밀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로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을 가진 것은 물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패싱력과 정교한 드리블로 유명했으며 1972-73 시즌에는 득점왕에 오른 적도 있었을 정도로 득점력도 훌륭했다.

AC 밀란에서 19년간 활약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를 이뤄낸 리베라는 유럽에서도 유러피언 컵 2회 우승과 컵 위너스 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1969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1972-73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다.

소속팀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아주리에선 다소 아쉬웠던 리베라는 19세에 데뷔해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전성기 때에는 전술상의 이유로 전반전을 포지션 라이벌 산드로 마촐라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후반전에 주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조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유로 19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59위 호베르투 히벨리누

 

 

생년월일: 1946년 1월 1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SC 코린치안스

펠레 이후, 지쿠 이전 브라질 대표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플립플랩 드리블의 시조로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줬으며 원자폭탄 킥이라 불렸던 매서운 왼발 프리킥을 보여줬다. 즉 킥과 드리블, 패스에서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코린치안스와 플루미넨시에서 전성기를 누린 호베르투 히벨리누는 코린치안스에서는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의 기세에 밀려 우승컵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펠레, 아데미르 다 기아, 페드로 로차와 함께 상 파울루 주의 4대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고 1971년에는 브라질 세리 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플루미넨시에서는 플라멩구의 지쿠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지역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자신을 세상에 알린 히벨리누는 1970년에는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팀의 핵심 선수로 팀 공격을 이끌며 팀이 4위에 올라서는데 공헌했다. 히벨리누는 남미 올해의 선수 10위 안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8위 케빈 키건

 


생년월일: 1951년 2월 14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70년대 하반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체격은 작았으나 단단한 근육질 몸매로 몸싸움을 잘했으며 공격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만능 공격수였으며 우수한 헤더와 득점력은 물론 천재적인 플레이메이킹 능력마저 겸비했다.

리버풀과 함부르크에서 전성기를 보낸 키건은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풋볼 리그 3회 우승과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고 케빈 키건 개인으로도 PFA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1975-76 시즌에는 FW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77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2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당대 잉글랜드 프로축구무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함부르크에서는 19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과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했던 키건은 세 시즌 간 머물면서 세 시즌 모두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여섯 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네 번이나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고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하는 저력을 토했으며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에도 사우스햄튼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1981-82 시즌 PFA 올해의 팀과 올해의 선수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삼사자 군단에서는 UEFA 유로 1980과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 키건이지만 상술했던 클럽에서의 엄청난 커리어로 인해 발롱도르를 2년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는 4회 선정되었으며 은퇴한 이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7위 히데구티 난도르

 


생년월일: 1922년 3월 3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펄스 나인의 한 계보로 평가받았고 공격형 미드필더의 중시조로 평가받기도 했던 인물로 상대 수비를 유인한 뒤 창의적인 패싱력에서 나오는 찬스메이킹을 바탕으로 푸스카스와 코치슈와 연계해 상대 수비진을 공략하는 팀 전술의 핵심으로 활약했음은 물론 득점력 자체도 우수해서 유인에 실패하더라도 직접 득점을 노릴 수 있었다.

MTK 헝가리의 에이스로 넴제티 버이녹샤그에서는 혼베드의 푸스카스와 라이벌리를 이뤘던 히데구티는 소속팀 MTK 헝가리아에서 300경기에 넘게 출전해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5 미트로파 컵에서는 9골을 넣으며 팀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활약을 보여줬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푸스카스, 코츠시스와 함께 매직 마자르의 전술적 핵심으로 활약한 히데구티는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중유럽컵 우승,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 준우승을 이뤘지만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기는 1953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매치였는데 이 경기에서 히데구티는 삼사자 군단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홈 무패의 삼사자 군단을 6-3으로 무너트리는데 크게 기여한다.

 

 

56위 바비 무어

 


생년월일: 1941년 4월 12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빼어나면서 안정적인 수비력은 기본이고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과 뛰어난 롱 패스를 활용한 플레이메이킹 능력, 타고난 전술안 등 수비수로서 필요한 덕목은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리더십에 관해 클럽과 대표팀의 동료였던 제프 허스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고 고함치는 주장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누군가에게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려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플레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라고 헌사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공식전 647경기에 나선 바비 무어는 1963-64 시즌 FA컵 우승과 1964-65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끌며 웨스트햄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보내는 부분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구단측에서는 그의 등번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실제로 바비 무어 사후 이탈리아의 수비수 안젤로 오그본나가 웨스트햄에 입단했을 때 "내가 이 클럽에 입단했을 때, 나는 그가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장면들은 그의 태클 실력 말고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는 공 앞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팀에 걸맞은 리더이며, 아주 훌륭한 선수였다."라고 헌사했을 정도로 구단을 대표하는 전설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의 우승과 UEFA 유로 1968 3위를 기록하는 등, 무어가 주장으로 이끌던 시절의 잉글랜드는 다른 시대와는 달리 매우 잘 나갔는데 그가 대표팀에서 물러나자 잉글랜드 대표팀은 일시적으로 몰락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는데 오죽하면 대표팀 감독이었던 알프 램지는 "나의 주장, 나의 리더, 나의 오른팔. 그는 우리 팀의 기운이자 우리 팀의 심장이었다. 내 인생을 걸어도 괜찮을, 멋지고 계산적인 축구 선수이다. 그는 내가 일해 본 사람들 중에서도 완벽한 프로였다.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는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단순한 팀 주장이 아니다. 그는 모두의 주장이다."라고 헌사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뛰어났다.

퍼거슨에 의해 최고의 수비수로 칭해졌고 한때 유럽 축구사 최고의 센터백으로 평가받았던 바비 무어는 1970년에는 월드컵에서 펠레, 게르트 뮐러와 같은 선수들을 잘 막아낸 활약을 인정받아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으며 사후인 1994년에 선정한 피파 월드컵 올타임 팀에 선정되었고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최초로 헌액되었다.



55위 프랑코 바레시

 


생년월일: 1960년 5월 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C 밀란

'로쏘네리의 심장'

AC 밀란과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수비라인 통솔 능력과 빠른 스피드, 정확한 롱패스, 몸을 사리지 않는 태클을 모두 겸비한 완벽한 수비수였다.

AC 밀란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된 바레시는 암흑기 시절 세리에 B 우승을 두 번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켰으며 이후 베를루스코니에게 인수된 이후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 기간에는 무패 우승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수비수임에도 1989-90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3년 연속 선정되었다.

바레시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에타노 시레아라는 큰 벽에 의해 아주리에서는 다소 늦게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주전 멤버로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지 못해 대표팀 활약이 시레아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결승전에서 말디니와 함께 호마리우, 베베투 라인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대표팀에서도 시레아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충분히 보여줬다.

이렇듯 클럽과 대표팀을 가리지 않고 최정상의 실력을 뽐낸 바레시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일곱 번 선정되어 1989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를 차지하며 포디움에 들었다.



54위 다니엘 파사레야

 


생년월일: 1953년 5월 2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완벽한 수비 능력과 훌륭한 수비라인 지휘 능력, 그리고 강력한 킥력을 활용해 득점과 찬스 메이킹마저 담당했으며 17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제공권 장악 능력이 오히려 강점에 속하는 만능 디펜더로 남미 축구 역사상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리버 플레이트와 피오렌티나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파사레야는 전자의 구단에서는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4회 우승과 후기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5 시즌과 1979 시즌에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했고 1976년에는 35경기 24골이라는 공격수라 해도 믿을 득점력을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파사레야는 피오렌티나에서는 마지막 시즌인 1985-86 시즌에는 수비수임에도 무려 11골이나 득점했는데 이는 마테라치가 갱신하기 전까지 세리에 A 수비수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며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외국인 선수 랭킹 2위에 2회 올랐다. 실제로 피오렌티나 시절은 물론 말년인 인테르 시절에도 좋음 모습을 보였다.

파사레야는 라 알비셀레스테에서도 위대한 주장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다소 논란이 많은 대회지만 주장으로써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우승을 차지했고 개인적으로도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할 예정이었지만 대회 직전 식중독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벤치로 내려가는 비극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월드컵 2회 우승이라는 영예를 누렸으며 은퇴 이후 2015년에는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선정 아르헨티나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53위 호세 나사치

 


생년월일: 1901년 5월 24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베야 비스타

우루과이를 넘어 축구 역사에서도 최고의 수비수 반열에 있는 선수로 당시로서는 굉장한 거구로 압도적인 힘과 영리한 위치 선정으로 상대 공격수를 잡아먹었다. 그의 튼튼한 수비력에 우루과이의 유명한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X선조차 그의 수비를 뚫지 못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리더십도 뛰어나 위대한 사령관이라 불렸다.

월드컵이 탄생하기 이전 세계 최고의 축구 권위 대회인 올림픽에서 주전 멤버로 두 번이나 금메달을 땄으며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네 번이나 우승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공격수들을 제치고 MVP를 수상했으며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네 번 우승했으며 1923년과 1935년, 두 번이나 MVP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소속팀이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베야 비스타였으나 나사치의 맹활약으로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좋은 지표를 보여줬다. 특히 1932 시즌에 베야 비스타는 리그에서 35실점을 기록하던 베야 비스타가 호세 나사치가 떠난 1933 시즌엔 무려 61실점과 리그 꼴지를 기록하며 무너졌다. 반면 클루브 나시오날은 1932년에 리그 3위와 34실점을 기록했지만 나사치가 이적한 1933년에는 리그 우승은 물론 27경기에서 고작 10실점만 기록하는 탄탄한 팀으로 변모한다. 이후 나사치는 나시오날에서 리그 4연패를 기록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추가한다.

 

 

52위 아르세니오 에리코

 


생년월일: 1915년 3월 30일
국적: 파라과이 / 몸무게 76kg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1kg
주 소속팀: 인디펜디엔테

193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3cm의 신장과 압도적인 점프력이 더해져 공중전에서 재미를 보았으며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말하기를 "그의 헤딩은 궁수와 같아서 정확히 원하는 곳에 꽂을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으며 헤더뿐만이 아니라 슛 테크닉도 매우 뛰어난 선수라 스콜피온 킥을 최초로 사용한 선수라고 전해진다.

인디펜디엔테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랭크된 에리코는 데 라 마타, 사스트레와 함께 악마의 삼지창이라 불렸던 중앙 공격 듀오를 구성해 활약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포함해 공식 대회 7회 우승을 기록했고 에리코 개인도 여덟 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으며 그중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20골을 넘겼는데 특히 1937 시즌부터 1939 시즌까지는 세 시즌 연속으로 시즌당 40골 이상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오른 에리코는 은퇴 이후 1966년에 스포르트 선정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사후인 1999년에는 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49위에 선정되었고 2017년에는 베를린브리츠 선정 1930년대 최고의 선수 6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국 파라과이가 쟁 등을 겪으면서 코파 아메리카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1937년 이후에는 파라과이가 다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지만 인데펜디엔테가 그의 참가를 만류했다. 그리고 에리코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의 귀화 제의를 거절했다.

 

 

51위 레프 야신

 


생년월일: 1929년 10월 22일,
국적: 러시아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디나모 모스크바

자타공인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골키퍼가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졌던 선수로 특히 선방에 대해선 기가 막혔는데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만을 기록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며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 "사각지대는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소련 탑 리그 5회 우승을 기록하며 소련 탑 리그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14회 선정된 야신은 소련 대표팀에서 1956 멜버른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며 위대한 신화의 시작을 알렸고 1958 스웨덴 월드컵과 1962 칠레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으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4강에 올랐다. 그리고 유럽선수권 대회에서는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유로 1960에서는 조국을 우승시키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음은 물론 다수의 언론사로부터 MVP로 평가받았으며 유로 1964에서도 조국의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스페인에게 아쉽게 패했지만 야신 개인의 활약은 대단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한때 월드컵 최우수 골키퍼에게 주는 상 이름이 야신상이었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친 야신은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10회 선정되어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해 그 해 유럽 최고의 선수의 자리에 올랐으며 사후 1994년과 2002년에 FIFA 월드컵 올타임 팀 선정되었고 1999년에는 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20년에는 프랑스 풋볼지 선정 발롱도르 드림팀 골키퍼 부문 1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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