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41~50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Total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41~50위

토르난테 2024. 10. 30. 13:29
728x90
728x90

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50위 코츠시스 산도르

 


생년월일: 1929년 9월 21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195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 선수로 우수한 득점력 및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유려한 연계플레이를 겸비했음은 물론 특히 헤더를 활용해 득점하는 부분에서는 축구사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아 황금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소규모 구단 코비나이에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해 1948-49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은 코츠시스는 헝가리 공군의 이적요청을 받아들여 공군 산하의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이적해 푸스카스, 치보르, 부다이 등과 호흡을 맞춰 활약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코츠시스 개인도 정규리그 득점왕을 3회 수상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코치슈는 푸스카스, 히데구티와 함께 절륜한 호흡을 자랑했는데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및 1953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에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며 매직 마자르의 시대를 열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평받았다. 특히 코치슈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5경기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석권했고 실질적인 대회 MVP로 평가받았는데 이 활약으로 1954 헝가리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 공산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는데 같은 헝가리 출신의 쿠발라 라슬로의 지원으로 바르셀로나에 입단해 활약하며 라리가 2연패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진출을 이뤄냈으나 벤피카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49위 레이몽 코파

 


생년월일: 1931년 5월 5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스타드 드 랭스

1950년대 유럽을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프랑스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키가 작았지만 뛰어난 리더십과 우수한 기량을 보여줘서 나폴레옹이라 불렸던 선수다. 양발 사용 능력과 드리블 돌파 능력이 특히 대단했으며 상대 수비의 허를 찌르는 킬 패스로 스트라이커들을 지원하는데 능했으며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측면 공격수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스타드 드 랭스의 전성기를 이끈 레이몽 코파는 프랑스 리그 2회 우승은 물론 1953년에는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첫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는 랭스를 결승에 올렸지만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에는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에 밀려 자신의 포지션에서 플레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도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며 라리가 2연패와 유러피언 컵 3회 연속 우승, 그리고 1957년 라틴 컵 우승에 공헌하며 저승사자 군단의 신화를 쓰는데 일부 기여하기도 했으나 다시 랭스로 돌아가 리그 우승 2회를 더 추가하며 랭스에서 총 4번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1950년대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고 두 번의 월드컵에 출전한 코파는 1958년 대회에서는 퐁텐, 장 뱅상, 피앙토니, 위스네스키와 함께 위협적인 공격 편대를 구상했으나 펠레의 브라질에 패해 3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코파는 3골 9도움이라는 우수한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를 수상함으로써 유럽 국적의 선수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48위 지지

 


생년월일: 1928년 10월 8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축구 지능이 높아 감독이 졸고 있을 때 팀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광활한 시야와 정교하면서도 창의적인 숏패스와 롱패스로 경기를 지배했으며 발기술이 좋아 상대 수비수 두 명 정도는 제칠 수 있었고 프리킥에도 능해 '미스터 풋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브라질 무대의 플루미넨시와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특히 후자의 클럽에서는 캄페오네투 카리오카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전국 리그에서도 펠레의 산투스를 견제하는 강팀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만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디 스테파노와의 불화와 스페인 적응 실패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떠났다.

셀레상에서는 1954 스위스 월드컵부터 1962 칠레 월드컵까지 참여해 두 번의 월드컵을 우승했으며 특히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중원을 지휘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에 선정되는 맹활약을 펼쳤다.

 

 

47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생년월일: 1962년 9월 30일
국적: 네덜란드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AC 밀란

허리케인이라 불렸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로 견고한 수비력과 정교한 패싱력, 왕성한 활동량을 모두 겸한 우수한 자원이었으며 리더십 또한 겸비했다.

아약스와 AC 밀란에서 전성기를 누린 레이카르트는 전자의 클럽에서는 에레데비시 5회 우승과 KNVB컵 3회 우승, 그리고 컵 위너스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며 에레디비시 MVP에게 수상하는 네덜란드 골든슈를 2회 수상했으며 후자의 클럽에서는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세리에 A 2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이뤄내며 클럽 축구 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1992 시즌 세리에 A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다.

오랑예 군단의 유니폼을 입고도 두 차례의 월드컵과 유로에 참가했으며 특히 1988년에 열린 UEFA 유로에서 우승을 거뒀으며 레이카르트도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3위를 기록하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그는 베켄바우어의 심리전에 넘어가 격앙된 상태에서 플레이를 하다 루디 푈러에게 침을 뱉었다가 퇴장당해 패배의 단초를 제공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46위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생년월일: 1901년 11월 22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당대 최고의 하프백이자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평가받는 선수로 엄청난 운동능력과 넓은 시야, 그리고 탄탄한 기본기를 겸비했으며 이를 활용해 중원과 오른쪽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여준 라이트 하프였다.

오늘날 다니 아우베스나 마르셀루, 주앙 칸셀루가 보여주는 플레이와 유사한 플레이를 이미 100년 전에 보여줬던 안드라데는 소속팀에서는 벨라 비스타에서 데뷔해 우루과이의 양대 클럽인 나시오날과 페냐롤을 거쳤으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의 활약은 대표팀에서 더 빛났는데 나사치, 스카로네와 함께 월드컵이 탄생하기 이전 세계 최고의 축구 권위 대회인 올림픽에서 주전 멤버로 두 번이나 금메달을 땄으며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를 우승했고 그중 1926년 대회에서는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도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했는데 결승전에서 2-2 동점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측의 완벽한 골 찬스를 몸을 던져 블로킹해 무산시키며 4-2 역전승에 공헌하며 대회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는 1954년에 템포지에서 선정한 축구사 역대 베스트 일레븐 라이트 하프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사후인 1988년에는 이탈리아 축구연맹 선정 축구사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99년에는  IFFHS 선정 20세기 남미 최고의 축구선수 8위 및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29위에 선정되었으며 2017년에는 독일의 베를린브리츠 선정 1920년대 최고의 선수 1위에 선정되었다.

 

 

45위 조지 베스트

 


생년월일: 1946년 5월 22일
국적: 북아일랜드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펠레나 크루이프에 버금가는 축구 천재로 평가받은 기재로 측면에서 화려한 드리블 돌파를 활용해 중앙으로 침투해 수비진을 교란한 뒤 슈팅을 노리는 인사이드 커터 유형의 선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바비 찰튼, 데니스 로와 함께 공격 편대를 구성해 잉글랜드 풋볼 리그 우승 2회와 1968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때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바비 찰튼, 데니스 로와 함께 올드 트래포트 앞에 동상이 있는 베스트는 1967-68 시즌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상술했듯이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71년에는 발롱도르 3위에 오르는 활약을 펼쳐 영국 팬들로부터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라 불렸다.



44위 스탠리 매튜스

 


생년월일: 1915년 2월 1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스토크 시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선수생활을 이어나간 노장으로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붙었을 정도로 드리블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수비수와 일대 일 상황에서 수비수를 제치면서 오른발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다고 전해진다.

스토크 시티와 블랙풀에서 전성기를 누린 매튜스는 전력이 약한 블랙풀을 이끌고 FA컵 결승전에 3회 진출해 1952-53 시즌에는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5-56 시즌에는 풋볼 리그 준우승을 이뤄내는 괴력을 보여주며 1956년 첫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력 후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제치고 초대 발롱도르 수상의 영예를 누린다.

삼사자 군단에서도 에이스로 군림한 매튜스는 브리트니 홈 챔피언쉽에서 9회 우승을 이뤄내며 1940년대 하반기 최고의 국가대표팀으로 불렸던 잉글랜드의 에이스로 활약한 매튜스는 1950 브라질 월드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43위 엘리아스 피게로아

 


생년월일: 1946년 10월 25일
국적: 칠레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SC 인테르나시오나우

유럽의 베켄바우어에 대한 남미의 대답이라 평가받았던 리베로로 공수 양면에서 완벽했으며 큰 체격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은 실로 감탄을 할 만했으며 큰 키에도 몸이 굉장히 유연했고 아주 민첩했으며 수비라인 조율 능력도 뛰어나 마티아스 잠머와 함께 오프사이드 트랩을 가장 잘 구사하던 선수다. 그리고 공격 전개 능력은 물론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딩 득점에도 능했다. 이를 본 네우송 로드리게스라는 브라질 축구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백작처럼 우아하고 벵갈호랑이처럼 위험했다고 전해지는 완벽한 수비수였다.

페냐롤에서 세계적인 수비수로 성장한 피게로아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냈고 1969년에는 역대 인터콘티넨탈 우승팀끼리 최강자를 가리는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을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날에서는 다섯 번의 주립 리그와 두 번의 전국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남미 올해의 선수상 1위 3연패와 3위 한 번이라는 대기록을 기록했다.

칠레 대표팀의 암흑기에 활약했던 선수라 대표팀 커리어가 다소 빈약한데 1974 서독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서독을 만나서 엄청난 수비력을 선보였는데 파울을 범하지 않고도 깔끔한 수비를 펼치면서도 양 팀 선수 중 가장 많은 인터셉트와 태클을 기록했다. 피게로아는 특히 게르트 뮐러를 전담 마킹했는데, 피지컬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인 부분으로도 뮐러를 완전히 압도했음은 물론 천재적인 수비라인 지휘 능력으로 게르트 뮐러에게 오프사이드 3회라는 굴욕을 선사했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피게로아 개인은 다수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42위 파올로 말디니

 

 

생년월일: 1968년 6월 26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AC 밀란

AC 밀란과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와 세밀한 볼 컨트롤, 우수한 피지컬 능력과 교묘한 대인 수비를 모두 겸비한 완벽한 풀백이자 센터백이었다.

AC 밀란에서 세리에 A 7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을 포함해 밀란에서만 스물다섯 개의 우승컵을 들었으며 특히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센터백으로 출전해 호마리우와 스토이치코프를 가볍게 무력화시킨 그의 수비력은 관중들을 경악하게하며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된다.

아주리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 유로 1988부터 2002 한일 월드컵까지 일곱 번의 메이저대회에 참가해 월드컵에서 두 번, 유로에서 세 번 베스트 일레븐에 드는 우수한 활약을 펼쳤고 바레시, 베르고미와 함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을 세웠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레프트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혼신의 수비를 했으며 결승전에서도 바레시와 짝을 이뤄 호마리우와 베베투를 괴롭히며 승부차기 끝에 팀이 패했음에도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오르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그의 대표팀 마지막은 초라했는데 이천수에게 발로 머리를 가격당한것도 모자라 심판이 그것을 못 봤으며 팀도 연장전 골든골로 패했다.

그럼에도 말디니는 팀 커리어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대단했는데 발롱도르 10위 안에 여섯 번 들었으며 1994년과 2003년에는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들었는데 발롱도르 포디움에 두 번 든 유일한 측면 수비수이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8회 선정, ESM 올해의 팀에 4회 선정되었으며 1994년에는 월드 사커지가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1위 호마리우

 


생년월일: 1966년 1월 29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골의 왕이라 불렸던 199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동물적인 감각을 앞세워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트려 득점했으며 신체 밸런스와 양발 사용 능력 모두 훌륭했으며 볼 컨트롤과 뛰어난 드리블 실력까지 자랑했기에 바르셀로나 시절 그의 파트너 스토이치코프는 그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 그는 종종 경기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골 기록을 보면 도저히 논쟁이 불가능했지. 그는 무에서 골을 창조해 내는 선수야. 그의 피니쉬는 비범했고 나는 종종 그가 탁월한 수비수들을 시체를 지나는 것 같이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 오늘날 그와 같은 선수는 없어."라는 극찬을 했다.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주립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은 호마리우는 히딩크 체제의 PSV 에인트호번에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에레데비시 3회 우승과 득점왕 3회 수상, 그리고 1989년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하며 유럽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PSV 시절을 뛰어넘는 최전성기에 올라섰는데 1993-94 시즌에 30골을 터트리며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감독 및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실력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친정팀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간 뒤인 2000년에는 축구선수로서는 황혼기인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에서 공식전 71경기에 출전해 66골을 득점했으며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는 2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2000년 한 해 동안 공식전 73골을 기록했음은 물론 소속팀의 브라질 세리 A 우승 및 코파 메르코수르 우승을 이뤄냈으며 호마리우 개인도 브라질 리그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MVP에 동시에 선정되었음은 물론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며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다. 호마리우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및 브라질 세리 A, 네덜란드 에레데비시, 스페인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서 클럽 통산 16회의 득점왕에 오르는 괴력을 펼쳤다.

셀레상에서도 1985 남미 U-20 챔피언십에서 조국의 우승 및 개인의 득점왕을 동시에 이뤄내며 주목받기 시작한 호마리우는 성인 대표팀에서도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에 기여했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팀의 공격을 이끌며 우승해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을 모두 석권했음은 물론 1994년에는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풋볼로부터 1994년 이전 발롱도르 수상자를 재평가할 때 기존 수상자인 스토이치코프를 제치고 1994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7년 컨페드컵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궁극의 투톱을 구성해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드컵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컨페드컵에서는 7골로 동료 호나우두마저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결승전 호주전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더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실버볼과 골든슈를 수상하는 괴력을 뽐냈다. 호마리우는 A매치 17경기에 출전해 19골을 기록했음에도 감독들과의 불화로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소집되지는 못했지만 30대 후반인 2005년에도 소집된 이력이 있을 정도로 롱런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