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20위~1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20위~11위

토르난테 2024. 7. 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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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위 조크 스타인

 


생년월일: 1922년 10월 5일
국적: 스코틀랜드
주 소속팀: 셀틱 FC


'스코틀랜드 축구의 기념비'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감독 중 하나로 4-2-4 시스템을 신봉했는데 이 특별한 4-2-4 포메이션은 최전방 두 명의 스트라이커가 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오면서 양 쪽 측면 윙어가 중앙 쪽으로 좁혀 주는 것, 그리고 그 사이드 공간을 양쪽 윙백의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메워주는 방식의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했다.

'리스본의 사자들'이라 불리던 셀틱의 황금기를 이끈 스타인은 1966-67 시즌 트레블을 이뤄냈는데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엘레니오 에레라가 이끄는 인테르의 카테나치오를 완벽하게 파훼하며 슈팅을 40개나 날려 상대를 압도해 우승하며 전관왕을 차지했고 정규리그 10회 우승을 포함해 31개의 공식 대회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1978년부터 사망 직전까지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조크 스타인은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본선에 진출했고 1986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 웨일스전 도중 숨을 거뒀다. 위급한 와중에도 '여봐, 알렉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진다고 해도 자네가 선수들을 경기장 센터 서클로 데려가 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도록 해야 하네. 품위를 잃지 않도록. 다른 건 중요치 않아. 품위를 잃지 않도록 그렇게만 하게나.'”라고 수석코치 퍼거슨에게 부탁했다.

사후, 2004년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조크 스타인은 1967년 영국 올해의 감독, 2003년 선데이 헤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스코틀랜드인 감독, ESPN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17위에 선정되는 등 축구 역사에 크게 기여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19위 허버트 채프먼

 


생년월일: 1878년 1월 19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아스날 FC


'WM의 창시한 포병대 대장'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잉글랜드인이었지만 스코틀랜드식 패스 플레이와 스위칭 플레이를 깊게 연구했던 다뉴브 학파의 일원이자 30년간 축구계를 독식했던 WM 시스템을 개발해 오프사이드 룰 변화에 맞선 선구자로 축구전술을 한층 더 발전시킨 전술가임과 동시에 관리적인 측면에서도 축구 역사상 최초로 클럽 차원에서 물리치료사를 고용하고 선수들의 식습관에도 관심을 가졌음은 물론  FA컵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야간 조명 설치를 추진했던 선지자였다.

젊은 시절에 11곳을 거치며 선수생활을 했지만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고 감독으로도 초년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21년에 허더즈필드의 감독으로 취임해 지도자로 복귀, 이곳에서 1922년 FA컵 우승 및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2연패를 이뤄내 명성을 올렸다가 1925년 당시에는 평범한 구단이었던 아스날의 감독을 맡았는데 부임 첫인사에서 "이 클럽을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겠다."라고 밝히며 포부를 보였다.

아스날을 세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리빌딩과 선수영입으로 전력을 보강했던 채프먼은 부임 5년 차인 1929-30 시즌 FA컵 우승으로 노력의 빛을 보기 시작했고 1930-31 시즌부터 잉글랜드 풋볼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아스날 왕조를 재창했으나 재임 중인 1934년 1월 1일, 아스날이 리그 1위를 수성하고 있던 찰나에 채프먼은 추운 날씨에 노츠 카운티와 베리 등의 구단을 둘러보며 스카우트하러 가는 도중에 폐렴으로 쓰러져 8일 만인 1월 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코치이자 핵심 참모였던 조 쇼는 그가 죽자 잃어버린 대장이란 추모시를 지어서 그를 애도했으며 결국 1933-34 시즌에 감독대행으로 우승을 이뤄내며 채프먼의 영전에 트로피를 바쳤다. 채프먼은 먼 훗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외곽에 동상이 세워지며 영원한 구너스의 캡틴으로 남았다. 특히 FA컵에서 감독이 선두로 선수들을 데리고 나오는 전통과 아스날의 빨강-흰 소매 셔츠, 그리고 '아스널 역'명칭도 모두 채프먼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을 정도로 아스날에 끼친 영향력이 아르센 뱅거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위 비토리오 포초

 


출생일: 1886년 3월 2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쥘리메 컵의 사나이'

축구사 최고의 국가대표팀 감독 중 한 명으로 기존의 2-3-5 시스템에 비해 중원에서 안정적인 볼 소유와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수비의 안정성까지 꾀해 인사이드 포워드들을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메짤라의 위치까지 내린 메토도 시스템을 새롭게 재창했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센터하프 미켈레 안드레올로를 적극 기용해 후방 플레이메이킹의 프로토 타입을 제시하는 등 축구 전술사의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지미 호건, 퍼버트 채프먼, 후고 마이슬과 함께 다뉴브 학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포초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아주리의 지휘봉을 잡은 것을 시작으로 토리노와 AC 밀란의 감독직을 맡으면서도 간간히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겸직하다가 1929년, 다시 아주리의 지휘봉을 잡아 20년 가까이 집권했는데 1927-30 중유럽컵 우승을 시작으로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3-35 중유럽컵 우승에 성공했다.

보통의 감독이면 이 스쿼드에 만족해 계속 끌고 가려고 했겠지만 포초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노장이 된 우승 멤버들 대부분을 리빌딩하고도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193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과감한 세대교체의 정석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월드컵을 2회 우승했던 포초 감독은  2011년에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독일의 라디오 방송국 베를린브리츠가 선정한 1930년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7위 지미 호건

 


생년월일: 1882년 10월 16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다뉴브 학파의 수장'

잉글랜드인이지만 스코틀랜드식 짧고 빠른 지속적인 패스 플레이와 스위칭 플레이를 깊게 연구했던 다뉴브 학파를 창시한 축구 연구자로 스위칭 플레이의 밑그림을 그리며 여러 실험을 거두었고 이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분더팀과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 그리고 토털 풋볼의 네덜란드로 이어진다.

자국 무대에서는 외면받아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에서 잡혀서 헝가리로 보내진 지미 호건은 그곳에서 MTK 헝가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페렌츠바로시가 독주하던 넴제티 버이녹샤그에서 MTK 헝가리아의 시대로 바꿔버리며 정규리그 5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 대단한데 콘라드 칼만, 쉬로서 임레, 오르트 죄르지, 브라운 요제프, 샤퍼 알프레드 등을 지휘했던 지미 호건은 1917-18 시즌에 MTK 헝가리아는 21승 1무 147 득점 10 실점이라는 전설적인 승점으로 우승했고 마지막 시즌을 보낸 1921년까지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했는데  MTK 헝가리아 시절에 달성한 전적은 118경기 107승 6무 5패를 이루며 승률이 90%를 넘겼으며 571득점 72실점이라는 경이로운 득실차도 남겼다.

이후 다뉴브 학파를 창시해 하버트 채프먼, 후고 마이슬, 비토리오 포초와 교류한 지미 호건은 오스트리아 국가 대표팀 코치로 재직하며 감독이자 친구 우고 마이슬을 도와 마티아스 진델라를 활용해 센터 포워드로 상대를 유인하고 그 빈 공간을 인사이드 포워드들이 침투해 득점하는 펄스 나인 전술을 완성시킨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륙 최강팀으로 군림하며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과 같은 성과를 이뤄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6위 텔레 산타나

 


생년월일: 1931년 7월 26일
국적: 브라질
주 소속팀: 상 파울루 FC

"지저분한 경기나 부당한 골을 얻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패배를 택할 것이다."

4-2-2-2 시스템이라는 극단적인 중앙 공격 시스템을 실전에서 사용한 감독으로 조가 보니토, 즉 재미있고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했고 수치스러운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를 원했던 가장 브라질스러운 감독이라 평가받았는데 본인의 이상이 성공하지 못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자신의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상 파울루의 왕조를 세우며 아름다우면서도 이기는 축구를 구사해 무서운 집념을 보여주기도 했다.

플루미넨시의 레전드이자 플루미넨시에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텔레 산타나는 감독 데뷔년도인 1969년에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와 타사 과나바라 우승을 이뤄내 두각을 나타냈고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의 감독을 맡아서는 미네이루 주에서 강세를 보이던 최전성기의 크루제이루를 따돌리고 1970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 및 1971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뤄냈고 그레미우에서는 1977 캄페오나투 가우초 우승을 맡아 세 개 주의 최고 리그를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펠레와 자갈루가 이끌던 1970년의 셀레상에 비견된다는 1982년 셀레상을 맡아 지쿠, 파우캉, 소크라치스, 세레주의 황금의 사중주를 모두 활용하는 4-2-2-2 시스템을 보여주며 압도적이 전력을 보여줬으나 이탈리아에게 탈락하며 한동안 중동 무대를 떠돌다가 1986 월드컵에서도 8강전에서 플라티니와 아모로스, 그리고 파팽을 앞세운 프랑스를 꺾지 못하고 탈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1988년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을 이뤄내며 명예회복을 했다.

상 파울루에 부임해 전성기를 누린 산타나는 1991년에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와 브라질 전국리그를 우승했으며 1992년과 1993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카펠로의 AC 밀란과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를 모조리 격파해 크루이프로부터 "차에 치일 거면 페라리에 치이는 게 낫다."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상 파울루에서도 주립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총 네 개 주의 최고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고 AC 밀란, 바르셀로나와 함께 세계 축구를 삼분하는 강팀의 반열에 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남미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으며 상파울루의 팬들로부터는 마스터라 불렸다.

 


15위 오스발도 수벨디아

 


생년월일: 1927년 6월 24일
국적: 아르헨티나
주 소속팀: 에스투디안테스

'마왕'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독한 명장으로 축구는 인간이 한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한 감독으로 오프사이드 트랩과 전략적인 파울을 적극 활용해 상대 공격수들을 위축시켰으며 그가 이끌던 에스투디안테스는 잔인한 플레이로 악명이 높아 어린 도살자들이라 불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에스투디안테스에서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운 수벨디아는 에스투안테스에서만 1967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과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를 이뤄냈고 1968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산 로렌소에서도 1974년 후기리그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서도 콜롬비아 리그 2회 우승을 이뤄내는 등 우승 청부사로 이름을 날렸다

다만 그의 에스투디안테스는 1969년 밀란을 상대로 잔인한 파울을 가해 폭력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으며 이는 유럽 챔피언들이 인터콘티넨탈컵 진출을 기피하고 준우승팀에게 양보하는 사례를 만들며 대회 위상을 최악으로 만들기도 했으며 인터콘티넨탈컵이 제 위상을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4위 구트만 벨라

 


생년월일: 1899년 1월 27일
국적: 헝가리
주 소속팀: SL 벤피카

'포백 전도사'

헝가리와 브라질, 그리고 포르투갈을 돌며 다양한 축구를 경험했으며 이를 토대로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또한 오늘날의 대중적인 수비 전술인 포백 지역방어 시스템을 처음 활용해 브라질의 세계 제패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던 인물이다.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다가 우이페슈트에서 전성기를 맞은 구트만은 넴제티 버이녹샤그 2회 우승과 1939년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끈 구트만은 유대인이라는 이후로 제2차 세계대전에 경력이 끊긴 것은 물론 나치에 의해 죽을뻔했지만 탈출했다. 종전 이후에는 부다페스트 혼베드의 전신인 키페스트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페렌츠 푸스카스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이탈리아 무대로 눈을 돌린 뒤에도 AC 밀란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나 보드진과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상 파울루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1957년, 비센치 페올라와 함께 매직 마자르의 전술 중 레프트 하프가 수비라인으로 커버하던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4-2-4 포메이션을 만들어 1957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낸 구트만은 유럽으로 돌아온 뒤에는 벤피카의 감독을 맡았는데 지역방어와 스위칭 플레이를 앞세운 4-2-4 전술을 벤피카로 도입해 유럽 최초로 포백 팀의 성공 신화를 이끌며 3년간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 컵에서 각각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우루과이의 페냐롤에서도 4백 시스템을 전파해  우루과이 축구가 WM, 시스템에서 4-2-4 시스템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을 줬다.

구트만 벨라는 구트망의 저주로도 유명한데 벤피카와의 재계약 협상에서 틀어지자 구트만은 이후 "벤피카는 향후 유럽 대항전에서 100년간 우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악담을 퍼붓고 떠났는데 실제로 벤피카는 구트만 벨라 체제 이후에 아직까지도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13위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생년월일: 1939년 3월 17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조나 미스타를 재창한 축구계의 피타고라스'

이탈리아 세리에 A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카테나치오가 토털 풋볼에 의해 사장될 위기에 처하자 조나 미스타라는 토털 풋볼과 카테나치오를 결합한 새로운 전술로 이탈리아의 방식으로 토털 풋볼에 맞섰던 선구자였다.

현역 시절에는 AC 밀란의 전설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트라파토니는 지도자 시절에는 밀란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유벤투스의 지휘봉을 잡은 뒤에는 회장 보니페르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10년간 세리에 A 6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76-77 시즌 UEFA컵 우승,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1984-85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며 유벤투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인테르의 지휘봉을 잡아 사키의 AC 밀란을 제치고 인테르의 20세기 마지막 세리에 A 우승 및 1990-91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고 유벤투스로 다시 돌아가서도 1992-93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는 1996-97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및 1997-98 시즌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지만 에펜베르크, 마테우스, 올리버 칸과 같은 선수들의 기싸움에 지쳐 지휘봉을 내려놓기도 했다.

유벤투스는 유럽 최초로 UEFA 주관 3대 유럽 대항전을 모두 제패한 업적을 인정받아 UEFA 플라크를 받았는데 이것은 모두 트라파토니가 이뤄낸 공으로 트라파토니 개인 역시 세미나토레도로 2회 수상 및 제프 헤어베어거 어워즈 2회 수상 및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2회 수상을 이뤄냈고 2012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2위 오트마어 히츠펠트

 


생년월일: 1949년 1월 12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철옹성'

독일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화려함은 다소 부족하지만 굉장히 견고한 독일식 카테나치오 전술에 매우 능통한 인물이었는데 리베로와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많은 부분을 맡기는 3-4-1-2 포메이션과 안정감이 우수한 4-4-2 포메이션을 다루는데 능했고 다소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았어도 항상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승부사였다.

위르겐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던 히츠펠트는 도르트문트의 지휘봉을 잡아 분데스리가 2연패와 1996-9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때 세리에 A에서 밀려나 도르트문트로 버려지듯 이적한 마티아스 자머, 안드레아스 묄러와 같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만개시켰다. 그러나 도르트문트 구단측은 그를 감독 자리에서 내려와 허울뿐인 기술이사직에 임명했고 그렇게 황금기는 끝났다.

1998-99 시즌을 앞두고 히츠펠트는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분데스리가 5회 우승과 DFB포칼 3회 우승, 그리고 1998-99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과 1999-2000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 이어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어냈고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우도 라텍, 유프 하인케스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의 명장 3걸로 평가받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시대에 뒤처졌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스위스 대표팀에서 안정적인 성과를 냈다.

2008년 독일 올해의 감독 수상자인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개인으로도 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키커 올해의 감독 6회 선정 및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2회 수상을 이뤄냈는데 특히 1997년에는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과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그리고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및 올해의 축구 감독에 선정되며 4관왕을 수상했고 2000-01 시즌에도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을 포함해 UEFA 올해의 감독과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그리고 키커 올해의 감독을 수상해 4관왕을 이뤄냈다.



11위 주제 무리뉴

 


생년월일: 1963년 1월 26일
국적: 포르투갈
주 소속팀: 첼시 FC

'스페셜 원'

2000년대를 빛낸 명장이자 스포츠 스타로 견고한 수비력과 치명적인 역습을 겸비한 선 수비 후 역습 축구로 이름을 날렸으며 상대가 약팀일 때는 강력한 공격력으로 압도하는 면모도 보여줬고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언론플레이를 바탕으로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며 스페셜 원이라 불려 축구감독의 스타시대를 이끌었다.

FC 포르투에서 2002-03 시즌 미니 트레블 및 2003-04 시즌 프리메이라 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더블 크라운을 기록하며 전 유럽의 신드롬을 일으킨 무리뉴는 FC 첼시의 감독을 맡아서도 퍼거슨의 맨유와 뱅거의 아스날의 양자구도를 깨고 삼자구도로 만들며 프리미어리그 2연패를 이뤄냈다. 그러나 선수 영입에 관련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그대로 팀을 떠났다. 첼시를 떠나 인테르에서는 세리에 A 2연패 및 2009-10 시즌에는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우승하며 트레블을 이뤄냈는데 특히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역대급 수비 축구를 보여주며 끝내 승리를 차지했고 결승에서는 바이에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후에도 펩과 악연을 이어나갔는데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였던 펩의 바르셀로나에 맞서 센터백 쾨플레 페페를 수비현 미드필더에 기용하는 등 책략을 펼치며 2010-1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2011-12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지만 호날두, 카시야스 등 핵심 선수들과의 갈등 및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계속해서 떨어지자 밀려났고 첼시로 복귀한 뒤에는 2014-15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리그컵 더블 우승을 이뤄냈으나 다음 시즌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쫓겨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후 하락세를 겪다가 2021-22 시즌 AS 로마에서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초대 우승 감독에 올랐지만 AS 로마에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종업자 및 언론을 존중하지 않는 거친 언행과 호화로운 스쿼드를 가진 팀에서도 수비적인 축구로 비판받지만 2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무리뉴는 포르투갈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감독 3회 수상, 세리에 A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및 2009-10 시즌 판키나도로를 수상했음은 물론 트로페오 미겔 무뇨스 2회 수상을 이뤄내 네 개의 국가에서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고 대륙 및 세계 단위에서도 2010 FIFA 올해의 감독, UEFA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IFFHS 올해의 클럽 감독 4회 수상 및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3회 수상을 이뤄냈으며 2016년에는 UEFA로부터  UEFA 선정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으로 선정되었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30위~2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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