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토르난테 2024. 7. 28. 13:31
728x90
728x90

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인물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10위 브라이언 클러프

 


생년월일: 1935년 3월 21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노팅엄 포레스트


'축구계의 궁극적 인습 파괴자'

 

잉글랜드 풋볼 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한정된 자원을 가진 중소구단을 가지고 최대치를 찍는데 능했는데 시뮬레이션 게임 풋볼 매니저 고수들이 온라인에서 하는 플레이를 실제로 보여줬던 감독으로 최적의 선수단 운영과 전술지휘로 유명했으며 경기 도중에도 신의 한 수를 두어 경기를 뒤집는데 능했다.

1967년에 더비 카운티를 맡아 1968-69 시즌에 풋볼 리그 2부 우승을 이뤄냈고 1971-72 시즌에는 1부 리그 우승을 이뤄내 단기간에 잉글랜드 풋볼 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브라이튼과 리즈에서 선수단과의 갈등으로 좋지 못한 시간을 보내다가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해 1977-78 시즌 구단의 유일한 1부 리그 우승은 물론 리그컵마저 우승하는 데 성공해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내며 1977-78 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브라이언 클러프의 진짜 진가는 1978-79 시즌부터 시작되었는데 1라운드부터 디펜딩 챔피언 리버풀을 만났지만 홈에서 2-0으로 승리했고 원정에서도 무승부를 내며 리버풀의 탈락이라는 이변을 냈으며 AEK 아테네, 그라스호퍼, 그리고 FC 쾰른까지 연파하며 결승에 올랐고 결승전에서도 말뫼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해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도 드나모 드레스덴과 AFC 아약스를 제치고 결승에 올랐는데 1979-80 시즌에는 만프레트 칼츠, 케빈 키건을 앞세운 당대 유럽 최강팀 중 하나였던 함부르크를 상대로 선제골을 잘 지켜 1-0으로 이겨 노팅엄에게 두 번째 빅이어를 선물했다.

유럽에도 명성을 떨친 클러프는 유럽 올해의 감독상도 2년 연속으로 수상했고 이후에도 리그컵을 세 번 더 우승하며 노팅엄 포레스트의 역사를 다시 썼던 감독으로 평가받았음은 물론 200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창립 멤버로 헌액되었고 2016년에는 UEFA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에 선정되었다.

 

 

9위 카를로 안첼로티

 


생년월일: 1959년 6월 10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다섯 국가의 리그 우승컵과 다섯 개의 빅이어 '

 

선수 시절에도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멤버로 활약했던 명선수 출신의 명지도자로 로테이션에 소홀하고 백업 멤버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지만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선수단을 품었으며 특히 미드필더에 관한 용병술이 특히 대단해 피를로를 포백 앞 레지스타로 포텐을 터트렸고 이를 우수한 수비력을 가진 가투소의 메짤라 기용으로 채워내는 수를 뒀으며 앙헬 디 마리아, 토니 크로스, 루카 모드리치, 티아고 알칸타라 등은 모두 그를 거치며 한 단계 성장해 시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다.

스승 사키 휘하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수석 코치로 시작해 레지나와 파르마에서 좋은 성과를 보내 유벤투스 감독으로 기용되었으나 무관을 명분으로 경질당한 뒤 AC 밀란의 감독을 맡아 2002-03 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이뤄냈고 2003-04 시즌에는 세리에 A에서도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칼치오폴리로 인한 승점삭감과 세대교체 실패로 인해 구단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2006-07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첼시에서도 2009-10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PSG에서는 2012-13 시즌 리그앙 우승을 이뤄냈다.

연이은 성공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잡은 안첼로티는 무리뉴가 실패했던 2013-14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2016-17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에는 좋지 못한 시간을 보냈지만 레알 마드리드 2기 시절에 화려한 선수단과 함께 부활해 2021-22 시즌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더블을 이뤄냈음은 물론 2022-23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2023-24 시즌에도 2년 만에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더블 우승을 이뤄내며 유럽 5대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이뤄냈고 UEFA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을 이뤄냈다.

다섯 국가의 리그 우승과 네 개 국가의 컵대회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안첼로티는 개인으로도 많은 영예를 누렸는데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세리에 A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및 판키나도로 2회 수상, 그리고 리그앙과 라리가에서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유럽 단위로도 UEFA 올해의 감독과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을 2회 수상했다. 비록 FIFA 올해의 감독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2014년과 2022년에 2위를 차지했다.

 

 

8위 마르첼로 리피

 


생년월일: 1948년 4월 12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늙은 여우'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 초중반 세계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치밀하고 냉철한 면모와 경기 도중 메인 전술을 갈아치웠을 정도로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결단력을 동시에 갖췄으며 높은 라인에서의 압박과 라인을 내려 수비하는 부분에서 모두 능했음은 물론 빠른 공격 전개를 위주로 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점유하는 플레이를 적절히 섞는데 능했는데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으로 여우라는 별명으로 변했다.

삼프도리아의 레전드 출신으로 삼프도리아 유스팀을 시작으로 하부리그와 세리에 A 하위권 팀을 돌아다녔는데 아탈란타에서는 1992-93 시즌 7위를 기록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순위를 기록했고 1980년대의 영광을 뒤로하고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나폴리를 6위에 올랐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AC 밀란에게 밀려 패권 다툼에서 벗어났던 유벤투스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바조를 서서히 배제하고 신예 델 피에로를 중용했고 치로 페라라, 디디에 데샹, 지네딘 지단과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해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유벤투스 감독 생활 동안 세리에 A 5회 우승을 이뤄낸 리피는 1994-95 시즌에는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4회 진출해 처음 진출한 1995-96 시즌에 반 할의 아약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차지하며 양 밀란으로 넘어갔던 세리에 A의 패권을 다시 유벤투스로 찾아오는데 공헌했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세운 리피는 1997-98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감독에 올랐고 세리에 A 올해의 감독 3회 수상 및 유럽 시즌의 감독 2회 수상, 그리고 1997-98 시즌 UEFA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으며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에도 2회 선정되었다.

트라파토니 체제에서 부진에 빠진 아주리 군단에서도 팀을 빠르게 수습한 리피는 평소에 선호하던 4-3-3 시스템을 버리고 변화무쌍한 4-2-3-1 시스템과 4-3-1-2 시스템을 혼용해 우승을 차지했는데 리피 체제의 아주리 군단은 필드골은 단 하나도 내주지 않았을 정도로 탄탄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리피 개인도 2006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고 IFFHS 세계 최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프랑스 풋볼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에 오르기도 했다.

 

 

7위 아리고 사키

 


생년월일: 1946년 4월 1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AC 밀란


'이탈리안 르네상스의 거장'

1980년대 토털 풋볼을 재해석한 명장 중 한 명으로 기존의 미헬스가 창안한 압박 시스템에 간격이라는 요소를 만들었으며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상대를 체계적으로 압박하는 존 프레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사키의 콤팩트 풋볼은 여러 상황에서의 존 프레싱을 기반으로 완성되었다.

하부리그에 있던 파르마에서부터 이 시스템을 이식한 아리고 사키는 특히 AC 밀란에서도 이 철학을 바탕으로 1987-88 시즌 세리에 A 우승 및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이뤄내며 추후 카펠로 시대의 성공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키 개인은 1989년에 각종 감독상을 휩쓸었고 1989-90 시즌에도 유럽 축구 시즌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밀란 시절에 언론이 사키의 일천한 선수 경력을 비판했을 때 "기수가 되기 위해서 말이 될 필요는 없다"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UEFA 유로 1992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탈리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사키는 대표팀에서도 사키이즘을 이식시키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거뒀으나 로베르토 바조와의 불화와 UEFA 유로 1996에서의 부진이 겹치며 사임했고 사키의 전성기는 여기서 끝났다.

비록 사키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그가 고안한 존 프레싱을 기반에 둔 사키이즘은 크루이프즘을 제치고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며 시대를 호령했고 크루이프즘의 적통인 펩 역시 사키의 축구의 일부를 삼켰고 위르겐 클롭, 디에고 시메오네와 같은 감독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키이즘을 재해석했다.

 


6위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생년월일: 1939년 1월 6일
국적: 우크라이나
주 소속팀: 디나모 키이우

'축구 과학자'

자타공인 동구권 및 구 소련권 축구계 역대 최고의 감독이자 축구 구단 운영에 물리학, 통계학 등 여러 학문을 접목시켰음은 물론 여러 학문의 전문가들을 코치로 도입해 일명 '과학 축구'라 불리던 현대적인 선수 관리를 도입한 선구자였는데 이 수학적인 통계를 활용해 선수들을 관리했으며 다양한 상황에서 최적의 대응을 할 수 있게 선수들에게 멀티 포지션을 주문하기도 했다.

디나모 키이우와 소련 축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전 세계에 위명을 떨친 로바노프스키는 디나모 키이우 소속으로는 구 소련 시절에는 소련 탑 리그 8회 우승과 소비에트 컵 6회 우승 및 UEFA 컵 위너스컵 2회 우승 및 1975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고 우크라이나 분리 독립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프리미어리그와 우크라이나컵을 5년 연속 더블 우승을 이뤄내며 독주 체제를 세우는 등 총 32회의 공식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음은 물론 디나모 키이우의 챔피언스리그 최고 성적인 4강 3회는 모두 로바노프스키 체제에서 이뤄냈다.

소련 대표팀 감독 시절에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던 로바노프스키 체제는 조직력을 위해 리나트 다사예프 등 소수의 선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전 선수를 디나모 키이우 선수로 구성했는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과 UEFA 유로 1988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특히 조별리그에서는 네덜란드, 아일랜드, 잉글랜드를 꺾고 조 1위로 진출했고 4강 이탈리아를 상대로도 2-0으로 완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조별리그에서 이겼던 미헬스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육성의 달인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발롱도르 위너인 올레흐 블로힌, 이고리 벨라노프, 그리고 안드리 셰우첸코를 과학 축구의 아래에서 육성한 로바노프스키는 1985-86 시즌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유럽 올해의 감독 3회 선정 및 우크라이나 올해의 감독 5회 선정과 동독의 루빈쿠겔 선정 올해의 중유럽 및 동유럽 감독에 7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사후 베를린브리츠 선정 1980년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5위 리누스 미헬스

 


생년월일: 1928년 2월 9일
국적: 네덜란드
주 소속팀: AFC 아약스

'토탈 풋볼의 설계자'

현대 축구의 기조인 토털 풋볼을 집대성하며 축구 전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두 거장 중 한 명으로 속도와 정확성을 겸비한 숏패스를 바탕으로 높은 점유율을 유지했으며 전방부터 후방까지 조직적인 압박과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 불리는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체계화시켰고 종종 다른 감독들을 모방하기도 했는데 4-2-4를 활용하다가 성적이 정체되자 하펠의 4-3-3을 모방하기도 했고 UEFA 유로 1988에서는 거스 히딩크나 아리고 사키가 주로 사용했던 4-4-2 포메이션을 사용하기도 했다.

크루이프, 바소비치와 함께 선수생활을 보낸 아약스의 전성시대를 재창한 미헬스는 아약스에서 에레데비시 4회 우승과 1970-71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포함해 8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피트 카이저와의 갈등으로 팀을 떠난 뒤에는 FC 바르셀로나에서 리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의 미헬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1974 서독 월드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압도적인 경기력을 바탕으로 전승을 기록했으나 서독의 헬무트 쇤과의 전술 싸움에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UEFA 유로 1988에서는 베켄바우어의 서독과 로바노프스키의 소련을 모두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1988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9 FIFA 세기의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현대 축구의 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으며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칭해진 미헬스였지만 그 과정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에른스트 하펠의 개념을 상당 부분 모방한 부분이 알려졌기에 역대 최고의 감독의 자리에는 아쉽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4위 에른스트 하펠

 


생년월일: 1925년 11월 29일
국적: 오스트리아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토탈 풋볼의 원조라 불린 승부사'

현대 축구의 기조인 토털 풋볼을 집대성하며 축구 전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두 거장 중 한 명으로 말수는 적었지만 행동으로 보였던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용병술은 물론 미헬스보다도 오히려 현대의 토털 풋볼과 더 유사한 면을 보였는데 미헬스의 팀은 과도한 스위칭으로 인해 팀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했고 불필요한 스위칭을 한데 비해 하펠의 팀은 현대의 기준에서 선수의 포지션을 과하게 벗어나지 않고 적절한 토탈 플레이를 구사했음은 물론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수행하는 역할이나, 3명의 미드필더로 수월하게 진행하는 빌드업, 양 풀백의 오버래핑과 윙어의 컷인 플레이는 물론 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압박과 같은 플레이는 당대에는 엄청나게 선진적인 축구였고 현대의 전술 트렌드와 놀랍도록 유사했다.

1950년대 축구계의 유행을 선도한 중유럽에서 수석코치로 배웠던 하펠은 ADO 덴하흐라는 약체 팀에서 1967-68 시즌 KNVB 베이커 우승을 이뤄냈고 페예노르트에서 1969-70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과 1970-71 시즌 에레데비시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때 아약스의 리누스 미헬스와 치열한 라이벌리로 유명했음은 물론 미헬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성공을 바탕으로 클뤼프 브뤼헤에서 벨기에 주필러리가 3연패는 물론 1975-76 시즌 UEFA컵과 1977-78 시즌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네덜란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에도 1차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개최국 아르헨티나 측의 갖은 편파판정 속에서도 서독,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해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80-81 시즌에는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컵대회를 우승했다.

새로운 도전을 원했던 하펠은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한 브란코 제베치 감독이 알콜중독으로 경질된 함부르크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분데스리가 2연패를 시작으로 1981-82 시즌에는 UEFA컵 결승에 올랐고 1982-83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 이어 유러피언 컵에서도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를 꺾고 우승을 이뤄내 세계 최초로 각자 다른 구단으로 빅이어를 든 첫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언더독 인스부르크를 맡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2연패를 이뤄내며 가는 곳마다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1978년과 1983년에 유러피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 시절 재임 기간 도중 폐암을 앓았고 결국 사망했는데 사후에는 그의 업적을 기려 오스트리아의 최대 경기장인 빈 프라터슈타디온을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으로 개칭하였다.

미헬스의 아약스와 하펠의 페예노르트에서 모두 뛰어본 테오 판 다위펜보데는 이 두 거장에 대해 “미헬스는 게임 시작 시 전술적 계획을 개발하는 데 탁월했으며 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펠은 달랐습니다. 하펠은 경기에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플레이하는 동안 그것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펠이 미헬스보다 게임을 훨씬 더 잘 읽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술적으로는 천재적인 하펠은 비록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외향적이며 제자를 적극적으로 길러 학맥을 만든 미헬스에게 토털 풋볼의 주인 자리를 빼앗겼지만 더 다양한 환경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현대 축구에 더 근접한 모습을 보인 감독은 하펠임을 부정할 수 없다.



3위 엘레니오 에레라

 


생년월일: 1910년 4월 10일
국적: 아르헨티나, 프랑스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카테나치오의 왕'

감독 시절 초반에는 라리가에서 라마키나식 스위칭 플레이에 기반한 공격적인 축구로 성공을 거뒀던 사람이지만 환경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수비 지향적인 시스템인 카테나치오를 기반으로 두되 레프트백의 공격 가담, 즉 플루이디피칸테와 라이트윙, 즉 토르난테의 수비 가담을 활용해 같이 빗장을 잠구는 팀들에 대한 해법을 완벽하게 찾았다. 군대를 연상케 하는 규율로 팀의 조직력마저 탄탄하게 잡아 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불렸으며 언론을 이용해 상대를 기만하는 일명 프레테티카를 선보인 최초의 감독이다.

바야돌리드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은 에레라는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틱 빌바오, FC 바르셀로나 등 까다로운 상대들을 제치고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라리가 2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FC 바르셀로나를 지휘하던 시절에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과 비슷한 기조의 전술을 선수단 실정에 맞게 최적화시키며 저승사자 군단이라 불리며 유럽을 호령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독주를 막아내고 1958년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1958-59 시즌 라리가, 코파 델 레이 2관왕을 이뤄냈으며 이듬해에는 라리가와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우승하며 2관왕을 이뤄냈는데 두 시즌 간 60경기에서 46승 5무 9패를 기록, 76.67%라는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회장 및 일부 핵심선수들과의 갈등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내려놓고 인테르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스페인과는 다르게 상대하는 팀들이 수비 일변도로 나서 초년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신의 기본 기조와 네레오 로코식 카테나치오를 결합한 뒤에는 그란데 인테르라 불리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룩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AS 로마에서도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줄리아노 타콜라 사망사건의 책임을 지고 팀에서 물러났고 말년에는 FC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서 1980-8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내며 감독경력을 마무리했다.

인테르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6년에는 UEFA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으로 선정된 엘레니오 에레라는 승리를 위해서는 선수를 혹사시키기도 했고 상대 감독은 물론 자신이 맡은 팀의 구단주에게까지 사기를 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우승을 원하는 구단은 가장 먼저 에레라를 떠올렸다.



2위 알렉스 퍼거슨

 


생년월일: 1941년 12월 31일 
국적: 스코틀랜드
주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트로피를 부르는 피리'

크고 작은 대회에서 50회의 우승을 이뤄내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으로 전술적으로 기조가 강한 사람은 아니었고 독창적인 전술을 개발하지도 못했지만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고 유행하는 전술을 자신이 가진 선수단에 최적화시키는 부분에는 능했고 강력한 철권통치로 완벽한 선수단 관리에 능했고 유능한 코치를 잘 활용하는 매니저형 감독의 정점으로 선수를 보는 안목과 일명 헤어드라이어라 불리는 라커룸에서의 선수단을 장악하는 능력, 그리고 노장 선수들과 젊은 선수들을 적절하게 융화시키는 완벽한 리빌딩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중소팀 세인트 미렌에서 1976-77 시즌 스코틀랜드 2부 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퍼거슨은 에버딘의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 체제를 깨며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 3회 우승 및 1982-83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챔피언인 하펠의 함부르크 SV와의 경기에서도 승리하며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내며 11개의 우승컵을 획득했고 에버딘 감독과 스코틀랜드 대표팀 수석코치를 겸직하다가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 조크 스타인의 급사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대표팀 감독대행으로 월드컵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죽음의 조에 희생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월드컵 이후 스코틀랜드 축구계를 떠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강력한 규율과 유스선수의 적극적인 활용을 바탕으로 무너저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재건하는데 성공하며 1990-91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및 1991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고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대를 재창해 프리미어리그 13회 우승, FA컵 5회 우승 및 리그컵 4회 우승과 커뮤니티 실드 10회 우승을 기록했고 1998-99 시즌에는 리그와 FA컵에 이어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인테르와 유벤투스를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역전승을 기록해 우승을 차지해 트레블을 이뤄냈고 2007-08 시즌에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38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라이벌 주제 무리뉴로부터 "퍼거슨은 전 세계 모든 감독의 보스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알렉스 퍼거슨은 수십 개가 넘는 감독상을 휩쓸었는데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11회 수상,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을 4회 수상했고 IFFHS 올해의 클럽 감독에도 2회 선정되는 등 30여 개가 넘는 개인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에는 UEFA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에 선정되었고 2023년에는 프리미어리그 명에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위 펩 과르디올라

 


생년월일: 1971년 1월 18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축구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2000년대 수비 축구의 유행을 부수고 공격 축구의 유행을 선도한 선구자로 요한 크루이프의 크루이프즘을 계승했지만 사키이즘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흡수해 펩 과르디올라만의 속도감 넘치는 패스플레이로 재탄생시켰는데 높은 라인에서의 짧고 빠른 패스로 점유율을 가져가며 상대의 공격할 틈을 주지 않으며 주도권을 가져가는 축구를 펼치며 세계 축구계를 뒤흔들었고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를 거치면서는 기습적인 롱패스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두줄 수비와 전원 공격이라는 상반된 상황을 한 경기 내에서 자유롭게 구사했다.

바르셀로나가 2000년대 중반 약진을 이끈 에이스들이 향락에 빠지며 어려움을 겪자 감독으로 부임한 펩은 그들을 내쳤고 첫 1군 감독으로 데뷔한 2008-09 시즌에 이미 트레블을 이뤄냈고 여세를 몰아 UEFA 슈퍼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그리고 FIFA 클럽 월드컵을 모두 우승해 6관왕을 이뤄냈다. 펩은 6관왕에 만족하지 않았고 팀을 더욱 발전시켜 2010-11 시즌에는 클럽 축구 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팀을 완성했다. 펩은 바르셀로나에 머물며 라리가 3연패 및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포함해 4년 동안 14회의 우승을 기록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라포르타를 밀어내고 회장이 된 로셀과 잘 맞지 않아 사임했다. 그 뒤에는 2012-13 시즌 트레블을 이뤄낸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3년 연속으로 4강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분데스리가 3연패와 포칼 2회 우승을 이뤄냈고 하인케스의 유산을 받아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지휘봉을 잡은 뒤에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펩 과르디올라는 프리미어리그 6회 우승 및 EFL컵 4연패를 이뤄냈으며 특히 2018-19 시즌에는 도메스틱 트레블을 이뤄냈다. 2022-23 시즌에는 100년 전에 유행했던 WM을 현대식으로 리메이크한 시스템을 들고 나왔는데 클롭의 리버풀은 독일제 게겐프레싱 축구로 물리쳤고 투헬의 바이에른은 시메오네식 두줄 수비에 빠른 역습을 곁들여 무찔렀으며 리그 우승의 분수령이던 아스날을 상대로는 잉글랜드 특유의 롱볼 풋볼로 상대를 제압하며 전술 백과사전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줬고 FA컵 결승전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인테르마저 꺾고 우승을 차지해 트레블을 이뤄냈다.

축구사에 존재하는 모든 전술에 통달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최적화시켜 활용하는 능력을 가진 펩 과르디올라는 개인상 이력도 화려한데 라리가 최우수 감독 4회 수상,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5회 수상을 기록했고 2008-09 시즌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수상 및 2011 알프 램지 어워드 수상 및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을 2회 수상했으며 2011년과 2023년에는 FIFA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2022-23 시즌에는 UEFA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20위~11위

처음으로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