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30위~2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감독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30위~21위

토르난테 2024. 7. 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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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위 오토 레하겔

 


생년월일: 1938년 8월 9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


'오토 레하클레스'

 

승리를 위해서는 극단적인 수비축구도 마다하지 않았던 독일의 명장으로 대인 수비 전술인 카테나치오 시스템의 신봉자로 전방에서부터 철저한 압박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수비진들이 대인 수비를 이룰 때 미드필더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는 방식의 수비 시스템으로 이름을 날렸다.

분데스리가 최다 전적, 최다 승, 최다 무승부, 최다 패배의 기록을 모두 석권한 감독으로 유명한 레하겔은 초년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12-0으로 패하며 토르하겔이라 놀림을 당하기도 했으나 베르더 브레멘에서 15년간 머물며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각각 2회 우승과 1991-92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내는 업적을 세워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올라섰다.

14년간 지휘하며 전성기를 보낸 베르더 브레멘을 떠난 뒤에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건너갔으나 회장 울리 회네스와의 갈등으로 사임했지만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는 재기에 성공해 1996-97 시즌 2부 리그 우승에 이어 1997-98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끄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음은 물론 1998-99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 올렸다.

2001년에는 그리스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레하겔은 카테나치오식 대인수비와 현대식 지역방어가 결부된 수비 시스템으로 UEFA 유로 2004에서 배당률 15위로 최약체로 분류되었음에도 우승이라는 기적을 이뤄냈기에 2004년 IFFHS 선정 세계 최고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본선에 진출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그리스 현지에서는 오토 레하겔과 헤라클레스를 결합해 오토 레하클레스라 불리며 명성을 누렸다.

 

 

29위 유프 하인케스

 


생년월일: 1945년 5월 9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질풍의 오스람 사령관'

 

198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30년 넘게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준 사령탑으로 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전술을 팀의 상황에 맞춰서 최적화하는 부분에 강점을 보였는데 감독 생활 초반에는 스리백 리베로 시스템을 메인 플랜으로 구사했으며 중반에는 사키이즘으로 대변되는 콤펙트한 압박 축구를, 2010년대에는 바르셀로나식 점유율 축구와 독일식 게겐프레싱을 적절하게 혼합해서 활용했음은 물론 로타어 마테우스, 라울 곤살레스와 같은 잠재력이 뛰어난 유명주를 스타 선수로 육성하는 부분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선수 생활 전성기를 보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코치로 재직하다가 우도 라텍의 뒤를 이어 감독직을 맡았던 하인케스는 비록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어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키커 올해의 감독에 2회 선정되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우도 라텍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았는데 마테우스와 브레메의 이적에도 불구하고 분데스리가 2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스페인 무대에서도 아틀레틱 빌바오에서는 향후 10년간 팀의 동향이 될 유망주를 여럿 발굴했으며 중소구단이라 평가받는 테네리페에서는 UEFA컵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정규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팀의 일곱 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을 사임한 이후에는 계속해서 좋지 못한 시절을 보내다가 은퇴했지만 2008-09 시즌 후반에 클린스만이 망친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아 4승1무를 거두며 분데스리가 2위까지 올렸고 몰락해가던 레버쿠젠에서도 2010-11 시즌 분데스리가 2위를 기록하며 부활시켰다. 그리고  2012-13 시즌에는 축구 종목 역사상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트레블을 이뤄냈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는  2010년대 초반 최고의 팀이라 불린 메시와 챠비의 바르셀로나와의 맞대결에서 홈과 원정 도합 7-0으로 대파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결승전에서도 도르트문트에게 승리하며 화려하게 은퇴했다.

트레블을 이뤄내며 화려하게 은퇴한 하인케스는 2013년 피파 올해의 감독상과 IFFHS 선정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상을 포함해 8개의 매체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다가 2017-18 시즌에 안첼로티가 경질된 바이에른 뮌헨에 소방수로 부임해 분데스리가 우승 및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DFB포칼 준우승을 이뤄냈는데 챔피언스리그 4강 1,2차전과 DFB포칼 결승전에서는 오심으로 인해 패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훌륭한 임팩트를 보여주며 독일 올해의 축구감독과 VDV 올해의 축구 감독, 그리고 키커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으며 2024년에는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8위 맷 버스비

 


생년월일: 1909년 5월 26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드 데빌즈의 아버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단으로 만든 감독 중 한 명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우수한 유스 시스템을 잘 활용해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 로저 바인과 같은 뛰어난 어린 선수들을 양성했고 이들이 보여주는 훌륭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팀을 성장시켰고 뮌헨 비행기 참사에도 굴하지 않고 팀을 재건시키는 데 성공했던 관리자형 감독의 정점이었으며 전술적으로도 라인을 올려 공격적인 축구로 팬들의 즐거움을 샀다고 전해진다.

선수 시절에는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 소속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버스비는 감독으로는 파산 직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아 유스선수들을 길러내며 풋볼 리그 5회 우승 및 FA컵 2회 우승, 그리고 채러티실드 5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50년대에도 유러피언 컵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며 뮌헨 비행기 참사로 던컨 에드워즈와 같은 주축들을 다수 잃은 이후에도 꾸준히 전력을 회복했다가 1967-68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를 꺾고 우승을 이뤄냈다.

1956-57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경기가 끝나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버스비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맨체스터가 저의 천국입니다."라고 웃으며 거절했던 버스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13개의 트로피를 들었고 퍼거슨 이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이름을 날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올해의 선수상을 맷 버스비상으로 부르기도 했다. 버스비 개인도 2002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7위 밥 페이즐리

 


생년월일: 1919년 1월 23일
국적: 잉글랜드
주 소속팀: 리버풀 FC


'붉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

리버풀에서 선수로 15년, 수석코치로 15년, 그리고 감독으로 9년간 총 39년을 헌신한 레전드로 매니저로서는 철저한 스쿼드 관리로 유명했고 전술가로서는 빌 샹클리 시대보다도 한층 더 진보적인 전술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축구를 개발했는데 후방에서의 볼 배급을 중요하게 생각해 센터백과 골키퍼들의 발밑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선수들의 올바른 포지션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센터포워드에서 활약하던 케네디를 레프트윙에서 만개시켰고 케니 달글리시를 최전방에서 처진 공격수로 내려 만개했음은 물론 최전방에서 화력이 아쉽던 시절에는 미드필더 라인에게 적극적인 공격가담을 주문해 득점력을 활용했다.

붉은 제국을 세운 빌 샹클리의 유산을 이어받아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이즐리는 9년의 재임 기간 동안 2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잉글랜드 무대에서는 풋볼 리그 1부 6회 우승과 리그컵 3회 우승 및 채리티 실드 6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평균적으로 한 시즌 당 2.2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유럽 무대에서도 1975-76 시즌 UEFA컵 우승을 시작으로 대륙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유러피언 컵에서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클뤼프 브뤼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총 3회 우승했음은 물론 1977년에는 유러피언 슈퍼컵에서도 독일에서 잘 나가던 함부르크를 상대로 1차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뒀지만 2차전에서 6-0 대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리빌딩에도 성공하며 후대 감독인 조 페이건 시대에도 원활하게 활약할 수 있게 했다.

붉은 제국을 세 차례나 유럽 정상으로 올린 밥 페이즐리 개인도 수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 6회 선정 및 1977-78 시즌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에 선정되었으며 1981년에는 제프 헤어베어거 어워즈를 수상했다. 은퇴한 뒤에는 2002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초대 멤버로 헌액되었다.

 


26위 빌 샹클리

 


생년월일: 1913년 9월 2일
국적: 스코틀랜드
주 소속팀: 리버풀 FC

'붉은 제국의 시조'

2부 리그로 강등된 리버풀을 구함은 물론 잉글랜드 최고 수준의 클럽으로 올린 명장으로 전술적으로는 패스 앤 무브를 바탕으로 팀을 전개했는데 좌우 측면에 빠른 윙어를 활용하고 공격진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포워드들을 배치하여 다이나믹하게 공격을 펼쳐나가는 구조를 선호했는데 초년에는 3-3-4 포메이션을 주로 활용했지만 유럽 대항전에서 어려움을 겪자 바로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했을 정도로 수용력도 우수했다. 매니저로서는 선수들을 아들처럼 돌보는 덕장이었지만  승부의 세계 앞에서는 냉정함과 비범함을 발휘해 팀의 성공을 위해 칼을 뽑을 수 있는 승부사 기질의 감독이었다.

1959년 2부 리그에서 헤매는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아 "내 이상은 리버풀을 무적의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샹클리는 15년간 재직하며 그가 은퇴하는 1974년쯤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가 되게 만들었고 훗날의 붉은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1961-62 시즌 풋볼 리그 2부를 우승하고 1부 리그로 승격한 이래 풋볼 리그 1부 3회 우승 및 FA컵 2회 우승과 1972-73 시즌 UEFA컵 우승을 포함해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샹클리 개인도 1972-73 시즌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1974년에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수제자 밥 페이즐리에게 팀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도시에는 위대한 두 개의 팀이 있다. 리버풀과 리버풀 2군.". "리버풀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관이다."와 같이 리버풀에 대한 자부심에 관한 많은 어록과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와 같은 명언도 많이 남긴 샹클리는 리버풀 태생의 전 축구선수 토니 에반스로부터 리버풀 클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아이콘으로 평가받았고 리버풀 구단 역시 샹클리의 이런 공로를 인정해 안필드에는 그의 업적을 기려 샹클리 게이트를 만들었으며 빌 샹클리의 동상을 세웠다.

 


25위 세베스 구스타브

 


생년월일: 1906년 1월 22일
국적: 헝가리
주 소속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매직 마자르의 대칸'

축구 역사상 최강의 국가 대표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매직 마자르를 이끌었던 명장으로 다뉴브 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스위칭 플레이 이론과 지역방어 이론에 밝았으며 한 선수에게 다양한 포지션 소화를 지시하는 소셜리스트 풋볼을 이상으로 삼았고 이에 어긋나는 페렌츠 데아크나 산도르 주치와 같은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정리하는 과감함도 겸비했다.

세베슈의 소셜리스트 풋볼을 이식한 매직 마자르 군단은 시스템 이식이 완료된 1950년대 초반에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이며 축구계를 지배했는데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1948~1953 중유럽 컵 우승,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4년간 31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고 6년간 월드컵 결승전 단 1패만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으나 1956년에 벌어진 헝가리 혁명을 정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을 투입하는 실망적인 행보를 보여 대표팀 선수 중 일부가 스페인으로 망명하면서 해체된다.

그럼에도 세베슈의 유산은 세계 축구 여러 곳에 남아있는데 지역방어 시스템은 브라질이 채용해 4-2-4 시스템에 활용해 자신들의 시대를 열었고 저승사자라 불린 레알 마드리드는 스위칭 플레이를 활용해 유러피언컵 5연패의 금자탑을 쌓았으며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헬스는 이를 토대로 토털 풋볼을 재창해 축구판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24위 헬무트 쇤

 


생년월일: 1915년 9월 15일
국적: 독일
주 소속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람바참바와 카테나치오의 두 얼굴'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서독 축구계가 세계 축구계를 쥐락펴락하게 만든 일등 공신 중 한 명으로 일명 독일식 리베로 시스템이라 불렸던 리베로에게 플레이메이킹의 일부를 담당시키며 공격적으로 기용해 베켄바우어의 역량을 극으로 끌어올린 감독으로 유명했고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독일 축구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다.

디 만샤프트에 14년간 머물며 가장 찬란한 시기를 맞이했던 헬무트 쇤은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준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라는 성적을 시작으로 UEFA 유로 1972에서는 마치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브라질 대표팀에 비견되는 공격적인 패스 플레이를 앞세운 일명 람바참바 풋볼로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본선에서는 벨기에와 소련을 압도적으로 무너트리고 우승하며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키며 역대 최고의 디 만샤프트라 불렸다.

그러나 자국에서 열리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자신들보다 기술적으로 훌륭한 팀들이 많이 참전하자 이탈리아식 카테나치오를 연상시키는 플레이로 상대 공격진을 옥죄며 승리를 차지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유고슬라비아와 폴란드, 그리고 스웨덴을 격파하고 결승전에 올랐고 결승전에서는 네덜란드의 에이스 크루이프에게 포그츠를 밀착마킹시켜 무력화시키는 지우개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히며 우승을 차지했다. 서로 다른 두 축구로 정점에 올라 메이저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한 서독은 1976년에도 UEFA 유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서독 축구가 유럽 축구의 대표로 자리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여담으로 헬무트 쇤은 그 시대 상황과는 다르게 선수들을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아닌 많은 자유와 발언권을 주었다는 사실을 줬으며 자신의 업무를 재밌게 수행했다고 한다. 루트거 슐체는 이를 두고 "헬무트 쇤은 아마도 돈이 아니라 축구를 전면에 내세운 감독의 마지막 대표자일 것입니다. 그의 주된 원동력은 수입이 아니라 일의 재미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그런 것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3위 요한 크루이프

 


생년월일: 1947년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점유의 미학과 라마시아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축구계의 미켈란젤로'

선수 시절에 이미 토털 풋볼을 구사한 미헬스의 페르소나로 활약해 토털 풋볼에 능했으며 점유와 압박으로 이뤄진 토털 풋볼을 훌륭하게 계승했으며 우수한 볼 포제션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점유를 보여주며 현대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는 축구를 처음으로 제시했으며 이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유소년 정책을 재정비해 라 마시아를 출범해서 선수들이 어린 시절부터 구단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판을 깔았다.

전성기를 누렸던 아약스에서 감독직을 크루이프는 비록 에레데비시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반 바스텐, 레이카르트와 같은 선수들을 성장시켜 1986-87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리그 우승은 전무했음에도 당시 전술적으로 가장 공격적이고 화려한 팀 컬러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고 이 덕분에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의 지휘봉을 잡았다. FC 바르셀로나에서도 1988-89 시즌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시작으로 라리가 4연패를 이뤄냈고 1991-92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삼프도리아를 꺾고 구단 역사상 첫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크루이프 개인도 1987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을 시작으로 라리가 최우수 감독에 2회 선정되었다.

비록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파비오 카펠로에게 4-0으로 패한 이후 온 하락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커리어를 종료했지만 그가 바르셀로나에 이식한 제도와 정신을 바탕으로 훗날 바르셀로나가 유럽 최고의 클럽이 되었던 근간이 되었다. 즉 펩이 유에서 풍요를 창조했다면 크루이프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가 21세기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성장한 근간이 되었고 1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팀의 성장을 도왔기에 UEFA에서는 그를 두고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남자'라고 평하며 UEFA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에 선정했다.



22위 파비오 카펠로

 


생년월일: 1946년 6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주 소속팀: AC 밀란

'우승 청부사'

선수 시절부터 기하학자라 불렸을 정도로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로 강력한 카리스마와 엄격한 규율로 팀을 장악했으며 사키이즘을 기본 바탕으로 삼았지만 사키에 비해 다소 수비적으로 운용했으며 경직되었다는 평가와는 다르게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아주리로 떠난 사키의 대체자로 AC 밀란에 부임한 카펠로는 오히려 리그에서는 사키 시절보다도 더 강력한 지배력을 선보이며 세리에 A 3연패를 포함해 4회 우승과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반 바스텐의 부상으로 인해 공격진이 조직적으로 꼬이는 상황이 오자 극단적인 수비 전술로 13실점만 거두고 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는 그의 수비축구를 비판한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를 상대로 역으로 공격 축구를 구사하며 선제골을 넣은 뒤 수비축구로 바르샤를 흔들며 역습을 가해 4-0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두 번 부임했는데 두 번 모두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2000-01 시즌에는 AS 로마의 현재까지 마지막 스쿠테토를 이뤄내기도 했다. 카펠로 개인도 파치나 도르라 불리는 이탈리아 축구 감독상을 4회 수상했으며 1993-94 시즌에는 유러피언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21위 미겔 무뇨스

 


생년월일: 1922년 1월 19일
국적: 스페인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마드리드가 자랑하는 무결점의 총사령관'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은 물론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쌓는데 공헌했던 명장으로 저승사자 군단의 주장을 맡았을 정도로 우수한 전술안과 탁월한 리더십을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보여줬으며 전임자였던 비야롱아와 카르닐리아가 활용했던 스위칭 플레이, 4-2-4 포메이션, 3-5-2 포메이션과 같은 다양한 포메이션을 시대에 따라 적합하게 활용하는 전술적인 센스 역시 우수했다.

레알 마드리드 저승사자 군단 초창기에는 선수로 활약하던 무뇨스는 도중에 은퇴하고 1958-59 시즌 잠시 감독 대행을 맡다가 새 감독이 부임하자 1년간 2군 팀에서 경험을 쌓았고 1959-60 시즌 막바지에 다시 1군 감독직으로 복귀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대파하며 저승사자 군단의 대마를 장식했다.

유러피언 컵 우승 이후 저승사자 군단의 멤버들이 하나 둘 떠났음에도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스페인 국적 선수들을 중심으로 Yeye 마드리드 시대를 재창한 미겔 무뇨스는 라리가 9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2회 우승을 이뤄내 갈락티코스에서 감독으로만 총 14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으며 그의 압도적인 리그 지배력 덕분에 바르셀로나에게 밀렸던 라리가 우승 횟수를 역전했는데 이 덕분에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은 물론 전 세계를 대표하는 축구구단이자 스포츠 구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뒤 1970년대 후반에는 라스 팔마스에서도 구단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며 1977-78 시즌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이뤄낸 미겔 무뇨스는 1982년에는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영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준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대표팀의 체질 개선을 이뤄내며 UEFA 유로 1984 준우승과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이라는 성적을 냈다. 그의 사후에는 2006년에는 스페인 언론사 마르카에서 상술한 무뇨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즌 최우수 감독에게 미겔 무뇨스상을 수상한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40위~3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20위~1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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