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0

포지션별 역대 TOP 100/스트라이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0

토르난테 2024. 3. 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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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알베르토 스펜세르

 


생년월일: 1937년 12월 6일
국적: 에콰도르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마법의 머리'

펠레의 라이벌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친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자 에콰도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큰 체격임에도 빠른 스피드와 민첩한 몸놀림을 보여줬으며 특히 헤딩에 능해 마법의 머리라 불렸다. 게다가 인사이드 포워드 출신이었던 만큼 연계 플레이에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대단한 실력을 갖춰 우루과이 축구협회는 그를 귀화시켜 대표팀에 선발하려고 했지만 조국 에콰도르를 포함해 주변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페냐롤 왕조의 주포로 양발과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득점하며 막강한 득점력을 보여준 스펜세르는 팀 공격의 방점을 찍으며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8회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1961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이어 그 해에 열린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에우제비우를 앞세운 벤피카를 꺾고 페냐롤이 우루과이, 남미, 세계 무대에서 모두 챔피언에 오르는 트레블을 이뤄냈고 1966년에는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를 홈과 원정에서 모두 꺾으며 1960년 대회를 설욕했으며  1969년에는 역대 인터콘티넨탈 우승팀끼리 최강자를 가리는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 우승을 이뤄내며 1960년대 페냐롤의 황금기를 이끈 일등 공신으로 이름을 남았다.

페냐롤 왕조를 재창하는 과정에서 페냐롤 구단 통산 출전 5위와 통산 득점 2위에 오른 스펜세르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4회 수상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2회 수상을 이뤄냈고 특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통산 최다 득점자에 랭크되었으며 1967년에는 로 스포르트 일루스트라토 선정 남미 베스트 일레븐 및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69년에는 엘 그라피코 선정 1960년대 남미 최고의 선수 스트라이커 부문 1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9위 티에리 앙리

 


생년월일: 1977년 8월 17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아스날 FC

'킹 앙리'

2000년대를 수놓은 4대 스트라이커로 통하며 재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힘을 겸비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휘저으며 빈 공간을 침투해 뛰어난 슈팅 스킬로 수많은 골을 기록했으며 동료들을 이용한 플레이에도 능해 수많은 찬스 메이킹을 기록하기도 했다.

AS 모나코에서 1996-97 시즌 리그앙 올해의 영플레이어를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낸 티에리 앙리는 유벤투스에서 실패하며 잊혀진 유망주가 되나 싶었지만 뱅거 체제의 아스날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2003-04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암흑기를 겪으며 몰락하나 싶었지만 펩 체제에서 다시 부활에 성공해 전설적인 6관왕을 이뤄내며 아쉬움을 해소했다.

뱅거가 스스로 자신이 가르쳤던 선수 중 최고로 평가했던 티에리 앙리는 클럽에서의 개인 커리어도 착실하게 잘 쌓았는데 PFA 올해의 팀에 6회 선정되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4회, FWA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으며 유러피언 골든슈와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각각 2회 수상했고 프랑스 올해의 선수에 5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0위 안에 7회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20골 20도움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기에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일조한 티에리 앙리는 아스날 이적 이후에는 주전으로 도약해 UEFA 유로 2000 우승과 2006 독일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황금기를 누렸다. 지단도 그를 두고 "티에리는 프랑스가 낳았던 위대한 선수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1998 월드컵에서 그를 만난 이래로 그가 특별한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티에리 앙리는 위대한 커리어를 가졌고, 축구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8위 군나르 노르달

 


생년월일: 1921년 10월 19일
국적: 스웨덴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AC 밀란

'토르'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최고의 중앙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188cm에 90kg에 달하는 엄청난 피지컬에서 나오는 강력한 몸싸움 능력과 벼락같은 슈팅력으로 상대 골키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스웨덴 시절 IFK 노르셰핑에서 알스베스칸 4연패를 이뤄냈고 알스베스칸 득점왕을 4회 수상한 노르달은 스웨덴 대표팀 소속으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 그레노리 트리오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공을 새웠다.

1948 런던 올림픽 직후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동료들인 리드홀름, 그렌과 함께 AC 밀란으로 이적한 노르달은 이탈리아 무대를 폭격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과 라틴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노르달 개인은 세리에 A 득점왕 5회 수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밀란으로 이적해 프로선수가 된 노르달은 아마추어들만 대표팀으로 뽑는 정책으로 인해 1950년대에는 스웨덴 대표팀으로 활약하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럼에도 1940년대의 업적으로만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노르달은 여러 대기록을 남겼는데 AC 밀란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 세리에 A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자 및 세리에 A 최다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위 아르세니오 에리코

 


생년월일: 1915년 3월 30일
국적: 파라과이 / 몸무게 76kg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1kg
주 소속팀: 인디펜디엔테


'비르투오소'

193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3cm의 신장과 압도적인 점프력이 더해져 공중전에서 재미를 보았으며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말하기를 "그의 헤딩은 궁수와 같아서 정확히 원하는 곳에 꽂을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으며 헤더뿐만이 아니라 슛 테크닉도 매우 뛰어난 선수라 스콜피온 킥을 최초로 사용한 선수라고 전해진다.

인디펜디엔테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랭크된 에리코는 데 라 마타, 사스트레와 함께 악마의 삼지창이라 불렸던 중앙 공격 듀오를 구성해 활약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포함해 공식 대회 7회 우승을 기록했고 에리코 개인도 여덟 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으며 그중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20골을 넘겼는데 특히 1937 시즌부터 1939 시즌까지는 세 시즌 연속으로 시즌당 40골 이상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오른 에리코는 은퇴 이후 1966년에 스포르트 선정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사후인 1999년에는 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49위에 선정되었고 2017년에는 베를린브리츠 선정 1930년대 최고의 선수 6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국 파라과이가 쟁 등을 겪으면서 코파 아메리카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1937년 이후에는 파라과이가 다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지만 인데펜디엔테가 그의 참가를 만류했다. 그리고 에리코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의 귀화 제의를 거절했다.

 


6위 마르코 반 바스텐

 


생년월일: 1964년 10월 31일
국적: 네덜란드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AC 밀란

'위트레흐트의 백조'

198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유연한 발리슛과 타점 높은 헤더에서 나오는 득점력과 마치 백조와 같이 우아한 볼 컨트롤 능력에서 나오는 퍼스트 터치는 가히 일품이었으며 팀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에도 능했던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 불렸는데 파비오 카펠로는 그를 두고 "반 바스텐은 내가 훈련시킨 선수 중 최고의 센터포워드였다. 그는 백조였다. 호나우두는 절대적으로 월드클래스이지만, 그 역할에서 마르코가 가장 위대했다."라고 평가했다.

아약스에서 데뷔해 약관의 나이인 1983-84 시즌부터 26경기에 출전해 28골을 기록하며 주목받은 반 바스텐은 에레데비시와 KNVB컵에서 각각 3회 우승을 이뤄냈고 반 바스텐 개인은 에레데비시 득점왕 4년 연속 수상 및 1985-86 시즌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 그리고 1985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6-87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해 우승을 이뤄냈고 옹즈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AC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클럽팀 중 하나라는 밀란 제너레이션 1기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반 바스텐은 그 시대의 슈퍼리그라 불렸던 세리에 A 3회 우승 및 유러피언컵 3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아올렸고 그 과정에서 세리에 A 득점왕 2회 수상, 1988-89 시즌 유러피언 컵 득점왕 수상, 발롱도르 3회 수상 및 옹즈도르 2회 수상이라는 화려한 커리어를 이뤄냈으나 1990년대에는 부상으로 고생하며 결국 31세의 이른 나이로 은퇴했다. 그럼에도 전성기 시절의 임팩트가 대단해 은퇴한 뒤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과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오랑예 군단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반 바스텐은 두 차례의 UEFA 유로에 참가했는데 UEFA 유로 1988에서는 조국의 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득점왕 및 실질적인 MVP로 평가받았고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UEFA 유로 1992에서도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고 은퇴한 뒤인 2016년에는 UEFA 유로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다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다소 기대에 못 미치긴 했다.

 


5위 코츠시스 산도르

 


생년월일: 1929년 9월 21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황금 머리'

195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 선수로 우수한 득점력 및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유려한 연계플레이를 겸비했음은 물론 특히 헤더를 활용해 득점하는 부분에서는 축구사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아 황금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소규모 구단 코비나이에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해 1948-49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은 코츠시스는 헝가리 공군의 이적요청을 받아들여 공군 산하의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이적해 푸스카스, 치보르, 부다이 등과 호흡을 맞춰 활약하며 넴제티 버이녹샤그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코츠시스 개인도 정규리그 득점왕을 3회 수상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코치슈는 푸스카스, 히데구티와 함께 절륜한 호흡을 자랑했는데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및 1953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잉글랜드와의 세기의 대결에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며 매직 마자르의 시대를 열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평받았다. 특히 코치슈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5경기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석권했고 실질적인 대회 MVP로 평가받았는데 이 활약으로 1954 헝가리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 공산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는데 같은 헝가리 출신의 쿠발라 라슬로의 지원으로 바르셀로나에 입단해 활약하며 라리가 2연패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진출을 이뤄냈으나 벤피카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4위 호마리우

 


생년월일: 1966년 1월 29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골의 왕'

골의 왕이라 불렸던 199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동물적인 감각을 앞세워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트려 득점했으며 신체 밸런스와 양발 사용 능력 모두 훌륭했으며 볼 컨트롤과 뛰어난 드리블 실력까지 자랑했기에 바르셀로나 시절 그의 파트너 스토이치코프는 그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 그는 종종 경기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골 기록을 보면 도저히 논쟁이 불가능했지. 그는 무에서 골을 창조해 내는 선수야. 그의 피니쉬는 비범했고 나는 종종 그가 탁월한 수비수들을 시체를 지나는 것 같이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 오늘날 그와 같은 선수는 없어."라는 극찬을 했다.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주립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은 호마리우는 히딩크 체제의 PSV 에인트호번에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에레데비시 3회 우승과 득점왕 3회 수상, 그리고 1989년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하며 유럽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PSV 시절을 뛰어넘는 최전성기에 올라섰는데 1993-94 시즌에 30골을 터트리며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감독 및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실력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친정팀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간 뒤인 2000년에는 축구선수로서는 황혼기인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에서 공식전 71경기에 출전해 66골을 득점했으며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는 2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2000년 한 해 동안 공식전 73골을 기록했음은 물론 소속팀의 브라질 세리 A 우승 및 코파 메르코수르 우승을 이뤄냈으며 호마리우 개인도 브라질 리그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MVP에 동시에 선정되었음은 물론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며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다. 호마리우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및 브라질 세리 A, 네덜란드 에레데비시, 스페인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서 클럽 통산 16회의 득점왕에 오르는 괴력을 펼쳤다.

셀레상에서도 1985 남미 U-20 챔피언십에서 조국의 우승 및 개인의 득점왕을 동시에 이뤄내며 주목받기 시작한 호마리우는 성인 대표팀에서도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에 기여했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팀의 공격을 이끌며 우승해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을 모두 석권했음은 물론 1994년에는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풋볼로부터 1994년 이전 발롱도르 수상자를 재평가할 때 기존 수상자인 스토이치코프를 제치고 1994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7년 컨페드컵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궁극의 투톱을 구성해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드컵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컨페드컵에서는 7골로 동료 호나우두마저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결승전 호주전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더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실버볼과 골든슈를 수상하는 괴력을 뽐냈다. 호마리우는 A매치 17경기에 출전해 19골을 기록했음에도 감독들과의 불화로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소집되지는 못했지만 30대 후반인 2005년에도 소집된 이력이 있을 정도로 롱런했다.



3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생년월일: 1988년 8월 21일
국적: 폴란드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2010년대 하반기와 2020년대 상반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강력한 피지컬을 활용해 수비수들과 경합에서 잘 이겨내며 백발백중의 우수한 골 결정력과 헤더는 물론 유려한 퍼스트 터치 능력과 동료들과의 깔끔한 연계 플레이를 모두 겸비한 완성형 공격수였다.

자국리그에서 활약하다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빅리그의 첫발을 들인 레반도프스키는 2011-12 시즌 분데스리가 더블과 2012-13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는 등의 활약상을 보여주며 분데스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레반도프스키 본인도 2011-12 시즌 포칼 득점왕과 2013-14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물론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을 정도로 맹활약했으나 자유계약으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다.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뒤에는 분데스리가 8연패와 포칼 3회 우승, 그리고 2019-20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마저 우승하며 트레블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운 레반도프스키는 특히 2019-20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물론 챔피언스리그와 포칼에서도 모두 득점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레반도프스키 개인도 바이에른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영광을 누리며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7회 선정 및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 4회 선정을 이뤄냈고 분데스리가 득점왕 6회 선정과 유러피언 골든슈 2회 수상을 이뤄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 2회 연속 수상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2020-21 시즌에는 종전에 게르트 뮐러가 가지고 있던 기록인 분데스리가 시즌 최다골 기록인 40골을 넘어 41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바이에른 뮌헨과 분데스리가에서 역대 득점 2위를 기록하며 바이에른 뮌헨 팬들의 영웅으로 자리 잡는 듯했으나 2021-22 시즌이 종료되고 다소 좋지 못한 방식으로 FC 바르셀로나 이적을 행했다. 그곳에서도 데뷔 시즌에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10회,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2회에 선정된 레반도프스키는 폴란드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예선과 친선 경기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2018 러시아 월드컵 탑 시드를 받는데 공헌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UEFA 유로 2020에서는 비록 팀은 탈락했지만 레반도프스키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2차전 사우디아라비아전과 16강전 프랑스전에서 득점하며 월드컵 무득점의 고리를 끊어냈다.

 


2위 게르트 뮐러

 


생년월일: 1945년 11월 3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폭격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테크닉, 좋은 신체 조건까지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으나 완벽한 축구 지능과 훌륭한 골감각과 위치 선정, 그리고 동료를 이용하는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득점은 물론 도움도 많이 기록했던 완성형 공격수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선수 생활 대부분을 보낸 게르트 뮐러는 압도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각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컵 위너스컵 우승과 유러피언컵 3연패를 이뤄냈고 바이에른 뮌헨 통산 최다 득점자를 비롯해 분데스리가에서 골에 관련된 기록 대부분은 게르트 뮐러의 타이틀이다. 비록 현재는 레반도프스키가 갱신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음은 물론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7회 수상했으며 유러피언 컵 득점왕도 4회 수상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펠레나 자이르지뉴 같은 쟁쟁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10골이나 넣으며 득점왕을 수상한 게르트 뮐러는 이때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UEFA 유로 1972에서도 4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4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결승전에서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방점을 찍었다. 유로와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며 화려하게 국가대표팀을 은퇴했다.

특히 결승전에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13회의 결승전에서 전승을 기록했음은 물론 11골을 득점했으며 그중 결승골 5개를 기록한 대기록을 세운 게르트 뮐러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8회 선정되었고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포함해 13회나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위 호나우두

 


생년월일: 1976년 9월 22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페노메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최전성기 시절에는 엄청난 스피드와 화려한 개인기, 그리고 뛰어난 슈팅 능력을 모두 겸비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를 무릎 꿇리며 압도적인 득점력은 물론 플레이메이킹 마저 능했던 스트라이커였으며 잦은 부상과 갑상선 비대증으로 인해 살이 찐 이후에도 엄청난 골 감각과 축구 센스, 그리고 적절한 위치 선정을 활용해 세계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태어났지만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명문 크루제이루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역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이 치르는 경기인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소속팀의 준우승을 이끌었음은 물론 호나우두 개인은 8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한 호나우두는 "어느 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등장해, 네덜란드와 카탈루냐에서 별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우상이 되었고 스페인에서 신이 되었다." 라는 에릭 칸토나의 발언처럼 네덜란드의 PSV에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바르셀로나의 코파 델 레이와 컵 위너스컵 우승은 물론 라리가 득점왕과 컵 위너스컵 결승전 MOM까지 이뤄내며 펠레와 마라도나에 비견되기 시작했으며 인테르에서 UEFA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UEFA컵 결승전에도 MOM에 선정되었으며 1997-98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와 UEFA 클럽 올해의 공격수를 수상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와서는 2002-03 시즌 라리가 우승과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에서 그들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이뤄냈다. 다만 부상이 잦아 팀에 꾸준하게 기여해주지는 못했으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고 우승컵 자체도 호나우두의 명성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은 사실이었다.

상대적으로 아쉬운 클럽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호나우두가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부분은 역시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 크다. 특히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백업 멤버였던 1994 미국 월드컵을 제외하더라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골든볼과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으며,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득점왕과 우승, 그리고 실버볼을 석권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한때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자를 기록했었다가 지금은 클로제에게 자리를 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제의 월드컵 활약이 호나우두 이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997년과 1999년에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7 코파 아메리카 MVP를 수상했으며 1999 코파 아메라카에서도 팀 동료 히바우두와 공동 득점왕과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활약을 펼쳤다.

호나우두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9회 선정되어 포디움에 4회 들었으며 1997년과 2002년에는 1위를 기록해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상 3회 선정과 옹즈도르 2회 수상, 그리고 현역으로 활약하던 2006년에 이미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을 시작으로 은퇴한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및 인테르 밀란 명예의 전당에 모조리 헌액되었음은 물론 2007년 축구통계협회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 중 펠레에 이어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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