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20위~1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스트라이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20위~11위

토르난테 2024. 3. 2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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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위 아데미르

 


생년월일: 1922년 11월 8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바스쿠 다 가마

1940년대 하반기와 195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선수 생활을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시작했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공간 침투 능력과 치명적인 골 결정력을 겸비했다.

승리의 급행열차라 불렷던 바스쿠 다 가마 왕조의 에이스로 군림한 아데미르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5회 우승을 이뤄냈고 1948년에는 남아메리카 클럽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이뤄낸 것을 포함해 친선 대회 포함 43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음은 물론 아데미르 개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대표팀에서도 셀레상의 1949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해 주목받은 아데미르는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무려 9골이나 넣으며 팀을 우승 직전까지 올려놓았으나 마라카냥에서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위 루이스 아르티메

 


생년월일: 1938년 12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60년대 남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맹수라 불렸을 만큼 동물적인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몸싸움과 빠른 스피드, 용수철 같은 점프력을 겸비했으며 재빠른 반응속도를 활용한 라인 브레이킹과 반 박자 빠른 슈팅에 능한 득점기계였다.

조국 아르헨티나 무대에서는 CA 아틀란타에서 데뷔해 리버 플레이트에서는 득점왕 3회 수상 및 인데펜디엔테에서는 1967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나시오날(후기리그)에서 우승했고 통산 득점왕을 4회 수상했다. 브라질 무대의 파우메이라스에서는 전국리그 제패를 이뤄냈다.

우루과이 무대에 도전하며 클루브 나시오날에 입단한 아르티메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리그 3연패 및 3회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여줬고 특히 1971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인터 아메리카,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을 모두 제패하며 쿼트레블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아르티메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마지막 골을 포함해 10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팀이 기록한 세 골을 모두 득점하며 대회 최우수 선수로 평가받는 활약을 펼쳤음은 물론 아르티메 개인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비공식전을 포함해 1000골 이상 득점한 것으로 알려진 아르티메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잦은 이국 생활로 자주 선발되지는 못했지만 아르티메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 8강과 1967년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해당 대회에서는 5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18위 루이지 리바

 


생년월일: 1944년 11월 7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칼리아리 칼치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을 빛낸 스트라이커로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인해 천둥번개란 별명으로 불렸다. 헤딩에도 능했으며 스피드마저 빨라 레프트윙도 소화할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칼리아리에서 보낸 리바는 1969-70 시즌에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칼리아리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리바 자신도 득점왕에 올랐는데 이 시즌을 포함해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된 리바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2회 선정되어 1969년 2위와 1970년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2회 선정되었다.

아주리 군단 통산 A매치 최다 득점자의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리바는 UEFA 유로 1968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이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17위 페드로 페트로네

 

 

생년월일: 1905년 5월 11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포병으로 불렸던 막강한 슈팅력의 소유자로 20년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다. 슈팅력 이외에도 당시의 센터 포워드들과는 달리 드물게 후방으로 내려와 인사이드 포워드들과 연계에도 힘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아이덴티티는 득점력이라서 경기당 1골 이상을 득점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파르토네를 두고 공격 파트너인 엑토르 스카로네는 그를 두고. "페르토네에게 공을 넘기고 코트 중앙을 바라보기만 하면 골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스카로네, 로마노 등과 호흡을 맞추며 제1의 전성기를 누린 페트로네는  1924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포함해 친선전 포함 6개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지만 1925년에 유럽 투어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으며 한 때 다리를 절단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8월 1일에 돌아왔고 복귀전에서 2골을 넣었지만 1924년에 보여준 기량을 다시 보여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31-32 시즌 피오렌티나로 이적해 활약하며 첫 시즌에 득점왕에 올랐으며 두 번째 시즌에는 피오렌티나 역사상 최초로 유벤투스를 꺾는데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며 회장에게 피아트 508 바릴라를 선물받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지만 포지션 문제로 갈등을 빚자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며 다시 클루브 나시오날로 돌아와 리그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황금기를 이끈 페트로네는 두 번의 올림픽 금메달과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우승한 1923년과 1924년 대회에서는 모두 득점왕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초대 월드컵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16위 안드리 셰우첸코

 


생년월일: 1976년 9월 29일
국적: 우크라이나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AC 밀란

호나우두와 함께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했으며 뛰어난 위치 선정과 킥력에서 나오는 득점력은 물론이고 화려한 드리블 실력과 유려한 연계 능력을 겸비한 무결점 스트라이커였다.

영혼의 파트너 레브로프와 함께 1990년대 하반기 디나모 키이우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 리그 5회 우승과 컵대회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1998-99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해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AC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는 비어호프, 질라르디노, 인자기, 욘 달 톰마손 등과 호흡을 맞추며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한 셰우첸코는 2002-03 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더블 우승을 기록했고 2003-04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발롱도르 이외에도 밀란에 머무는 동안 세리에 A 득점왕을 2회 수상했으며 ESM 올해의 팀 3회 선정되었다.

우크라이나 올해의 선수상 6회 수상 및 대표팀 통산 A매치 최다 득점자에 랭크된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유일한 월드컵 진출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팀에게 8강 진출을 선물했으며 유로 2012에도 참가해 말년을 불태웠다.

 

 

15위 루이스 수아레스

 


생년월일: 1987년 1월 24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201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렸으며 각종 기행으로 더 유명하지만 실력도 우수했는데 우수한 골 결정력은 물론 다이나믹한 드리블과 뛰어난 패싱력을 활용한 찬스 메이킹에도 능했으며 전성기 시절에는 하프 라인부터 직접 골라인까지 몰고 가서 득점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아약스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뒤, 리버풀에서 첫 전성기를 보낸 수아레스는 비록 리그 우승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2013-14 시즌에 득점왕과 리그 MVP를 수상하며 ESM 올해의 팀, PFA 올해의 팀, 유러피언 골든슈,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선수 등 여러 상을 독식했으나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키엘리니를 물어버리며 반년 간 축구계 모든 행사 참가 금지를 받아 발롱도르 후보에 들지 못했다.

2014-15 시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에는 상술했던 징계로 반 년을 쉬었지만 복귀하고 나서 메시, 네이마르와 함께 MSN 라인을 구축해 활약하며 2014-15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2015-16 시즌에는 40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으며 해당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도 이뤄냈다. 수아레스 개인도 ESM 올해의 팀에 2회 연속 선정된 것과 2015년 발롱도르 5위, 2016년 발롱도르 4위에 올랐다.

우루과이 대표팀 A매치 통산 최다 득점자인 수아레즈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포를란을 보좌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으며 2011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했으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안타깝게도 세월의 흔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14위 카림 벤제마

 


생년월일: 1987년 12월 19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010년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로 유려한 발기술과 패싱력, 그리고 이타적인 오프 더 볼 능력을 겸비한 뛰어난 연계 플레이 능력이 강점이었으며 날카로운 슈팅과 클러치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보여줬던 만능 공격수였다.

올림피크 리옹에서 리그앙 4연패를 거두고 2007-08 시즌 리그앙 올스타 팀, 득점왕, 올해의 선수를 모두 석권하며 이름을 날린 벤제마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첫 시즌에는 부진한 활약으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지만 이내 적응하며 경쟁자인 이과인을 밀어내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해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는데 호날두가 이적한 이후에는 자신이 직접 공격의 에이스가 되어 중요한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2021-22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통산 라리가 4회 우승,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 및 UEFA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을 이뤄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스 2기라 불리는 구단 역사상 세 번째 황금기를 이끌던 벤제마는 레알 마드리드 올해의 선수 4회 선정, 라리가 올해의 팀 3회 선정,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 2회 선정 및 ESM 올해의 팀 2회 선정을 기록했으며 2019-20 시즌 라리가 MVP를 석권했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9회 선정 및 2022년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팀, 득점왕, 올해의 선수를 석권하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레 블뢰에서 순조롭게 앙리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듯 했던 벤제마는 모종의 사건으로 UEFA 유로 2016 준우승과 2018 프랑스 월드컵 우승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최근 다시 복귀해 2020-21 UEFA 네이션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부상과 대표팀 감독과의 불화설이 겹치며 나서지 못했다.

 

 

13위 우베 젤러

 


생년월일: 1936년 11월 5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60년대 독일 축구의 아이콘으로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아 우리들의 우베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인물로 공격수로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공격수였는데 170cm의 단신임에도 헤딩에 매우 능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썼고 백 헤더와 백힐 패스, 바이시클 킥 등 고급적인 기술들을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선보이기도 했음은 물론 천둥과도 같은 강력한 슈팅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다. 여기에 스피드도 빨랐고 강력한 리더십마저 보유했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함부르크에서 보낸 젤러는 오버리가 노르트 9회 우승과 1959-60 시즌 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이듬해에 1960-6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4강에 진출했으나 바르셀로나에게 아쉽게 탈락했고 1962-63 시즌 포칼 우승도 이끌어냈다. 비록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1963-64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기록했으며 발롱도르 10등 안에 네 번이나 들었던 우베 젤러의 활약은 당대 최고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기에 레알 마드리드와 인터 밀란에서 영입을 타진했으나 젤러가 함부르크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부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1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0 멕시코 월드컵까지 네 번에 월드컵에 참가해 모두 주전으로 활약하며 모든 대회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선 주장으로 디 만샤프트를 이끌고 결승에 진출하는 활약을 보여줬다.

우리들의 우베라 불렸던 서독 축구계의 인기 스타 우베 젤러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되어 1960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들었다.

 

 

12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생년월일: 1892년 7월 18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CA 파울리스타노

축구 역사상 비공식전 포함 최다 득점자이자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초의 스타플레이어로 당시 브라질 축구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이라는 장벽을 걷어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내려갔으며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흑인이 활약할 수 있는 판을 깔아놓은 기념비적인 인물이며 특유의 저돌적이면서 날쎈 플레이스타일로 인해 호랑이라는 벼령으로 불렸다.

CA 파울리스타노에서 활약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상파울루로 이적한 뒤에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횟수를 한번 추가했으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에 개인 통산 9회 수상했고 1925년에는 유럽 투어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열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는데 특히 파리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파울리스타누는 프랑스를 상대로 7:2 대승을 거두며 유럽인들을 충격에 빠트렸는데 브라질의 전문가 알레산드리 다코스타 박사는 이를 두고 "아르투르의 축구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 경기를 보고서도 말이죠. 아르투르는 이로써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왕 중의 왕이 된 거죠!"라고 찬사를 보냈다.

셀레상에서도 1919년과 1922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으며 특히 1919년 대회에서는 우승은 물론 득점왕과 MVP까지 모두 석권했는데 이때를 두고 알레샨드리 다코스타 박사는 "그때 당시를 돌아보면 아르투르가 축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만 해도 브라질 언론은 경마에 대한 기사만 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아르투르가 골을 넣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까지 우승을 하자 구석에 몇 줄 실리던 게 고작이었던 축구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죠! 아르투르는 축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브라질에서 축구가 인기 종목으로 오른 것은 물론 흑인도 축구에 제약 없이 참가하게 된 부분에는 프리덴라이히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11위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생년월일: 1913년 9월 6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펠레 이전 브라질 축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정확한 위치 선정과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왼발 슈팅 능력을 갖췄으며 고무인간이라 불렸을 정도로 훌륭한 탄력성을 겸비해 축구 역사상 최초로 바이시클 킥을 시도했으며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도 능해 인사이드 포워드로도 활약할 수 있었던 전천후 공격수였다.

바스쿠 다 가마, 보타포구, 플라멩구에서 캄파오네투 카리오카를 각각 한 번씩 우승하며 개인 통산 3회 우승을 이뤄낸 레오디나스는 1940년에는 득점왕도 거머쥐었으며 상 파울루로 이적한 이후에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사스트레와 함께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을 이뤄냈다. 실제로 레오디나스의 활약과 인기가 대단해 브라질의 초콜릿 제조업체인 렛타는 레오디나스의 허락하에 그의 별명인 검은 다이너마이트의 포르투갈어인 Diamante Negro라는 이름의 초콜릿을 발매했다. 

레오니다스는 셀레상 유니폼을 입고도 맹활약했는데 특히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발군이었는데 그가 결장한 4강 이탈리아전에서 브라질은 패배를 당해 3위에 머물렀음에도 7골을 득점한 레오디나스의 활약은 대단해 결승에 오른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선수들을 제치고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당연하게도 브라질 축구 명에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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