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윙 40위~3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레프트윙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윙 40위~31위

토르난테 2024. 3. 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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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40위 카누테이루

 


생년월일: 1932년 9월 24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FC

좌측면의 가린샤라 불렸던 1950년대 브라질의 또 다른 천재로 질풍 같은 스피드와 가린샤에 버금가는 드리블 돌파는 물론 면도날 같은 왼발 크로스는 물론이고 우수한 슈팅 스킬을 통해 직접 득점에도 능했다.

상 파울루 구단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카누테이루는 1957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끌기도 했으며 펠레와의 라이벌리도 유명해 1958년 파카엠부 경기장에서의 산투스와의 우천 경기에서 펠레와 카누테이루가 서로 두 골씩 득점해 2-2로 비긴 경기는 희대의 명승부로 회자된다.

다만 이러한 우수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알콜 중독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던 카누테이루는 술에 취해 대표팀에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제명당했으며 결국 그 술로 인한 병으로 만 4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정도로 술이 원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였다.



39위 레오넬 산체스

 


생년월일: 1936년 4월 25일
국적: 칠레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칠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침투하는 컷인 플레이에 이어 벼락같이 강력한 왼발 킥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데드볼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아름다운 플레이로 푸른 발레라 불렸던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공식전 412경기에 출전해 167골을 득점한 레오넬 산체스는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과 컵대회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리오넬 산체스 개인도 칠레 최고의 레프트윙에 12회 선정되었으며 리그 MVP격인 칠레 최고의 축구 선수에도 5회 선정되는 등 당대 칠레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이름을 날렸고 말년에는 라이벌 콜로콜로에서 말년을 보내며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추가해 개인 통산 7회 우승을 달성했다.

칠레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레오넬 산체스는 1956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끌며 대회 최고의 레프트윙으로 평가받았고 1962 칠레 월드컵에서도 지진으로 실의에 빠진 자국민들을 달래는 뛰어난 활약으로 조국을 월드컵 3위에 올려놓으며 팬들을 위로했으며 이 대회에서 레오넬 산체스는 공동 득점왕에 올랐으며 가린샤, 마소푸스트, 마리우 자갈루 등과 함께 대회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은퇴한 뒤에는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이 선정한 20세기 남미 최고의 선수 40위에 랭크되었다.

 

 

38위 한스 셰퍼

 


생년월일: 1927년 10월 19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쾰른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 서독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민첩한 몸놀림과 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수를 돌파하며 벼락같은 슈팅을 활용한 득점력을 보여주는 윙 포워드였으며 리더십도 훌륭해 소속팀 쾰른과 대표팀에서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FC 쾰른의 창단 멤버이자 원 클럽맨이었던 한스 셰퍼는 서부 오베리가 5회 우승과 3회 준우승, 1962-63 시즌 독일 챔피언쉽 우승과 2회 준우승, 그리고 1963-64 시즌 초대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면서 역사가 짧은 쾰른이 단시간에 명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주장이자 핵심 선수로 이끌었고 셰퍼 개인도 1963년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란, 발터 형제, 몰록 등과 함께 매직 마자르라고 불리던 헝가리를 꺾는 베른의 기적을 이끌어내 우승을 차지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4위에 올랐고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발터의 뒤를 이어 디 만샤프트의 주장을 역임했다.

 


37위 에데르

 


생년월일: 1957년 5월 25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80년대 남미 정상급 윙어로 스피드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테크니컬한 볼 컨트롤 능력과 기상천외한 크로스와 패스를 통한 어시스트 능력은 물론 대포라고 불렸을 정도로 강력한 왼발 킥력을 활용한 왼발 슈팅으로 득점력을 보여줬다.

그레미우와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전성기를 보낸 에데르는 전자의 클럽에서는 캄페오나투 가우초 2회 우승을 이뤄냈고 후자의 클럽에서는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4연패를 포함해 6회 우승을 이뤄내며 이름을 날렸다. 에데르 개인도 1983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드는 활약상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이 시즌의 활약을 인정받아 1983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셀레상에서도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주전 공격수로 참가해 황금의 사중주의 지원을 받았는데 특히 조별리그 스코틀랜드전 독수리 슛 득점과 소련전 중거리 아웃프런트 골은 아직도 회자되는 원더골이다.

 


36위 레나르트 스코그룬트

 


생년월일: 1929년 12월 24일
국적: 스웨덴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50년대 인테르의 슈퍼 스타로 스피드와 기본기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왼발 드리블 돌파의 스페셜리스트로 금발을 한 선수가 엄청난 스피드로 경기장을 뛰어다는다고 흔들리는 옥수숫대라 불렸다.

자국의 함마르뷔 IF에서 데뷔해 AIK 포트볼의 알스베스칸 우승을 이뤄내 주목받았던 스코그룬트는 인테르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그레노리 삼총사를 앞세운 밀란과 데니쉬 삼총사를 앞세운 유벤투스를 밀어내고 네라주리 군단의 세리에 A 2연패를 이뤄냈다.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국을 결승 리그에 올리는 과정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인테르로 이적해 프로선수가 된 대가로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지만 규정이 바뀌어 1958 스웨덴 월드컵에는 대표선수로 함린, 시몬센, 리드홀름, 그렌과 같은 왕년의 세리에 A 스타들과 함께 공격 편대를 이루며 조국을 월드컵 결승까지 올려놓았으나 펠레의 맹활약으로 인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35위 마리오 코르소

 


생년월일: 1941년 8월 25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5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6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윙어로 적은 활동량에도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파케티의 오버래핑을 도왔으며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왼발 킥력과 비단뱀처럼 부드러운 드리블 실력을 갖춰 팬들로부터 '뱀 인간', '신의 왼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인테르 밀란에서 보낸 코르소는 1960년대 중반,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인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이끌었는데 지아친토 파케티와 함께 왼쪽에서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며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과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뤄내는 등 구단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소 개인도 1964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7위에 올랐으며 1965년에는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5위에 올랐다.

다만 아주리 감독인 에드문도 파바리 감독이나 그 후임자인 페루치오 발카레지 감독과의 불화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거의 소집되지 않아서 대표팀에서는 클럽팀에서의 위대한 흐름을 이어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스코그룬트 개인도 경쟁자인 자갈루나 장 뱅상, 그리고 한스 셰퍼를 제치고 다수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34위 후안 라몬 베론

 


생년월일: 1944년 3월 17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에스투디안테스

그 유명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아버지로 레프트윙에서 활약하며 유려한 볼 컨트롤은 물론 바이시클킥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수벨디야의 지휘 아래 1967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전기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남미 무대에서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를 이뤄냈고 특히 1968년 대회 결승전에서는 파우메이라스를 상대로 1,2,3차전에 모두 득점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해 유럽 무대의 조지 베스트, 드라간 자이치와 함께 1968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에스투디안테스의 황금기를 이끈 화려한 클럽 커리어와는 다르게 대표팀에서의 족적은 미미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포지션 경쟁자인 오스카르 마스가 더 중용되었다.



33위 펠릭스 로스타우

 


생년월일: 1922년 12월 2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64cm / 몸무게 64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40년대 남아메리카 정상급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라 마키나라고 불렸던 리버 플레이트의 공격 조합에서 다른 동료들과의 스위칭 플레이로 유명했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상대 아웃사이드 라이트를 직접 마킹하며 수비에 가담하기도 했던 선구자였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모레노, 라브루나, 페데르네라 등과 함께 공격 조합을 구성해 라 마키나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이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과 코파 이바르구렌 3회 우승 및 우루과이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뤄냈음은 물론 국가적인 경제위기로 로스타우는 페데르네라, 모레노, 로시, 디 스테파노 등이 팀을 떠나고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라브루나와 함께 로스 미요나리오스를 지탱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강세를 이끌며 코파 아메리카 3연패를 주전으로 이뤄내며 아르헨티나의 시대를 쓰는데 크게 공헌했다.

 

 

32위 에릭 브룩

 


생년월일: 1907년 11월 27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

1930년대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이끈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근육질의 탄탄한 피지컬로 상대 수비수의 견제를 잘 견뎌냈으며 다양한 트릭을 가지고 교활하게 상대를 속이는 동시에 빠르고 정확한 플레이를 즐겼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브룩은 팀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명성을 떨치며 1933-34 시즌 FA컵 우승과 1936-37 시즌 풋볼 리그 우승을 이끌었는데 구단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을 이끈 공을 인정받아 맨체스터 시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삼사자 군단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하던 브룩은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와 하이버리에서 열린 치열한 경기에서는 선제골을 포함한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3-2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위 칼 아게 프라에스트

 


생년월일: 1922년 2월 26일
국적: 덴마크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40년대 하반기와 195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렸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북유럽 특유의 파워풀한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특히 대포알 같은 왼발 슈팅으로 이름을 날렸다.

덴마크의 외스터브로스 볼드클럽에서 쾨벤하운컵 우승을 이뤄내 주목받은 프라에스트는 칼 아게 한센, 요니 한센과 함께 데니쉬 트리오를 구성해 덴마크 대표팀을 이끌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아마추어로 남기를 거부하고 프로 팀인 세리에 A의 유벤투스투로 떠났다.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그레놀리 삼총사와 치열한 라이벌리를 구축했으며 유벤투스의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인테르의 니어스 이스테반이나 렌나르트 스코그룬트와는 라이벌리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프라에스트는 은퇴한 이후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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