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20위~1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공격형 미드필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20위~11위

토르난테 2024. 2. 1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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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20위 프리츠 발터

 


생년월일: 1920년 10월 31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란츠 베켄바우어, 로타어 마테우스 등과 함께 독일 축구사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비 오는 날에 특히 강했던 서독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 나치 독일 시절에 데뷔해 서독 축구의 부흥을 이끈 다재다능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훌륭한 리더십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으며 특히 비 오는 날에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줘 비 오는 날을 '프리츠 발터의 날'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잠시 임대를 간 것을 제외하면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보낸 발터는 오베리가 주트베스트 10회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다섯 번 진출해 두 번 우승했으며 최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포워드 부문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카이저슬라우테른 구단 측도 상술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홈구장의 이름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으로 바꾸기도 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했던 서독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조별 리그에서 자신을 8-3으로 이겼던 헝가리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는, 일명 베른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3골 6도움을 기록하며 ESPN 선정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만 37세의 나이에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19위 오르트 죄르지

 


생년월일: 1901년 4월 30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5cm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1910년대 하반기와 1920년대 상반기 MTK 헝가리아 왕조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하프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했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우아한 볼 터치와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패싱력을 바탕으로 플레이메이킹에 능했으며 득점력도 우수했다.

MTK 헝가리아에서 정규리그 8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리그 득점왕 3회 수상 및 1918년 헝가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오르트는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10년간 주전으로 활약했다. 말년에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활약하며 프랑스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여러 축구 역사 전문가로부터 1920년대 상반기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으며 실제로도 헝가리 축구계의 큰 발전을 이끌었다.

 


18위 페드로 로차

 


생년월일: 1942년 12월 3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브라질의 펠레에 대한 우루과이의 대답으로 1960년대 말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덕목을 모두 갖춘 것은 물론 우수한 신체 능력과 우수한 득점력마저 겸비해 상대팀의 목숨을 한 순간에 끊어버린다는 뜻의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으로 불렸으며 펠레는 그를 두고 "내가 붙어본 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라는 평가를 했다.

페냐롤의 황금기에 데뷔한 로차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1961년 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탈컵 트레블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끌었고 로차 개인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인터콘티넨탈 슈퍼컵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브라질 무대의 상 파울루에서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개인적으로도 1972년 브라질 세리 A 득점왕을 수상했고 1973년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4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에 올랐고 1977년에는 전국 리그 우승의 영광을 누렸던 로차는 두 구단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되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도맡았던 로차는 1962 칠레 월드컵부터 1974 서독 월드컵까지 네 번의 월드컵에 참가해 부상으로 조기에 하차한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196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경기 3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17위 엔조 프란체스콜리

 


생년월일: 1961년 11월 12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CA 리버 플레이트

1980년대와 90년대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트레콰르티스타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깔끔한 볼 터치와 상대의 예측을 비웃는 킬 패스가 일품이었고 득점력 또한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득점왕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활약을 본 지네딘 지단은 그를 우상으로 생각했으며 프란체스콜리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엔조로 지었다.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프란체스콜리는 1985-86 시즌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석권했으며 이후 유럽으로 진출해서 라싱 파리와 마르세유, 칼리아리에서 활약했으며 1989-90 시즌에는 마르세유에서 리그 앙 우승을 이뤄냈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는 전기리그 3회 우승과 후기리그 1회 우승은 물론 1996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주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신인 선수들을 잘 통솔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프란체스콜리는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수로 출전해 소크라치스가 이끄는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에 크게 공헌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으며 198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우승했다. 그리고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을 거두며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이토록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마라도나나 지쿠를 능가하는 화려한 모습을 보였지만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수상했으며 리그 MVP에 2회 선정되었고 1984년과 1995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1위에 올랐고 1985년 구에린 스포르티보지 선정  세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고 선수 은퇴 이후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선정되었다.

 


16위 후안 스키아피노

 


생년월일: 1925년 7월 28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우루과이 축구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195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창의적이면서 정확한 패싱력을 보유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번 뒤집었다.

1943년에 페냐롤에서 데뷔해 축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 후안 스키아피노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이끌며 1949 시즌,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낸 업적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과 토르네오 데 아너 7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남미 무대를 평정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두 번의 월드텁에 참가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에는 유럽 무대에 도전하며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노르달, 리드홀름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리드홀름과 함께 세리에 A 3회 우승과 1956년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7-58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15위 미카엘 라우드루프

 


생년월일: 1964년 6월 15일
국적: 덴마크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90년대를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갖춰야 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었으며 특히 상대 수비의 예측을 비웃는 창의적인 킬패스로 찬스를 만들고 팬텀 드리블을 구사해 상대 수비진을 무너트리며 팬텀 드리블을 유행시킨 부분으로도 유명하다..

유벤투스와 라치오 바르셀로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며 비안코네리 군단에서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크루이프의 드림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라리가 4연패와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그리고 1991-92 시즌 마지막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크루이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자유계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친정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본인의 다짐대로 크루이프에게 복수에 성공했다.

덴마크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1984부터 1998 프랑스 월드컵까지 예선을 통과한 모든 대회를 참가했으나 하필이면 딱 UEFA 유로 1992만 감독과의 불화로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대회에서 덴마크가 우승했다. 그래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라우드롭은 노익장을 보여주며 덴마크를 8강에 올리며 올스타 팀에 들었다.

1982년과 1985년에 덴마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4-95 시즌에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라우드루프는 2004년에 UEFA 주빌리 어워드에 선정되며 덴마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14위 산드로 마촐라

 


생년월일: 1942년 11월 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와 라이벌 지안니 리베라와 함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손꼽히며 훌륭한 슈팅 스킬과 창의적인 패싱력, 탄탄한 볼 컨트롤과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필수적인 덕목은 물론 기동력도 탁월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선수 생활을 오직 네라주리 군단에서만 보낸 산드로 마촐라는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루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던 마촐라는 개인적으로도 963-6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고  1964-65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 안에 네 번 들었으며 1971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상대 수비진을 압박해주는 스타일 덕분에 아주리 군단에서는 리베라보다 더 중용되었으며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는 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결승행을 도왔다.



13위 지안니 리베라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AC 밀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로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을 가진 것은 물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패싱력과 정교한 드리블로 유명했으며 1972-73 시즌에는 득점왕에 오른 적도 있었을 정도로 득점력도 훌륭했다.

AC 밀란에서 19년간 활약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를 이뤄낸 리베라는 유럽에서도 유러피언 컵 2회 우승과 컵 위너스 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1969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1972-73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다.

소속팀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아주리에선 다소 아쉬웠던 리베라는 19세에 데뷔해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전성기 때에는 전술상의 이유로 전반전을 포지션 라이벌 산드로 마촐라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후반전에 주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조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유로 19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12위 호베르투 히벨리누

 

 

생년월일: 1946년 1월 1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SC 코린치안스

펠레 이후, 지쿠 이전 브라질 대표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플립플랩 드리블의 시조로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줬으며 원자폭탄 킥이라 불렸던 매서운 왼발 프리킥을 보여줬다. 즉 킥과 드리블, 패스에서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코린치안스와 플루미넨시에서 전성기를 누린 호베르투 히벨리누는 코린치안스에서는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의 기세에 밀려 우승컵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펠레, 아데미르 다 기아, 페드로 로차와 함께 상 파울루 주의 4대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고 1971년에는 브라질 세리 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플루미넨시에서는 플라멩구의 지쿠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지역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자신을 세상에 알린 히벨리누는 1970년에는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팀의 핵심 선수로 팀 공격을 이끌며 팀이 4위에 올라서는데 공헌했다. 히벨리누는 남미 올해의 선수 10위 안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1위 레이몽 코파

 


생년월일: 1931년 5월 5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스타드 드 랭스

'나폴레옹'

1950년대 유럽을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프랑스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키가 작았지만 뛰어난 리더십과 우수한 기량을 보여줘서 나폴레옹이라 불렸던 선수다. 양발 사용 능력과 드리블 돌파 능력이 특히 대단했으며 상대 수비의 허를 찌르는 킬 패스로 스트라이커들을 지원하는데 능했으며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측면 공격수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스타드 드 랭스의 전성기를 이끈 레이몽 코파는 프랑스 리그 2회 우승은 물론 1953년에는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첫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는 랭스를 결승에 올렸지만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에는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에 밀려 자신의 포지션에서 플레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도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며 라리가 2연패와 유러피언 컵 3회 연속 우승, 그리고 1957년 라틴 컵 우승에 공헌하며 저승사자 군단의 신화를 쓰는데 일부 기여하기도 했으나 다시 랭스로 돌아가 리그 우승 2회를 더 추가하며 랭스에서 총 4번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1950년대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고 두 번의 월드컵에 출전한 코파는 1958년 대회에서는 퐁텐, 장 뱅상, 피앙토니, 위스네스키와 함께 위협적인 공격 편대를 구상했으나 펠레의 브라질에 패해 3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코파는 3골 9도움이라는 우수한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를 수상함으로써 유럽 국적의 선수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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