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50위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생년월일: 1954년 4월 1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70년대 하반기와 198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리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드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패스를 모두 겸비했으며 트레콰르티스타 자리에 위치하다가도 포백 앞으로 내려가서 빌드업을 주도하기도 하는 바비 찰튼 스타일의 현대적인 미드필더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무려 15년간 활약하며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오른 안토뇨니는 1974-75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으며 1981-82 시즌에는 승점 1점 차이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다. 안토뇨니 개인도 1980년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과 세계 최우수 선수 5위에 올랐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4회 선정되어 1982년에는 최고 성적인 11위에 랭크되었다.
아주리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안토뇨니는 상술했던 헌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베아르초트 감독의 눈에 들어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을 4위에 올렸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아주리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49위 리카르도 보치니

생년월일: 1954년 1월 2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마라도나가 직접 밝힌 우상으로 1970~80년대 남미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뒤에도 눈이 달렸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로 드넓은 시야와 뛰어난 패스 센스에서 나오는 킬패스로 인해 팬들은 그의 날카로운 킬패스를 '보치니풍의 패스'라고 불렀으며 패스뿐만이 아니라 드리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현역 은퇴 이후에 이벤트로 한 경기 뛴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 전부를 인데펜디엔테에서만 보냈으며 19년간 활약하며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보치니는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4회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를 포함한 4회 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73년 대회에서는 아약스 대신 참가한 유벤투스의 골키퍼 디노 조프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보치니 개인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10위 안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83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 3위를 기록했고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지만 대표팀에서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았던 마라도나의 백업 선수로 발탁되어 우승을 경험했다.
48위 발렌틴 이바노프

생년월일: 1934년 11월 19일
국적: 러시아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토르페도 모스크바
1950년대 하반기와 1960년대 상반기 소련을 대표하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어난 창의성으로 예측 불가능한 킬패스와 드리블로 상대 수비라인을 붕괴시키고 골 찬스를 만드는데 능하며 윙어와의 스위칭 플레이에도 일가견이 있음은 물론 골 결정력도 우수했다.
커리어 전부를 토르페도 모스크바 한 구단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이바노프는 소련 탑 리그 우승 2회를 이뤄냈으며 1960년에는 리그 우승은 물론 소비에트 컵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이바노프 개인도 소련 탑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9회에 선정되었다.
소련 대표팀에서 활약은 더 빛났는데 1956 올림픽 금메달을 시작으로 1960년 초대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뤄냄과 동시에 대회 득점왕 및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두 번의 월드컵에서 조국의 8강 진출을 이뤄냈는데 특히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대회 득점왕에 올랐을 정도로 맹활약했으며 UEFA 유로 1964에서도 조국의 준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47위 드라고슬라프 세큘라라치

생년월일: 1937년 11월 8일
국적: 세르비아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4kg
주 소속팀: 츠르베나 즈베즈다
1950년대 하반기와 1960년대 상반기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우수한 턴 동작과 유려한 드리블로 상대의 압박을 쉽게 따돌렸으며 우수한 전술안과 창의적인 패스를 앞세운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전성기를 누린 세큘라라치는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 5회 우승과 유고슬라비아 컵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세큘라라치 개인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츠르베나 즈베즈다 구단측은 그를 구단의 여섯 별 중 두 번째 별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1956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을 시작으로 UEFA 유로 1960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62 칠레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올랐다. 그리고 두 대회에서 모두 올스타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특히 1962 칠레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오른 부분은 백미다.
46위 라르비 벤바렉

생년월일: 1917년 6월 16일
국적: 프랑스, 모로코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블랙펄, 일명 흑진주라 불렸던 194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2차 세계 대전으로 커리어가 끊길뻔했으나 뛰어난 자기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30대가 넘어서도 기량을 유지했으며 탄탄한 기본기와 뛰어난 창의력, 그리고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플레이메이킹에 능했으며 득점력도 준수한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모로코에서 축구를 시작한 벤바렉은 프랑스에서는 마르세유, 스타드 프랑스에서 활약했고 여러 인종차별을 이겨낸 뒤 프랑스 대표티메서도 활약했던 첫 번째 흑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스페인 무대에서 활약했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라리가 2연패와 1950-51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으며 특히 마드리드 더비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4연승을 이뤄냈는데 1950-51 시즌에는 멀티골을 터트리며 6-3 대승을 주도하며 맹활약했다. 이런 활약을 본 펠레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축구의 왕이라면 벤바렉은 축구의 신이다."
45위 폴 개스코인

생년월일: 1967년 5월 27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토트넘 핫스퍼
1990년대를 풍미한 악마의 재능으로 알코올 중독과 무절제한 사생활로 자신의 재능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빠른 스피드와 정교함을 겸비한 호쾌한 전진 드리블과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킬패스와 슈팅 스킬을 겸비했으며 유려한 볼 컨트롤도 겸비했다.
뉴캐슬에서 데뷔해 1987-88 시즌 PFA 올해의 영 플레이어에 선정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개스코인은 토트넘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토트넘에서는 FA컵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나 라치오 이적 이후 부진한 기량과 무절제한 사생활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레인저스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스코티쉬 프리미어 디비전 2연패는 물론 1995-96 시즌에는 스코티쉬 컵을, 1996-97 시즌에는 스코티쉬 리그컵을 우승하며 2년 연속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다.
삼사자 군단에서도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UEFA 유로 1996에 참가했으며 두 대회에서 모두 팀의 준결승 진출에 공헌했으며 이를 인정받아 두 대회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은퇴한 이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4위 안드레아스 묄러

생년월일: 1967년 9월 2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헤슬러와 함께 1990년대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테너로 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 능력과 정교한 테크닉에서 나오는 드리블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득점력도 우수해 가끔은 해결사 역할까지 도맡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해 도르트문트와 유벤투스에서는 전성기를 누렸는데 전자의 구단에서는 분데스리가 2연패는 물론 친정팀 유벤투스를 결승에서 만나며 1996-97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크루제이루를 제압하며 우승하고 대회 MVP를 석권했다. 묄러 개인은 1997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6위에 올랐고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으며 분데스리가 도움왕을 2회 수상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A매치에 85경기에 출전해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UEFA 유로 1992 준우승과 UEFA 유로 1996 우승을 이뤄냈으나 경고 누적과 부상 등으로 결승전과는 인연이 없었다.
43위 아데미르 다 기아

생년월일: 1942년 4월 3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인 도밍구스 다 기아의 아들이자 1960년대 남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유려한 볼 컨트롤 능력과 세련된 패싱력과 간결한 연계 능력을 바탕으로 골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다.
파우메리아스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로 902경기에 출전해 153골을 기록했으며 팀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과 브라질 전국리그 4회 우승, 그리고 타사 브라질 1회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을 이뤄내며 팬들로부터 O Divino, 신이라고 불렸으며 1972년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5위를 랭크했다.
다만 셀레상에서는 전술 문제로 오랜 기간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4위로 이끌며 호부호자의 명성을 이어갔다.
42위 하이

생년월일: 1965년 5월 15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7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FC
브라질의 황금의 사중주의 일원인 소크라치스의 동생으로 형 소크라치스와 마찬가지로 키가 컸으나 마른 체형이었던 형과 다르게 다부진 체형으로 몸싸움에서 장점을 드러냈으며 형보단 못했지만 그래도 브라질 대표팀 주전 경쟁 정도는 거뜬한 수준의 세련된 볼 컨트롤과 전진드리블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킥력을 토대로 골 찬스를 만드는 회심의 롱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거나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골문을 노리는 부분에도 능했다.
텔레 산타나 체제에서 상 파울루가 구단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하이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6회 우승과 1991 시즌 브라질 세리 A 우승,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이뤄냈고 1992년에는 아름다운 축구로 유럽 무대를 제패했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더 아름다운 축구를 보여줬음은 물론 하이가 멀티골을 기록해 상파울루의 2-1 승리를 이끌며 인터콘티넨탈컵 MVP와 1992년 남미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유럽 무대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뒤에도 구단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1993-94 시즌 리그 앙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4-95 시즌에는 쿠프 드 프랑스와 리그컵을 각각 2회 우승과 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이뤄냈고 1995-96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해당 시즌에 ESM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87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해 1991 코파 아메리카에서 준우승을 이뤄냈다.
41위 자이르 다 호사

생년월일: 1921년 3월 21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파우메리아스
무려 20년 가까이 브라질에서 맹위를 떨쳤던 인사이드 포워드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와 유려한 볼 컨트롤 능력을 겸비했으며 프로 통산 450골을 넘게 득점했을 정도로 득점력도 대단한 완성형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마두레이라 시절부터 브라질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로 명성을 날렸으며 바스쿠 다 가마, 플라멩구, 파우메리아스, 산투스에서 모두 정상급 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3개의 주립 리그에서 7번 우승했으며 1951년에는 파우메리아스 소속으로 유럽과 남미의 강팀이 참여한 토너먼트인 코파 리우에서 데니쉬 트리오를 앞세운 유벤투스를 꺾고 우승했으며 노장으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산투스에서 자신보다 19살 어린 초신성 펠레와 같이 인사이드 포워드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49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결승전 멀티골을 포함해 8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지지뉴와 바스쿠 다 가마의 삼각 편대와 조합을 맞추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여줬으나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우루과이에게 일격을 당하며 빛이 바랬다.
이전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60위~51위
다음 회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40위~3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