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우어 옹 별세

박수용의 토르난테/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우어 옹 별세

토르난테 2024. 1. 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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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1일 ~ 2024년 1월 9일, 향년 78세

 

 

반박이 불가능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자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그리고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데어 카이저이자 리베로 유행의 선두주자, 그리고 바이에른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고 축구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 행정가, 경영인으로 모두 최고 레벨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 프란츠 베켄바우어 옹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4년, 1군 시절 초반의 프란츠 베켄바우어. 유망주 시절에도 크게 주목받았던 하프백이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 당대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바비 찰튼을 막아내다. 그러나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에 무너지며 준우승을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베켄바우어의 활약은 널리 알려져 발롱도르 투표에서 바비 무어를 제치고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66-67 시즌,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를 상대로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더블을 이뤄내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뒤 가족과 여름휴식기를 보내는 프란츠 베켄바우어.

 

 

 

1968-69 시즌, 생애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낸 베켄바우어. 이는 위대한 역사의 시작에 불과했다.

 

 

 

1970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 이탈리아전, 베켄바우어는 뛰어난 역량을 보이며 유럽 챔피언 이탈리아를 몰아붙였으나 이탈리아 수비수들의 거친 반칙에 의해 쇄골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한 상태라 풀타임을 소화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였다.

 

 

 

1970년대 초중반,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의 황금기를 이끈 트리오. 득점의 신 게르트 뮐러, 분위기 메이커이자 당대 최고의 골키퍼 제프 마이어, 그리고 축구 역사상 최고의 리베로 프란츠 베켄바우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UEFA 유로 1972 결승전에서 소련을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활약은 대단했으며 베켄바우어와 네처가 이끌고 게르트 뮐러가 마무리하는 람바참바 풋볼은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기력을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UEFA 유로 1972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프란츠 베켄바우어. 아약스의 트레블 및 개인의 득점왕 트레블을 이뤄낸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수상했다.

 

 

 

유러피언 컵 결승전, 상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주장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와 함께 페어플레이를 약속하며.

 

 

 

분데스리가 3연패에 이어 재경기 끝에 구단 역사상 첫 빅이어를 들어올린 바이에른 뮌헨

 

 

 

조국에서 열리는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에이스이자 최고의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와의 볼 경합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며 네덜란드의 우세를 예측한 언론들에게 결과로 보여주며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프란츠 베켄바우어.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1974-75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재차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승격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던 아픔을 유러피언 컵 2연패로 씻을 수 있었다.

 

 

 

1975-76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절대강자 생테티엔을 꺾고 유러피언 컵 3연패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바이에른이 빅이어를 영구 소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다.

 

 

 

UEFA 유로 1976에서도 재차 결승에 오른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서독 대표팀. 유럽 최초로 메이저 대회 3연패의 금자탑에 도전했다. 결승전 상대도 전력상 한 수 아래라 평가받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그러나 승부는 연장전을 넘어 승부차기까지 갔고 서독의 선봉 키커 울리 회네스의 실축과 체코의 플레이메이커 안토닌 파넨카가 마이어를 완벽하게 농락하며 페널티킥을 성공해 승부차기 끝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승리하자 좌절한 프란츠 베켄바우어.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남미 챔피언 크루제이루가 앞세운 상대 에이스 팔리냐 및 자이르지뉴와의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홈에서 2-0 승리를 거뒀고 원정에서는 무승부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다.

 

 

 

그간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의 대회 불참으로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컵을 차지할 수 없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에서 완벽하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프란츠 베켄바우어

 

 

 

유러피언 컵 3연패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그리고 UEFA 유로에서도 준우승에 그쳤음에도 출중한 활약을 펼친 덕분에 생애 두 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1976-77 시즌이 끝나고 바이에른 뮌헨을 떠난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뉴욕 코스모스에서 펠레와 함께 경기하며 축구선수로서 마지막 소망을 이룬다. 본인의 말로는 이 순간이 월드컵 우승 때보다 더 기뻤다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끝마치고 함부르크로 돌아와 옛 동료였던 바이에른 뮌헨의 파울 브라이트너를 상대하는 프란츠 베켄바우어. 베켄바우어는 함부르크에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보내다가 은퇴한다.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선수 시절에 세운 위대한 업적

 

 

 

감독으로도 선수시절 만큼은 아니어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는데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및 UEFA 유로 1988 준결승에 이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테우스, 브레메 등과 함께 우승을 차지하며 조국 독일의 통일 선물로 세 번째 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바쳤다.

 

 

 

1994년,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던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에 오른 베켄바우어. 후배 울리 회네스, 칼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바이에른을 이끌며 2009년까지 재임하다가 울리 회네스에게 회장직을 물려준 뒤 은퇴한다. 베켄바우어의 치세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2000-01 시즌 네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유럽의 3M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끌었다.

 

 

 

베켄바우어는 선수, 감독, 경영자 이외에도 행정가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1998년에는 독일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6년에는 독일 월드컵의 조직위원장으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9년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직을 은퇴한 뒤에는 FIFA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실제로 전 축구계에서 회장 제프 블래터 다음가는 힘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선수시절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와 자주 놀러 다녔다. 그러나 요한 크루이프는 2016년 3월 24일에 향년 68세의 나이로 먼저 별세했다.

 

 

바이에른 회장 직을 물러난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명예회장으로 활약하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이 흘러 요한 크루이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디에고 마라도나, 게르트 뮐러, 우베 젤러, 바비 찰튼, 펠레 수많은 친구들과 라이벌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24년 1월 8일, 프란츠 베켄바우어도 먼저 보낸 친구들을 만나러 이 세상과 작별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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