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제패했던 바이에른과 독일을 양분했던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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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제패했던 바이에른과 독일을 양분했던 클럽

토르난테 2020. 8. 1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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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라이벌들

 

분데스리가는 급여 상한제가 폐지되고 50+1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항상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그를 견제하는 한 팀과 우승 경쟁을 벌였다.

1980년대 상반기에는 함부르크, 후반기에는 브레멘이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축구의 패권을 두고 다퉜으며 1990년대에는 도르트문트, 2000년대에는 베르더 브레멘, 2010년대에는 다시 도르트문트로 바뀌며 경쟁했지만 항상 주도권은 바이에른 뮌헨이 쥐고 있었다.

2010년대 분데스리가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바이에른의 유프 하인케스와 도르트문트의 위르겐 클롭

하지만 1970년대의 바이에른 뮌헨은 화려했던 유러피언 컵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리그에서는 주도권을 내줬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1970년대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유일하게 주도권을 잡았던 클럽, 1970년대 분데스리가의 절반을 우승했던 클럽, 그때 그 시절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소개하겠다.

 

빅 이어는 네가 먹어라 마이스터 샬레는 내가 먹을 테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도 바이에른 뮌헨과 마찬가지로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로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1964년 하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부임하고 1964-65 시즌 지역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며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1965-66 시즌 첫 분데스리가에서 13위를 차지한 이후 1969-70 시즌에 하네스 바이스바일러의 주도로 첫 우승을 달성하게 되고 팀을 떠났던 유망주 유프 하인케스는 1970-71 시즌에 돌아와 팀의 2연패를 이끈다. 두 번 다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1위를 했던 것이다.

1970-71 시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선수단

이후 절치부심한 바이에른 뮌헨은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뒤른베르거와 같은 유망주들을 주전 멤버로 기용했으며 이후 3년 동안 분데스리가에서 3연패를 한다. 이 과정에서 1972-73 시즌이 종료되고서는 감독인 바이스바일러와 에이스인 귄터 네처의 갈등이 심화됐으며 네처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을 단행한다.

네처를 비롯해 시엘로프, 루프, 라우만과 같은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났지만 묀헨글라트바흐는 비트캄프, 헤닝 옌센, 디트마어 다너, 알란 시몬센 등의 선수를 영입했으며 전술도 대폭 수정해 1974-75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와 UEFA컵 더블 우승을 했다.

헤네스 바이스바일러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FC 바르셀로나로 떠났지만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우도 라텍이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루며 분데스리가 3연패를 이뤄낸다.

마이스터샬레를 드는 우도 라텍의 묀헨글라트바흐

특히 1976-77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케빈 키건의 활약에 의해 아쉽게 준우승을 머물려 전성기를 마감한다.

이렇게 1970년대를 풍미하며 다섯 번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어떤 방식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압도했을까?

 

토털 풋볼의 대열에 합류하며 트렌드를 따르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4-3-3 시스템을 채용했는데 초창기에는 득점에 능숙한 스트라이커인 코펠과 라우만, 그리고 유프 하인케스 세 명을 두고 귄터 네처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이들을 지휘했으며 다른 미드필더들은 네처를 보좌했다.

그리고 수비는 지역방어 시스템과 대인방어를 혼합해서 사용했으며 유사시에는 대인 마킹의 귀재이자 주장 베르디 포그츠에게 상대의 핵심 선수를 마킹하기도 했다.

1970-71 시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베스트 일레븐

그렇게 2회 연속 우승을 했지만 베켄바우어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리그를 세 번 연속 내주게 되었다.

바이스바일러는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리그를 되찾기 위해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이 보여줬던 토털 풋볼을 본뜬다.

1974-75 시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베스트 일레븐

수비 체제는 기존의 방식을 유지했지만 미드필더와 공격진의 배치를 바꿨으며 중앙 공격수인 시몬센과 하인케스를 측면에 두고 귄터 네처를 대체하려고 영입한 헤닝 옌센을 펄스 나인으로 기용하며 상대 수비진을 유인함과 동시에 공격 지역에서의 플레이메이킹을 맡겼다.

유프 하인케스는 옌센과 시몬센이 유인하여 만들어낸 공간으로 침투해서 주 득점 루트를 냈다. 화려한 드리블 능력과 슈팅을 겸비한 시몬센은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유프 하인케스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물론 3대 UEFA 주관 대회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득점왕을 차지한 하인케스

양 메짤라 자리에는 빔머와 다너가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량으로 상대 미드필더 견제와 측면 지역 커버를 담당했으며 수비형 미드필더 슈틸리케는 앞에 메짤라들을 지휘하며 1차 저지선 역할과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

수비는 전형적인 독일식 배치로 포 백 시스템이지만 리베로를 후방에 두었으며 자신이 맡은 지역 내에서 대인 방어를 했으며 리베로인 비트캄프는 수비 커버를 위해 자유롭게 움직였으며 중앙 수비수가 부족하자 본호프와 포그츠가 번갈아가면서 보기도 했다.

포그츠의 대인 수비력은 역대 최강을 자랑하며 월드컵 결승에서는 크루이프를 봉쇄했으며 리그에서는 베켄바우어나 오베라트 등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와 리베로들을 묶어내며 1975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대인수비의 달인 베르디 포그츠

묀헨글라트바흐는 이렇게 다른 독일 클럽들보다 선진적인 전략인 토털 풋볼을 받아들였으며 1970년대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비록 황금세대가 지나고 재정난으로 예전과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2019-20 시즌 리그를 4위로 마감하며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하며 예전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라는 말은 리버풀의 레전드였던 마이클 오웬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한 말이다.

당연하게도 라이벌 팀으로 이적하면서 저런 말을 했던 오웬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구성한 선수단에 비해 성적이 나오지 않는 길 잃은 전략가들에게는 저 말이 쓸모가 있다.

자신이 짠 전술이 상대 감독보다 좋지 못하면 당연히 그 전술을 팀의 사정에 맞춰서 모방해서 성적을 키워내야 한다.

프로라면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결과를 내는 것이고 좋은 결과를 낸 표본을 모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바이스바일러는 비판적인 모방이 가능했으며 좋은 전술을 모태로 둬도 취할 부분은 취하고 버릴 부분은 버리는 데 능했으며 이러한 그의 뛰어난 판단력과 전술적인 역량은 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한 명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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