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광고로 축구 감독을 뽑았던 이탈리아의 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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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광고로 축구 감독을 뽑았던 이탈리아의 한 클럽

토르난테 2020. 7. 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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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광고로 축구 감독을 뽑는다고?

 

성인인 독자분들은 잡코리아, 인크루트, 알바몬, 알바천국 같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알 것이다.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저런 사이트에 들어가서 구인광고를 보고 연락해서 지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축구 감독은 저런 방식으로 공개채용하지 않고 능력 있는 감독을 구단에서 미리 선임해 직접 영입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1920년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 볼로냐 FC의 구단주 체사레 메디카는 당시 축구 전술에 대한 문화가 발전한 오스트리아의 빈이라는 도시에 볼로냐의 감독 직을 맡을 사람을 구하는 구인 광고를 낸다.

그리고 한 안경을 쓴 사나이가 볼로냐의 감독직에 지원하여 합격한다. 그는 전직 축구 선수였으며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둔 뒤에는 법학 학사를 따기도 하고 체조 강사를 하기도 했다.

그 사나이의 이름은 헤어만 펠스너였다.

헤어만 펠스너 건조폼 (출처: 펨네 법정스님의 소유)

 

구단의 역사를 쓰다.

 

헤어만 펠스너가 볼로냐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의 볼로냐는 강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선수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볼로냐는 이들을 체력적으로 강인하게 훈련시켰으며 체력적인 훈련뿐만이 아니라 기본기와 드리블 훈련을 몇 시간을 시키기도 했으며 당시 유행했던 피라미드 시스템에 대한 전술 훈련도 병행했다.

이런 펠스너의 노력으로 평범한 선수였던 가스톤 발디는 이탈리아 최고의 하프백 중 하나가 되었으며 훗날 팀의 전성기를 함께 누리는 팀의 레전드인 안젤로 스키아비오와 펠리스 가스페리 같은 선수들도 발굴했으며 훗날 구단의 전설적인 수비수로 성장하는 에랄도 몬젤리오를 영입하기도 한다.

이런 펠스너의 노력에 힘입어 1924-25 시즌에 최초로 이탈리아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1928-29 시즌에는 결승에서 토리노를 꺾고 두 번째로 전국 리그를 우승한다.

1928-29 시즌 볼로냐 우승멤버 기념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에르만 펠스너이다.


펠스너는 11년간 활약하며 볼로냐를 이탈리아 최고의 클럽에 올려놓았으며 유망주 스키아비오를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시키며 그와 함께 팀의 역사를 썼다.

그리고 1929년에 세리에 A가 출범했으며 볼로냐는 첫 해에는 7위를, 이듬해에는 3위를 거둔다. 그리고 펠스너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피오렌티나로 향한다.

 

왕의 귀환

 

펠스너가 팀을 떠난 뒤 볼로냐는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가 유대계 헝가리인 베이스 아르파드를 감독으로 임명하며 다시 스쿠테토 획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즘 국가였으며 유대인을 탄압하는 나치 독일과는 동맹국이었다. 그 결과물로 이탈리아에서도 유대인에 관한 탄압이 법제화됐으며 독일의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모방해 이탈리아 인종법을 선포했다. 그 결과물로 베이스는 네덜란드로 쫓겨났다.

명장이 정부의 횡포로 쫓겨나며 감독이 공석이 된 볼로냐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영광을 이끌었으나 피오렌티나와 밀란 등 여러 팀을 떠돌았던 펠스너가 다시 돌아왔다. 스키아비오도 몬젤리오도 없었지만 그는 베이스가 꾸린 새 선수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립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1938-39 시즌 볼로냐 우승 멤버



그는 센터 하프를 스트라이커를 막는 수비수가 아닌 플레이메이커로 생각했으며 센터 하프의 안드레올로에게 후방 빌드업을 맡기는 전술을 채택하며 메토도 시스템을 공격적으로 재해석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한다.

펠스너의 볼로냐 2기는 4년간 두 번의 우승을 했으며 펠스너는 1941-42 시즌 리그에서 7위를 하는 부진을 겪자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볼로냐의 한신

 

볼로냐는 북부 이탈리아에 보잘것없는 팀이었지만 펠스너가 지휘봉을 잡으며 팀을 지휘한 이후에는 유벤투스, 인테르와 함께 이탈리아의 패권을 다투는 강호로 자리매김한다.

펠스너는 스키아비오와 몬젤리오를 발굴하고 육성했으며 그들은 볼로냐의 성공시대를 썼음은 물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의 우승을 이끈 영웅이 되기도 했다.

비록 볼로냐는 펠스너가 떠난 뒤 점점 쇠락하여 지금은 우승 도전이 아닌 세리에 A 잔류를 목표로 하는 팀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볼로냐는 네 번째로 스쿠테토가 많은 구단이며 그들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게 한 공은 펠스너의 노력과 헌신이 높은 지분을 차지한다.

펠스너와 볼로냐의 선수들

펠스너의 지휘력은 마치 항우의 초나라 군대에 항상 패했던 유방의 한나라 군대를 수습하여 결국 항우를 제압했던 한신과 같았다. 한신의 약한 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어서 강한 군대를 제압하는 방식도 펠스너의 약한 팀을 강한 팀으로 만들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과 유사했다.

비록 마지막 시즌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지만 누구도 그가 볼로냐 역사상 최고의 감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펠스너가 남긴 말을 들으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볼로냐에서 물질적, 인간적, 환경적, 스포츠 도덕의 조합에서 무한한 가치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운동선수에게 진지한 직업을 위해 최고의 방법을 찾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Ho avuto la ventura di trovare a Bologna quanto di meglio si potesse desiderare per un lavoro serio: materiale, uomo, ambiente, atleti che dal connubio delle doti tecniche e morali ricavano un potenziale di illimitato valore"

박수용의 토르난테-동네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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