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벤투스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구단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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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구단이 된 이유

토르난테 2020. 6. 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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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구단

 

보통 유럽의 축구 구단들은 지역 주민들이 만든 클럽이며 이런 지역 주민들의 서포팅으로 구단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키며 지역을 대표해 다른 지역의 팀들을 꺾으며 같은 지역의 다른 팀들과 라이벌리를 구성하며 더비 매치를 벌여 지역 내에서의 구단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넘어 한 나라를 대표하며 전국에 팬덤을 지닌 전국 규모의 구단들도 있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네덜란드의 아약스가 유명하다.

그럼 이탈리아의 전국구 규모의 구단은 어디일까? 유벤투스와 인터 밀란, AC 밀란이 생각 날 것이다. 하지만 인터 밀란이나 AC 밀란은 해외 팬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지지받는 구단은 유벤투스이다.

유벤투스는 언제부터 전국에서 가장 인기많은 구단이었을까? 이탈리아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인기가 많은 구단이 여러 구단 있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은 구단은 유벤투스가 최초였다. 그들은 어떤 일을 계기로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민 구단이 되었을까?

 

위기의 카테나치오를 극복한 유벤투스

 

카테나치오는 기본적으로 대인 방어를 기조로 하는 팀이다. 앞 선에 수비수들은 자기 지역의 공격수를 마킹하고 수비수가 떠난 빈 공간을 리베로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커버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성공을 거두며 인테르와 AC 밀란은 유러피언 컵에서 두 차례 씩 우승을 했으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도 유로에서 우승을 했으며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하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미헬스가 이끄는 아약스가 토털 풋볼이라는 일대 혁신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으며 분업화된 전술인 카테나치오는 토털 풋볼의 전원 공격과 전원 수비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크루이프가 뛰는 아약스는 유러피언 컵에서 유벤투스와 인테르를 모두 격파했으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도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폴란드의 스위칭 플레이에 말려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이탈리아 구단들은 유럽 대항전에서도 부진하는 암흑기를 겪는다.

회장 보니페르티, 감독 트라파토니, 주장 디노 조프


이에 유벤투스의 레전드 선수이자 회장인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는 1976년에 밀란의 레전드 지오반니 트라파토니를 감독에 앉히며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고전적인 카테나치오를 융합하는 장기적인 전술적 프로젝트와 이에 따라 대대적인 유망주 발굴과 이들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디노 조프, 주세페 푸리노, 로베르토 베테가, 프랑코 카우시오라는 기존 주축들을 중심으로 가에타노 시레아, 클라우디오 젠틸레, 파울로 로시, 마르코 타르델리 같은 유망주들을 팀의 주축으로 삼으며 이탈리아인 중심의 팀을 완성시켰으며 플라티니와 보니엑이라는 훌륭한 용병으로 부족한 공격력을 메꿨다.

그리고 이들은 트라파토니 감독과 함께 여섯 번의 세리에 A 우승과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그리고 UEFA컵과 UEFA 컵 위너스 컵을 모두 우승했으며 1984-85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며 최초로 UEFA 주관의 세 개의 대회를 모두 우승하며 UEFA 플라크를 받았다.

UEFA 회장 자크 조르주(왼쪽)에게 UEFA 플라크를 수여받는 보니페르티


이런 성공을 거둔 유벤투스는 국민들의 인기 구단으로 떠올랐으며 게다가 유벤투스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유벤투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삼은 이탈리아 대표팀은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유벤투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전국을 덮게 된다.

그럼 트라파토니는 어떻게 카테나치오와 토털 풋볼이라는 상반되는 전략을 융합시켰을까?

 

해결책은 조나 미스타

 

조나 미스타, 단어의 뜻부터가 이탈리아어로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공간 활용이란 뜻이다.

리베로를 포함한 세 명의 중앙 수비수를 두고 왼쪽에는 측면 수비수를 두지만 오른쪽에는 윙어를 두는 대형으로 수비수를 네 명, 미드필더를 네 명, 공격수를 두 명을 두지만 4-4-2 시스템보다는 3-5-2 시스템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4-3-3 시스템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유벤투스의 조나 미스타 대형


오른쪽 센터 백이 오른쪽을 커버할 때 수비형 미드필더가 그 빈자리를 커버하며 레프트 백은 공격을 지원한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는 넓은 지역을 커버하며 상황에 따라 공격가담과 수비 가담을 하며 트레콰르티스타는 유사시에는 3선 지역까지 내려와서 빌드업 과정을 주도하기도 한다.

공격 상황에서는 윙어나 트레콰르티스타가 투 톱을 보좌하며 최소한 세 명이 공격하며 세 명이 공격할 시에는 레프트 포워드는 레프트 윙어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폴란드의 레전드 보니엑도 레프트 윙어 출신이기에 저렇게 기용되었으며 베테가는 다재다능한 공격수라 저 자리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최선의 플레이를 했다.

모두 공격에 나설 때는 세 명의 수비수만 각자 지역에서 대기하며 수비시에는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를 혼용하는데 최전방의 두 명의 공격수를 제외한 여덟 명이 수비에 가담하며 수비수들이 맡은 지역으로 중앙 미드필더나 측면에 배치된 선수들이 지원에 나선다.

조나 미스타는 선수들의 뛰어난 공간 활용 능력과 탄탄한 조직력이 기반이 되어야 하며 이에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수준의 선수들을 다수 영입했으며 영입하지 못한 자리에는 플라티니와 보니엑을 영입하며 팀을 강하게 구성했다.

토털 풋볼과 카테나치오를 융합한 조나 미스타로 훌륭한 성적을 거둔 유벤투스는 대표팀의 우승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연이은 유럽 대항전에서의 선전으로 세리에 A를 UEFA 리그 랭킹 1위에 올려놓으며 이탈리아의 국민 구단으로 자리 잡는다.

 

보니페르티와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가 축구계에 남긴 것

 

보니페르티와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를 국민 구단으로 만들었으며 그들이 양성한 유망주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이 다시 강호로 올라서며 월드컵에서 우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트라파토니의 전술인 조나 미스타는 1980년대의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포메이션이었으며 사키이즘이 등장한 이후에도 사용했으며 90년대 중반까지 사용하기도 하며 훗날에는 스리 백으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조나 미스타는 이탈리아를 넘어 해외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독일의 유프 데어발은 이를 모방해 백 스리 시스템을 만들고 측면에 두 명의 윙백을 두는 3-5-2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이 3-5-2 시스템은 2000년대 상반기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포메이션으로 작용했으며 데어발은 이 대형으로 유로를 우승했으며 베켄바우어는 월드컵을 우승했다.

전술적 측면에서는 백 스리 시스템에 큰 영향을 주었고 구단경영 측면에서는 소속팀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으로 만든 이 조나 미스타를 남긴 트라파토니가 축구계에 끼친 영향력을 누가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

1984-85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셀레브레이션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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