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를 GOAT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펠레를 변호한다.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메시를 GOAT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펠레를 변호한다.

토르난테 2023. 5. 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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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이뤄냈다. 심지어 이 대회에서 메시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으며 골든볼을 수상하는게 아깝지 않을 활약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건을 가지고 메시가 펠레보다 모든 부분에서 우위이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브라질 축구에 관심이 많은 에펨코리아의 유저 마리오 자갈로는 이를 반박하며 펠레에 관한 글을 올렸으나 돌아온 건 메시의 악성팬들에 의한 테러 수준의 조직적인 비추천 폭탄과 계정을 바탕으로 한 신상털이 및 증거조작으로 인한 모함으로 돌아왔다.

마침 내 구독자들 중에서도 메시가 펠레보다 우위라 생각하는데 나는 왜 그렇지 않은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주제로 글을 쓴다.

이 글에는 에펨코리아 유저 마리오 자갈로님의 자료를 다수 인용했음을 미리 밝히며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한다.


1. 국가대표팀 커리어

 

메시의 팬들은 펠레와 메시의 국가대표팀 활약에 대해 메시가 불리한 조건에서도 더 나은 활약을 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첫째 펠레가 속한 브라질 대표팀에는 우수한 동료들이 있었고 메시의 동료들은 아르헨티나 역대 최악의 수준이었다. 실제로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빠지고도 가린샤를 통해 우승을 이뤄냈지 않는가?

펠레와 함께한 브라질 대표팀의 멤버들이 불세출의 레전드였던 부분은 확실하고 메시의 동료들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1962 칠레 월드컵을 이야기하기엔 이 대회에서의 브라질은 펠레의 부상이라는 불운을 대가로 상당히 많은 행운이 따랐다.

펠레가 부상으로 빠진 뒤 치른 조별리그 3차전에서 만난 스페인전에서 브라질 대표팀은 오심으로 인한 행운을 상당 부분 누리게 되는데 엔리코 코야르가 페널티 박스에서 넘어졌음에도 프리킥을 선언했으며 헨토의 환상적인 오버헤드 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노골 처리되는 등 행운이 따랐다. 이 경기에서 패했으면 스페인은 조별리그 1위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저 골들이 모두 득점처리되었다면 브라질은 조별리그 2위로 진출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으며 결승에서 난적 스페인을 다시 만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아래는 영상이 있다.

 

 

엔리코 코야르의 피파울 장면 (출처: https://www.fmkorea.com/4028310893)

 

헨토에 대한 득점의 오심 (출처: https://www.fmkorea.com/4028310893)

 

 

그리고 4강 칠레전에서 가린샤는 퇴장을 당해 결승전 체코슬로바키아전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칠레의 관중들이 대통령 호세 알레산드리와 함께 가린샤를 결승전에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며 결승 상대 체코슬로바키아 측도 이를 받아들여 가린샤는 퇴장 징계에도 결승에 나올 수 있었다. 오늘날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가린샤는 결승전에서 라디슬라오 노박에게 완전히 막혔다. 그러나 브라질이 2대 1로 앞선 가운데 후반 28분 쥴리넥이 찬 공이 자우마 산투스의 손에 맞았다. 원래대로라면 페널티킥을 줬어야 했으나 심판이 바로 앞에서 봤음에도 무시하고 경기를 진행했다. 이처럼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빠진 악재 이상으로 브라질에 호재가 많았기에 간신히 우승을 이뤄낼 수 있었다. 펠레가 빠지지 않았으면 이처럼 험난했을까?

 

 

자우마 산투스의 핸들링에 대한 오심 (출처: https://www.fmkorea.com/4028310893)

 

 

그리고 다소 논란이 있는 수상이지만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메시가 골든볼을 받은 것 이외에도 엔소 페르난데스가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에미 마르티네스가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다소 논란이 있는 수상이었음에도 메시의 팬들 대다수는 이를 옹호했다. 즉 그말은 에미 마르티네스와 엔소 페르난데스가 월드컵 우승팀의 선발 멤버에 걸맞게 잘 했다는 건데 이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메시 혼자서 우승을 이끌었다는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둘째 리오넬 메시는 월드컵 골든볼을 2회나 수상했는데 펠레는 1970년만 비공식 MVP로 평가받지 않는가?

공식전인 골든볼이 없던 시절이기에 직접적인 비교도 어렵다. 하지만 자타공인 인정을 받은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제외하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펠레가 컨디션 문제로 결장했던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첫 경기 오스트리아전은 압도적인 전력차로 3-0 대승을 거뒀지만 2차전 잉글랜드전은 무득점 무승부를 거두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페올라 감독은 3차전 소련전을 앞두고 기존의 주전 아우타피니와 조엘을 내리고 펠레와 가린샤를 선발 출전했으며 이들의 활약 덕택에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보다도 전력이 강했던 소련을 2-0으로 꺾고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했다.

토너먼트야 말로 펠레의 독무대인데 웨일스전 결승골, 준결승 프랑스전 해트트릭 및 결승전 스웨덴전 역전골을 포함한 멀티골로 엄청난 골 순도를 자랑하며 토너먼트를 지배했다. 메시의 팬들은 루머로 돌던 1958 스웨덴 월드컵 MVP를 지지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프랑스 풋볼이 매긴 평점에는 6점 만점에 펠레가 5.25, 가린샤가 5.0, 지지가 4.8점을 받으며 펠레를 최고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지지가 MVP라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펠레가 MVP라는 평가가 더 우세했다.

 

 

https://twitter.com/i/status/1623796569005780995

 

트위터에서 즐기는 Sam Mandel 🇦🇺🇨🇦

“Pelé all 10 dribbles in the 1958 World Cup Final 🐐🔥”

twitter.com

 


도리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메시의 골든볼은 같은 국적의 레전드인 마라도나에게조차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논란이 많았다. 그래도 공격진영에서 활약했는데 득점이 한 개도 없었음은 물론 결승전에서는 독일의 수문장 노이어와의 맞대결에서 확실하게 밀렸다. 그가 노이어와 토마스 뮐러를 제치고 골든볼을 받았던 것이 2013년에 재투표로 석연치 않게 발롱도르를 받았던 호날두와 함께 피파의 메시와 호날두의 양강 구도를 밀어준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셋째 리오넬 메시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차지했는데 펠레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한 적이 없지 않는가?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망언이다. 비록 펠레가 1959년 대회에 참여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풀리그에서 4승 2무를 거뒀다.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5승 1무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럼에도 펠레는 6경기 8골로 득점왕을 차지했음은 물론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 뒤로 브라질은 코파 아메리카에는 지속적으로 2진급 멤버를 내거나 불참했는데 1959년 하반기에 에콰도르에서 열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1958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을 단 한 명도 내지 않았으며 1963 코파 아메리카에는 한술 더 떠 아예 산투스에서 지우마르에 밀렸던 백업 골키퍼 실리아스 페헤이라가 주전으로 참가했으며 역시 1962 칠레 월드컵에 참가했던 멤버들이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던 각 클럽 2진급들로 라인업을 구성했으며 1967년에는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그리고 1975년까지 코파 아메리카는 열리지 않았다. 즉 펠레는 한번 참가해 무패 준우승 및 MVP를 수상한 셈이다.

반면 메시는 기회가 많았다. 2007 코파 아메리카부터 무려 여섯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는데 2021년에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우승을 포한해 개인상을 독식한 부분은 인정하지만 2007년에는 카카, 루시우, 호나우지뉴, 제 호베르투가 모두 빠진 브라질을 상대로 3-0 대패라는 수모를 겪었고 2015년에는 MVP를 수상하긴 했지만 한수 아래의 칠레를 상대로 완벽하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으며 2016년 코파 아메리카 100주년 대회에서는 승부차기에서 첫 번째 키커로 나와 실축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특히 2019년에는  아르헨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를 브라질을 위한 부패의 대회였다고 발언했고 시상식에도 불참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00주년 대회에서의 메시의 눈물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활약이 메시가 펠레보다 낫다고 비교하기에는 기회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애초에 펠레는 한 번 나왔으며 메시는 여섯 번 나왔다.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펠레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2진으로 나오는 방침을 정한건데 이는 펠레의 권한 밖이었다.

 


2. 클럽 커리어

혹자는 말한다. 펠레가 국가대표팀에선 메시보다 나을 수 있어도 클럽에서는 메시가 더 낫지 않느냐고. 트로피가 증명하지 않느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내용은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할 때의 이야기다.

메시가 2014-15 시즌 이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FC 바르셀로나의 스쿼드가 최전성기에서 내려온 부분이 가장 크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메시가 클러치를 보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심지어 메시는 2014-15 시즌에 보아텡을 무력화시키며 바이에른을 대파한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을 만나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며 그중에는 8-2 대패까지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 AS 로마와 리버풀을 상대로는 1차전 대승을 거두고도 2차전에 대역전패를 당하기도 했다.

 

 

2019-20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바이에른 전에서 전반전을 4-1로 마무리하고 기가 죽은 메시. 이 장면으로 인해 리더십에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분명 이 패배들을 메시 한 명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메시는 자신이 뒤집을 기회라는 게 존재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펠레가 1966년 이후에 클럽 커리어가 좋지 못한 이유는 축구 내적이 아닌 축구 외적인 이유가 더 컸다. 1964년에 브라질은 군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을 잡았는데 브라질 축구계를 쥐고 있던 일명 카르톨라스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군사정권에게 잘 보이려 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 클럽들은 돈이 되지 않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도 빠져가면서 막대한 돈을 받는 친선경기에 매진하게 되는데 1966년, 1969년, 1970년에는 브라질 클럽들이 단체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특히 산투스는 자금 압박을 더 받았다. 선수들의 인건비 상승과 펠레의 천문학적으로 비싼 계약금 때문에 재정이 과부하 상태였기에 다른 구단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친선경기에 임했으며 펠레의 존재로 인해 친선경기를 잡기도 수월했기에 다른 브라질 구단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친선경기를 돌린다.

다음 표는 산투스와 다른 명문 클럽들의 친선경기 횟수를 비교한 표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산투스의 친선경기 출처: https://www.fmkorea.com/4028310893)



표에 나온 대로 산투스는 유럽의 인기팀 레알 마드리드보다 5배나 많은 친선경기를 소화했으며 주립리그와 전국리그에서 라이벌리를 구성한 파우메이라스보다도 2배 많은 친선경기를 소화했다. 물론 산투스와 친선경기를 잡은 팀들은 펠레와 경기를 하기 위해 친선경기를 잡은 것이기에 펠레는 부상이 아닌 이상 풀타임으로 소화해야 했으며 실제로 산투스는 브라질 클럽들이 전원 불참한 시즌을 제외하고도 1967년과 1968년에도 출전권을 포기했다.

심지어 1970년대에 와서는 1972년에 계약이 만료되는 펠레를 조금이나마 붙잡기 위해 원정 친선경기 일정을 더욱 가속화했다. 1971년 산토스는 홍콩과 볼리비아, 엘살바도르, 마르티니크, 과달루페, 자메이카, 콜롬비아, 아이티 등지를 돌아다니며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그것도 한 국가에서 경기하다 또 다른 국가로,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 나라에서 친선경기를 가지며 복잡한 일정을 소화했다. 그 과정에서 리그 일정마저 무시하며 산투스의 리그 순위마저 하락하는 악순환을 겪었다.

 

 

1972년에 방한해 대한민국 대표팀과 친선경기에 나선 펠레. 그는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녔다. (여담으로 차붐은 이 경기에서 득점하며 유명해졌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산투스가 친선 경기 없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나왔다 해도 어떻게 우승을 장담하냐고. 축구공이 둥글기에 반은 맞다. 하지만 펠레의 산투스는 아르헨티나 클럽들을 상대로 19전 12승 3무 4패를 기록했으며 우루과이의 양강 페냐롤과 클루브 나시오날을 상대로도 15전 7승 1무 7패로 호각세를 구성한 점과 그 시대 산투스에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에두, 토니뉴 게헤이루, 클로두아우두, 자우마 디아스 등 좋은 동료들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기회만 주어졌으면 우승컵을 추가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은 무시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펠레는 기회를 받았던 메시와 다르게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회를 받았냐 받지 못했나의 차이는 매우 크다.


3. 주립리그에 대한 이해

혹자는 말한다. 주립 리그는 유럽 메이저 리그의 3부 리그 수준이 아닌가? 거기서 득점한 펠레의 기록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건 그들이 브라질 축구에 대해 무지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스스로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무지를 자랑하는 웃기지도 않을 행위다.

브라질은 유럽과 다르게 국가가 땅덩이가 굉장히 크다. 주립리그만 27개가 있는데 이들 사이에 수준 차이가 심한 부분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지도. 브라질은 서유럽 전체를 합친 것 보다 훨씬 크다는 부분을 간과한다.

 


그러나 펠레의 산투스가 머문 상 파울루주의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는 4부 리그까지 있으며 1부 리그의 수준도 리우 데 자네이루의 주립 리그인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와 함께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평가받아왔으며 펠레의 시대에는 도리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보다도 한수 위 수준을 자랑했다.

몇몇 하위권 클럽들과의 전력차가 크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것은 모든 리그에 해당한다 결국 상위권을 봐야 하는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의 파우메이라스와 상 파울루, 코린치안스는 유럽의 명문들 못지않게 강력한 전력을 구성했다.

그 증거로 상파울루 주립 리그의 4대 강자가 유럽의 6개 리그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친선경기 및 인터콘티넨탈컵에서 거둔 전적이다. 당시에 친선 경기는 수입 루트가 지금에 비해 확연히 적었던 당시 축구판에서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므로 의미가 없다고 깎아내리기 어렵다..

 

최초 출처

 

http://acervosantista.com.br/temporada-1967/

 

Temporada 1967 - Acervo Santista

Todos os jogos do Santos FC na temporada 1967. Clique no jogo para acessar a ficha técnica. 15/01/1967 – Santos 4 x 1 Comb. Mar del Plata-ARG – Amistoso – Mar del Plata, Argentina 19/01/1967 – Santos 4 x 0 River Plate-ARG – Amistoso – Mar del

acervosantista.com.br

 

https://www.rsssf.org/tablesm/madrid-friend6079.html

 

International Friendlies of Real Madrid CF 1960-1979

 

www.rsssf.org

 

https://www.verdazzo.com.br/temporada/1967/

 

1967 - Verdazzo

A temporada de 1967 do Palmeiras

www.verdazzo.com.br

 


대부분이 중립 지역이나 원정 경기였음에도 상 파울루 주의 4대 강호들은 서유럽 상위권 클럽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럼에도 과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가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위권 주립 리그들은 유럽 빅리그 1부 리그 보다도 전력이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하부리그가 아니었다.

추가로 유럽으로 진출하면 브라질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기에 유럽으로 나가는 선수들은 1950년대 중반 피오렌티나에서 잠시 뛴 줄리뉴나 1958 월드컵 직후에 잠시 스페인 무대에 진출했다가 돌아온 지지나 바바를 제외하면 보통 대표팀에서 밀린 선수들이 진출했다. 1960년대 유럽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를 호령한 밀란의 주제 아우타피니는 펠레의 벽을 넘지 못해 떠났으며 인테르의 자이르 다 코스타는 가린샤와 자이르지뉴의 벽을 넘지 못해 셀레상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진출했으며 유벤투스의 에이스 치네지뉴는 아예 파우메이라스에서 신예 아데미르 다 기아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유럽 무대로 진출한 경우다.

그리고 전국리그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펠레 시대에는 전국리그가 토너먼트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나의 작은 챔피언스리그와 같이 운영되었다.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 파울루처럼 강력한 주립 리그부터 아마존 강 유역의 군소 주립 리그까지 모두 참가했으니 흔히 말하는 리그 형식의 전국리그인 브라질 세리 A는 1971년에 출범했다. 산투스는 유럽의 정규리그 격인 주립리그와 도메스틱 컵대회 격인 여러 컵대회, 그리고 리우와 상 파울루의 명문들이 대거 참가하는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를 소화했음은 물론 하나의 챔피언스리그인 브라질 전국 리그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까지 참가해 활약했다. 시즌 도중 친선경기는 덤으로 참가했음은 두말할 것 없다.

 


4. 전술 및 개인역량

 

 

짧게 말하겠다. 메시 시대와 펠레 시대는 축구공과 축구화의 무게부터 차이가 크기에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영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거다.

수비 전술의 발달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수비 전술에 맞춰 공격 전술도 발달하기에 이를 개인 역량에 대입하기는 무리가 있다. 도리어 폭력적인 백태클을 난무하는 그 시대의 축구 리그에 비해 선수보호가 잘되는 현세대 라리가가 공격수에게 확실하게 유리한 리그라는 점은 확실하다. 부상을 당한 공백 기간은 선수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펠레가 득점에 전념하는 호날두 유형의 포처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펠레는 자신의 포지션을 공격형 미드필더라 말했으며 (펠레 시대의 포지션인 인사이드 포워드를 현대 포지션으로 번역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아르헨티나 축구팬이 찾은 자료에서 펠레는 공식전 819경기 757골 368도움을 기록했다고 나온다. 어시스트를 계산한 건 남은 경기영상과 그 당시에 신문기사를 분석한 결과로 추측된다.

 

해당 자료의 출처

 

https://www.mediafire.com/file/8x2kfmau931u4j1/Pel%C3%A9+all+official+games.xlsx/file 

 

Pelé all official games

 

www.mediafire.com


결론

우선 결론을 내기 전에 펠레에 대한 수많은 자료 발굴에 크케 공헌한 에펨코리아의 유저 마리오 자갈로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 이후에는 메시와 펠레는 취향차까지는 올라오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러나 토르난테 & Red Archive 선정 F.C.U Football Award 컨텐츠를 진행하면서 펠레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를 개인적으로 많이 했는데 그 결과는 취향차로 비교될 수준이 아니라고 해석되었다.

20세기 브라질 및 남미 축구에 대한 저평가는 예전부터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 부분에서 생각이 바뀐건 아니다.

기회를 수 없이 받았음에도 여러번 실패를 경험했던 메시와 브라질 사회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기회 자체를 수도 없이 박탈당했음에도 주어진 작은 기회에서 인간을 초월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펠레에 대한 격차를 더 크게 느꼈다.

거기다 요즘은 러시아 및 동유럽 원정만 걸려도 일정을 걱정하는데 펠레는 지금보다 덜 발전한 항공 기술로도 시즌 도중에 오대양 육대주를 돌며 수많은 친선경기를 공식전과 병행했음에도 커리어의 큰 흠을 남기지 않았다. 1966년 브라질 전국리그 결승전에서 크루제이루를 상대로 완패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메시는 여러모로 안정적이며 유리한 시대에 살았음에도 사회적으로 불안정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펠레를 상대로 가시적으로도 압도하지 못했으며 더 많은 실패를 겪었기에 나는 펠레를 축구 역사상 유일한 GOAT라 생각한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메시의 팬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 메시는 종교다. 기독교도에게 하느님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슬람 교도에게 알라는 세상에 없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해도 그들이 그 의견을 수용하진 않는다. 그들은 이미 답을 정해두고 대답하는데 메시의 팬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함으로서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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