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한 명장이 겪은 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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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한 명장이 겪은 수모

토르난테 2023. 3. 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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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대한민국 축구계의 기대주에는 오현규 선수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셀틱에서 활약하며 3월 19일에 열린 경기에서 2호 골과 3호 골을 뽑아냈다. 그가 활약하는 셀틱은 스코틀랜드 무대에서 영원한 우승 후보임과 동시에 현재의 전력과는 다르게 유럽 축구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이었다.

 

 

골 세레머니를 하는 셀틱의 스트라이커 오현규



특히 1966-67 시즌에는 조크 스타인의 지휘 아래 유럽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이뤄내기도 했는데 정규리그, 스코티시 컵, 그리고 유러피언컵 우승에 더해 글래스고 컵과 스코티시 리그컵까지 추가로 우승하며 5관왕이라는 대업을 이뤄냈다.

게다가 1967년의 5관왕의 대업을 이끈 셀틱 선수들의 출생지는 모두 홈구장인 셀틱 파크 반경 30km 안이었다. 이것은 모두 고향 출신 유소년팀 자체 육성 선수들로만 이뤄낸 우승이며, 결국 이러한 셀틱의 전설적인 5관왕은 스코틀랜드 축구계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뜻이 되었음은 물론 세계 축구사에서도 영원히 회자될 업적이었다.

개량된 4-2-4 시스템으로 카테나치오를 구사하며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인테르 밀란을 함락한 조크 스타인은 셀틱과 함께 많은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1967년 한 해에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들으면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지 않았던데 용했을 정도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늘은 셀틱의 전설적인 감독 조크 스타인이 겪었던 영광 속의 아픔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엘레니오 에레라의 계략

인테르 밀란과 셀틱은 수많은 강팀을 꺾고 1966-67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만났다. 결승전을 앞둔 스타인은 에레라의 인테르의 경기를 분석하기 위해 밀라노를 방문하려고 했으며 이를 안 인테르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글라스고에서 밀라노로 오는 비행기 티켓과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 초대권을 보냈다. 스타인은 적장의 호의에 감동했다.

하지만 이는 에레라의 함정이었다. 그는 비행기가 뜨는 당일에 비행기표를 취소했으며 이에 조크 스타인은 인테르를 분석하지 못하게 되며 자신이 아는 최소한의 지식으로만 결승전을 준비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실제로 리스본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에레라를 만난 슈타인은 전반 종료 후 하프 타임을 일찍 끝낸 심판에 대해 화를 내며 항의하는 과정에서 에레라와 마주치자 여러 감정이 복받치며 그에게 돌진하자 에레라는 스타인을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그나마 결승전에서 셀틱은 인테르를 압도하며 40번에 달하는 슈팅을 날리며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하며 일명 '정의구현'에 성공하기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리그 우승을 라이벌 유벤투스에게 내준 상황에서 이런 협잡을 썼으면서도 유러피언 컵 우승을 하지 못하자 에레라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고 반대로 스타인의 명성은 유럽을 뒤덮었다.

여기까지면 그나마 낫겠지만 스타인에게는 한 가지 시련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발 폭력 축구

에레라의 계략마저 넘어서며 5관왕의 마침표를 찍으며 유럽 챔피언에 오른 스타인의 셀틱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남미 챔피언 라싱 클루브와 경기했다.

1차전은 글래스고에서 열렸다. 스타인은 피파로부터 출장정지를 받은 움베르토 마스키오가 출전하는 걸 허용하며 "우리는 최상의 상태의 라싱 클루브와 경기하고 싶다."라며 마스키오의 출장을 허용했으며 라싱의 감독 후안 호세 피주티 역시 SFA로부터 징계를 받은 지미 존스톤의 출전을 스타인과 같은 이유로 허용했다. 이는 인터콘티넨탈컵이 이 시대에는 피파가 주관하는 공식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훈훈한 광경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터콘티넨탈컵에 참가한 셀틱 선수들



6만 파운드의 수익을 벌어드리며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 수익을 경신했던 셀틱은 코너킥 상황에서 수비수 맥닐의 헤딩골로 남미 챔피언을 홈에서 1-0으로 제압했다.

2차전은 라싱 클루브의 홈구장이자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아베야네다 지구에 있는 에스타디오 프레시덴테 후안 도밍고 페론에서 경기했다. 2차전 경기를 앞두고 아르헨티나 팬들은 셀틱의 스타인 감독과 선수단을 따뜻하게 친근하게 맞이했다.

하지만 이는 훈훈함의 마지막이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셀틱의 골키퍼 로니 심슨은 홈팀의 응원석에서 날아온 물병(일설에는 돌)을 맞고 뇌진탕 증세를 보이며 경기를 뛸 수 없게 되자 경기 시작 전부터 백업 골키퍼 존 펠론과 교체되었으며 토미 게멜이 셀틱 측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키자 라싱 클루브의 선수단과 팬들은 한층 더 잔혹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르헨티나의 사진 기자들은 골키퍼에게 손짓을 하며 방해했으며 라싱의 선수들은 거친 플레이로 일관하며 결국 2-1로 경기를 뒤집었다.

 

 

물병(또는 돌)에 맞은 셀틱의 골키퍼 로니 심슨



경기가 끝난 뒤에도 아르헨티나 팬들이 셀틱의 라커룸으로 난입해 행패를 부렸으며 셀틱을 응원하기 위해 온 다른 클럽의 팬들 및 우루과이의 팬들과 라싱 클루브의 팬들이 충돌하기도 했다. 결국 셀틱의 스타인 감독은 경기장 안팎의 사건에 대해 분노했으며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 번째 경기를 위해 몬테비데오나 남미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플레이오프를 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몬테비데오의 전투

결국 3차전은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치르기로 했다. 조크 스타인은 경기 직전 인터뷰에서 "우리 셀틱의 6관왕이 아니라 폭력적인 라싱 클루브가 챔피언이 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이기고 싶다."라고 인터뷰를 했다.

다행히 3차전이 열린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강철 장벽과 철조망으로 덮인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관중석은 라싱의 홈구장에 비해 훨씬 더 뒤쪽에 위치해 팬들이 던진 물체에 대한 위협에서 자유로웠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우루과이 무장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페어플레이를 약속한 양 팀 주장들의 약속은 의미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전반 23분까지 양 팀은 과열된 상태에서 파울로 경기를 일관했으며 파라과이 국적의 주심인 로돌포 페레스 오소리오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키고 양 팀 주장인 페르푸모와 맥닐에게 한 번만 더 반칙을 남발하면 모두 퇴장시킬 것이라 경고했으나 양 팀 선수들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전반 37분, 알피오 바실레는 셀틱의 에이스 지미 존스톤을 폭행해 넘어트리자 이에 분노한 셀틱 선수들은 라싱 선수들과 충돌했으며 특히 셀틱의 센터백 존 클라크는 바실레와 룰리에게 주먹을 쥐고 다가가다가 경찰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결국 5분 뒤 라싱의 바실레와 셀틱의 바비 레녹스가 경기장에서 충돌하자 퇴장당했다. 스타인은 이에 불복해 레녹스가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으나 우루과이의 무장 경찰에 의해 제지되기도 했다.

 

 

난투극이 일어나자 선수들을 말리는 우루과이 경찰들



라싱은 셀틱 선수들이 흥분한 상황을 적극 활용했는데 후반 3분에는 룰리가 파울로 존스톤을 제지하자 존스톤은 라싱 선수를 폭행하고 퇴장당했다. 결국 혼란한 틈에 라싱의 카르데나스가 그림 같은 왼발 슈팅으로 선제골을 뽑아냈다. 골 이후에도 과열된 경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후반 29분에는 존 휴즈가 시간을 끌기 위해 바닥에 누운 라싱 클루브의 골키퍼 세하스를 폭행해 퇴장당했고 이로 인해 2분 후 양 팀은 다시 난투극을 벌이다가 우루과이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종일관 더티 플레이를 펼치던 후안 카를로스 룰리가 조크 스타인을 폭행한 것이 적발되어 퇴장당했다.

88분에는 주심이 아울드에게 퇴장을 명령했지만 아울드는 이를 듣지 않았고 아울드를 끌어내기 위해 경찰들이 투입되는 동안 셀틱의 토미 게멜은 자신에게 시비를 건 라싱 클루브의 선수 중 한 명의 생식기를 걷어차기도 했다.

난투극 끝에 경기는 종료되었으며 경기가 종료된 뒤에 조크 스타인은 이 일에 대해 치를 떨며 "두 번 다시는 세계 무대에서 돈 벌겠다고 우리 팀을 남미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인터뷰했다. 그나마 주장 로베르토 페르푸모와 빌리 맥닐이 서로 화해했으나 이는 개인적인 감정 해소에서 더 나가지 못했으며 이미 생긴 남미 클럽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지진 않았다.

 


결론

셀틱의 조크 스타인에게 남미에서의 기억은 최악 그 이상이었다. 결과를 잡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과 선수단이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위협당하고 폭행당했다. 이후 또 다른 아르헨티나 클럽인 에스투디안테스는 라싱 클루브를 능가하는 폭력으로 인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AC 밀란, 그리고 페예노르트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이에 유럽 챔피언들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남미 챔피언과의 경기를 거부했으며 준우승팀들을 대신 보내는 사례가 빈번하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브라질 축구계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불참과 함께 남미 축구계의 발전을 저해했는데 유럽에서 대두하는 토털 풋볼에 대해 전혀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나서며 1974 서독 월드컵에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에게 전혀 대처하지 못하며 압도적으로 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은 프로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조금 더 멀리 볼 수는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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