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계의 엘도라도 - 대가 없는 낙원은 없다.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축구계의 엘도라도 - 대가 없는 낙원은 없다.

토르난테 2023. 2. 25. 18:54
728x90
728x90

엘 도라도 설화

 

 

리마에 살던 소년인 저에게 할아버지께서 스페인의 페루 정복에 대한 전설 하나를 얘기해 주셨어요.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는 포로로 잡혀 살해당했고 피자로와 그의 정복자들은 부를 얻게 되었죠. 그들의 정복에 대한 얘기들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금과 영광을 갈구하는 새로운 시대를 불러왔습니다. 그들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잉카민족들에게 물었죠,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문명이 어디 있지? 더 많은 금은 어디 있어?"

잉카민족은 복수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했죠.

"아마존 숲으로 들어가세요. 거기서 원하는 금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파이티티라는 도시가 있는데 스페인어로는 '엘 도라도'라고 불리죠. 도시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졌어요."

스페인 사람들은 정글 속으로 들어갔고 돌아온 단 몇 명의 생존자들은 위대한 주술사, 독화살을 지닌 전사들, 태양을 가릴 만큼 높고 큰 나무들, 새들을 잡아먹는 거미들과 사람을 통째로 삼키는 뱀들, 또 끓어오르는 강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었죠.

이하 생략

 

상술한 내용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환경운동가이자 지구과학자인 안드레 루조가 테드라는 플랫폼에서 한 강연인 아마존의 끓어오르는 강에서 나온 엘 도라도에 대한 설명이다.

 

 

강연중인 안드레 루조

 


과거 대항해시대 당시 남미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의 장소로 도시 전체가 금으로 도배된 거대한 도시이며, 황금이 넘쳐나는 전설의 이상향으로 여겨져 왔다.

당연하게도 부를 찾아 탐험하던 스페인 정복자들은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고 심지어는 엘도라도가 어디냐며 각지의 원주민들을 고문하기까지 했지만 당연하게도 엘도라도는 허상이었으며 항해하거나 탐사하는 도중 사망하거나 별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엘도라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금광을 발견한 탐험가들도 많았고 그들이 채굴해서 유럽으로 가져간 금은 이전에 유럽에서 쓰던 금보다 몇 배나 많았기에 엘도라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더더욱 부추겨졌다.

 

 

엘도라도 상상도

 


먼 훗날 과학이 발전한 뒤에 세상 사람들은 엘도라도가 허구의 장소였음을 알게 되었고 엘도라도는 탐험 대상에서 마치 동양 문화권의 무릉도원처럼 라틴 문화권의 이상향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그리고 먼 훗날인 1940년대 후반, 남미 프로축구 무댜에서도 선수들에게 전설 속의 엘도라도와 같이 돈을 부르는 공간이 등장했다.

 


축구 변방 콜롬비아에서 등장한 꿈의 무대 엘도라도

 

 

1940년대까지만 해도 남미 축구의 패권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장악했으며 가끔 브라질이 그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구조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콜롬비아에는 축구 협회는 있었지만 프로리그도 없었고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945년에 처음 참가했을 정도로 다른 국가와의 교류도 드물었으며 국민들도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정세가 급변한다. 콜롬비아는 그동안 진보 정당인 자유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대통령 알폰소 로페스 푸마레호의 개혁이 반대에 부딪혔고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추문까지 잇따르자 1946년 선거에서 보수당의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에게 정권을 내줬다. 비록 전임자의 무능함과 부도덕함, 그리고 자유당의 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권좌에 앉았지만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 역시 많았기에 의회의 다수당은 여전히 야당 자유당이었고 노사 분규 및 정치적 분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1948년 4월 9일에는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자유당의 유력 주자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사회 불안이 정점을 찍었다.

국가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권력을 잡은 측은 정치와 사회에 쏠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한다.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 역시 스포츠, 즉 축구를 활용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기존의 아마추어 축구리그를 타파하고 프로축구 리그 개최를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그를 지지하던 부자 구단주들을 부추겨 콜롬비아의 프로 축구계에 거액의 투자를 유도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늘 반대 세력이 나오는 법. 리그 운영을 맡았던 기구인 디마요르와의 극심한 내부 분쟁으로 그들이 콜롬비아 축구협회를 떠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피파 집행위원회는 콜롬비아 축구협회를 피파에서 퇴출시키며 모든 국제 대회에서 콜롬비아 대표팀과 프로팀의 참가를 막았다. 그러나 이 징계가 역설적으로 콜롬비아 리그를 꿈의 무대로 만들어주는 장치가 된다.

잠시 다른 이야기인 세계정세 이야기를 하자면 중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대결로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남미의 축구강국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경제 위기로 인해 급여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기에 선수들의 파업에 시달렸으며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아르헨티나를 떠나기를 원했다.

 

마침 콜롬비아 프로리그는 FIFA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영입할 때 이적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피파에 가입된 나라의 선수 등록 금지 조항은 피파에서 탈퇴한 콜롬비아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에 콜롬비아의 클럽 미요나리오스의 회장 알폰소 시니어는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투입하지 않은 이적료를 전부 선수의 연봉으로 활용하면서 엄청난 자금력으로 급료가 밀린 스타플레이어들을 유혹했고 결국 1949년 6월 8일에 아르헨티나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던 라 마키나의 핵심 아돌포 페데르네라는 콜롬비아 리그와 계약한 첫 외국인 선수가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많은 스타들이 콜롬비아 무대에 합류했다.

 

미요나리오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스타, 아돌프 페데르네라



아틀레티코 후니오르는 엘레누 지 프레이타스를 위시한 브라질의 스타들과 헝가리 공산정권에 반대해 헝가리를 탈출한 헝가리 출신 선수들을 영입해 팀을 꾸렸으며 쿠쿠타 데포르티보는 우루과이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렸는데 주전 라인업에 자국 콜롬비아 선수들보다 우루과이 국적 선수들이 훨씬 많았으며 특히 슈베르트 감베타와 에우세비오 테헤라 등 월드컵 우승을 이뤄낸 우루과이 대표팀 출신들을 다수 영입했고 데포르티보 칼다스는 소련 공산 정권을 피한 리투아니아계 골키퍼인 비타우타스 크리슈치나스를 영입했으며 데포르티보 칼리는 페루 대표팀의 핵심 공격수 발렌티노 로페스를 영입했고 데포르티보 페레이라는 파라과이 국적의 스타들을 다수 영입했다.

그리고 프로리그 첫 우승팀 인데펜디엔테 산타페는 엑토르 리알, 닐 프랭클린, 레네 폰토니 등 거물급 선수들을 영입했고 이름부터 백만장자라는 뜻을 지닌 미요나리오스는 페데르네라를 중심으로 그 유명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주전 하프백 네스트로 로시와 주전 골키퍼 훌리오 코찌를 영입하며 아르헨티나 커넥션을 중심으로 스쿼드를 꾸렸다.

 

1951년의 미요나리오스, 위에 왼쪽에서 두 번째에 슈퍼스타 디 스테파노가 있다.



자국의 이념갈등 및 경제공황을 피해 엘도라도에 입성한 스타들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며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그 대가로 대부분의 외국인 선수들은 자국에서 받던 급여보다 다섯 배 이상 많은 급여를 받았다. 적어도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엘 도라도와 같은 공간으로 보였다.

 


사상누각 (砂上樓閣)

 

아무리 화려한 누각을 지어도 결국 기본이 부실하여 언제 무너져도 이상 할 것 없는 존재라는 뜻의 사상누각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 콜롬비아 축구판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국민의 관심을 잠시 스포츠로 돌린다고 쳐도 결국 라 비올렌시아, 즉 폭력이라 불렸던 자유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지간의 정치갈등은 내전 수준으로 사회 기반을 흔들었고 이에 콜롬비아는 치안과 민생이 모두 무너지는 혼란기를 겪었다.

 

 

라 비올렌시아 사태로 인래 난장판이 된 콜롬비아



그리고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에 이어 대통령이 된 라우레아노 고메즈 카스트로 정부에는 정치갈등이 더 심화되었고 스포츠로 덮을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 당연히 엘도라도라 불리던 콜롬비아 리그의 클럽들은 팀을 운영하면서 적자만 쌓여갔으며 처음에는 돈맛을 보러 왔던 스타들도 콜롬비아의 위태로운 치안에 환멸을 느끼며 하나둘씩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유럽의 명성 있는 리그로 떠났다. 특히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인 닐 프랭클린을 비롯해 엘 도라도 무대에 입성했던 스타들은 자국 축구계에서 돈을 보고 떠난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특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돈뿐만이 아니라 월드컵 개최권을 두고 피파와 아르헨티나의 갈등 속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국제대회 불참을 선언했기에 콜롬비아 국적으로 월드컵에 나가려 했는데 콜롬비아 역시 피파에서 퇴출되어 월드컵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유럽의 스페인으로 떠나길 원했으며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축구 역사에 남을만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디 스테파노는 엘도라도 무대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정치갈등으로 인해 무려 18만 명이 사망한 이 끔찍한 사태에 1953년, 콜롬비아 군부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당 내 강경파 대통령인 라우레아노 고메즈 카스트로 대통령을 퇴임시키고 자유당과 협정을 맺었고 이에 엘도라도를 주도하던 보수당 강경파는 몰락했으며 외부에서도 디마요르 측의 호소를 받아들인 피파가 엘도라도의 해체를 위해 압박과 회유를 하자 결국 엘도라도라 불렸던 엄청난 투자의 리그를 해체하고 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리그의 내실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상향 엘 도라도, 하지만 그 현신을 정부의 3S 정책의 도구였을 뿐이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경제구조였다. 이런 내실 없는 시스템은 이상향과 같이 보여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사상누각 그 자체였으며 지속 가능한 리그가 아니었으며 이런 형태는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낸다.

국민들의 피를 가리기 위해 탄생한 엘도라도라는 화려한 이름의 사상누각이 무너진 뒤 콜롬비아는 세계 무대에 나설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무려 4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세상은 생각보다 정직하다.

 

 

엘도라도 무대를 풍자한 Onkar Shirsekar의 삽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