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우루과이가 축구 강국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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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우루과이가 축구 강국인 이유

토르난테 2023. 2. 2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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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라틴 아메리카의 소국, 그러나 축구는 참 잘하는 우루과이

 

남아메리카에 있는 인구 350만의 소국 우루과이는 정치,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세계 무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세계 축구 무대를 평정한 국가에게 수여하는 별이 무려 4개며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와 함께 최다 우승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16년부터 1935년까지 우루과이 축구는 월드컵 이전 세계 최고 권위의 축구대회였던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서 두 번이나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코파 아메리카 7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30년 초대 월드컵의 개최국이자 우승국이었다. 애초에 세계정세에 큰 비중이 없는 우루과이에게 독립 100주년 기념이라는 명분으로 피파 측이 개최국의 자리를 내준 이유도 당시 우루과이 축구 대표팀이 세계 최강의 팀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월드컵 우승을 이뤄낸 우루과이

 


그러면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저런 별볼일 없는 소국이 어떤 계기로 축구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그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루과이 축구계에 찾아온 귀인

 

일찍부터 이탈리아에서 전란을 피해 이민 왔던 이민자들이 많았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는 축구가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1900년에 알비온 풋볼 클럽의 회장 엔리케 칸디도 리히텐베르게르의 주도로 축구협회를 설립한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축구협회를 세운 아르헨티나에 이어 두 번째로 축구협회를 설립했으며 그 해에 국가단위의 아마추어 축구 리그도 설립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 우루과이 축구 대표팀은 축구강국이라 보기 어려웠는데 1901년 5월 16일에 열린 첫 A매치에서 아르헨티나에게 3-2로 패했으며 1902년 7월 20일에 열린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A매치 경기에서 6-0으로 패하는 등 축구 강국이라 보기 어려운 전적을 냈다.

하지만 한 귀인이 우루과이를 방문하면서 우루과이 축구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온 그 귀인의 이름은 존 할리, 아마추어 축구선수로 본업은 철도 엔지니어였으며 원래는 아르헨티나에서 근무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축구팀 페로 카릴 오에스테에서 3년간 활약했으나 1909년 센트럴 우루과이 레일웨이로 발령 나면서 우루과이의 CA 페냐롤로 이적했으며 이듬해에 우루과이 국적을 취득하며 귀화했다.

 

 

존 할리의 초상화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는 1872년에 이미 킥 앤 러시라는 단순한 플레이에서 탈피한 빠른 숏패스 플레이로 발전을 이뤄냈는데 실제로도 라이벌 잉글랜드를 압도하며 축구사의 발전에 큰 획을 그으며 축구계의 패권을 가져왔다. 1886년에 태어난 할리도 글래스고에서 스코틀랜드식 축구와 함께 성장하면서 스코틀랜드식 패스 축구를 익혔다.

그는 본업인 철도 엔지니어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선수 겸 감독을 맡아 시간이 날 때마다 스코틀랜드에서 배운 축구 철학 및 지식을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들에게 스코틀랜드식 숏패스 전술의 이론을 가르쳤으며 본인도 오늘날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센터 하프로 활약했는데 수비에 치중하던 기존의 센터하프와는 다르게 경기장에서도 오늘날의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처럼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팀 동료이자 제자였던 재능 있는 인사이드 포워드 호세 피엔디베네에게 공격을 이끌게 하며 더블 플레이메이커 체제를 최초로 구축했고 그 당시 다른 나라들이 흑인을 축구계에서 소외시킨 것과 달리 이사벨라노 그라딘과 같은 흑인 선수들도 중용하는 등 구조적인 개혁을 이뤄내며 우루과이 축구계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단 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할리가 현역으로 뛴 A 매치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은 22전 7승 5무 10패를 기록하며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우루과이 축구 협회는 단순한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며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점차 전력이 상승하던 우루과이 대표팀은 할리가 일선에서 물러난 직후인 1916년 남미 축구 연맹 창립 기념으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할리의 수제자였던 알프레도 포글리노가 선수 겸 감독을 맡아 활약하며 3경기 2승 1무를 기록하며 첫 우승을 차지하며 그의 개혁의 성과를 봤다.

 

 

초대 코파 아메리카 챔피언들, 그들의 우승은 할리의 가장 큰 유산이었다.

 


첫 코파 아메리카를 제패한 이후에도 우루과이는 앙헬 로마노, 호세 나사치, 엑토르 스카로네,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엑토르 카스트로 등 할리의 철학을 계승한 슈퍼스타들이 대표팀 주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걸쳐 남미와 세계 무대를 평정하며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버금가는 강호로 도약했으며 1930년에 열린 초대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을 차지해 화룡점정을 찍었다.

1942년에 페냐롤의 감독에서 은퇴한 할리는 오랫동안 몬테비데오에서 살며 많은 우루과이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그의 마지막 제자 옵둘리오 바렐라가 라이벌 브라질을 따돌리고 조국의 우승을 이끌며 우루과이 대표팀의 네 번째 별을 달자 우루과이인들은 할리를 두고 "영국인의 발에서 축구공을 가져와 우루과이인의 심장에 넣었다."라며 그를 칭송했다.

1960년 5월 15일, 할리는 향년 74세에 몬테비데오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모든 우루과이 축구팬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에 애도했으며 그가 죽은 뒤 1961년에 그가 애정을 쏟았던 페냐롤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을 모두 제패하며 그 해 세계 최고의 축구팀으로 올라섰다.

 

 

몬테비데오 영국인 공동묘지에 있는 할리의 무덤

 


이 스토리를 가장 들려주고 싶은 대상

 

다소 존재감이 미미한 우루과이에게 축구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선물한 할리는 우루과이 내에서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던 영국인이었다.

하지만 우루과이 축구계는 그의 축구에 대한 진심을 믿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우루과이 축구계에 헌신했음을 넘어 우루과이로 귀화하며 우루과이 축구계의 정신적 지주로 남은 인생을 살았으며 국토뿐만이 아닌 우루과이 축구계에도 나라를 하나로 묶는 철학을 이어가는 데 성공했고 할리는 우루과이 축구의 아버지로 성장했다.

이 동화와 같은 할리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축구협회가 가장 크게 신경 썼으면 하는 부분이다.

대한민국 축구계는 1990년대에 유럽의 선진 축구를 이식하며 축구계를 개혁하려던 디트마어 크라머와 아나톨리 비쇼베츠를 그저 자신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내친 일이 있었고 월드컵에서 성공한 히딩크와 벤투에게도 선발 명단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짜라고 강요하며 그들이 한국 축구계에 정을 붙일 틈도 주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벤투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을 이끌 감독을 선발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인데 벤투가 남긴 정신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적의 후보를 잘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후임자에게는 그의 축구를 펼칠 수 있게 믿고 맡겨줬으면 한다. 할리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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