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윙어 Top 15

국가의 영웅들/우루과이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윙어 Top 15

토르난테 2023. 2. 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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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우루과이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RSSSF와 트렌스퍼마크트이며 둘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기록일은 2023년 2월 24일 기준입니다.

 


15위 로메오 코르보

 


생년월일: 1952년 1월 20일
A매치 기록: 2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6cm
주 소속팀: CF 몬테레이


1970년대 우루과이 축구계의 수위급 윙어로 중앙과 측면을 두루 소화할 수 있었으며 테크니컬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순식간에 따돌렸으며 문전에서의 벼락같은 슈팅으로 빼어난 득점력을 자랑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백업 골키퍼였던 왈테르 코르보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페냐롤에서 데뷔했지만 우루과이 무대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대신 멕시코 무대의 몬테레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자타공인 몬테레이 최고의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는 프로 데뷔해인 1971년부터 소집되었으며 1974 서독 월드컵에 주전 레프트윙으로 참가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멕시코 무대에서 활약하는 동안에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14위 산토스 이리아르테

 

 

생년월일: 1902년 11월 2일
A매치 기록: 5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라싱 몬테비데오

 

1930년 한정으로는 뛰어난 기량을 펼쳤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빠른 가속력을 바탕으로 좌측면을 가로질렀으며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득점을 노리는 부분은 물론 정밀도 높은 왼발 크로스로 골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도 능했다.

우루과이의 중견 클럽 라싱 클럽 몬테비데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423경기에 나서 34골을 기록한 이리아르테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 깜짝 발탁되어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1932년에는 페냐롤로 이적해 활약하며 1932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13위 크리스티안 로드리게스

 


생년월일: 1985년 9월 30일
A매치 기록: 110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FC 포르투

 

21세기 우루과이 축구계를 대표하는 윙어로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들을 눈물 흘리게 만든다고 하여 양파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테크닉으로 상대를 제치는 부분뿐만이 아니라 다부진 체구를 활용한 몸싸움으로 상대 압박을 정면돌파하는 부분에도 능숙했다.

페냐롤에서 데뷔해 2003년 리그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일찌감치 주목받았으며 PSG로 이적해 유럽 무대에 도전해 이적 첫 시즌에 파리지앵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뤄냈으며 포르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프리메이라 리가 3회 우승과 2010-11 시즌 유로파리그 우승을 포함해 총 8회의 우승을 이뤄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도 로테이션 선수로 활약하며 2012-13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2013-14 시즌 라리가 우승을 경험했으나 마지막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완벽하게 밀려나며 남미 무대로 돌아가 활약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센추리클럽에 가입했을 정도로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된 크리스티안 로드리게스는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나서 2011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며 세계 무대에서도 2010 남아공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2013 컨페드컵에서 조국을 4위에 올렸으며 2014 브라질 월드컵과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의 토너먼트 진출을 도왔다.

 

12위 베난시오 라모스

 


생년월일: 1959년 6월 20일
A매치 기록: 41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80년대 우루과이 축구를 이끌었던 테크니션으로 중앙과 측면을 두루 소화할 수 있었으며 민첩한 몸놀림과 높은 수준의 테크닉에서 나오는 드리블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를 돌파해 중앙으로 치고 들어갔으며 특히 아웃사이드 커브를 활용해 득점을 만드는 능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페냐롤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누리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을 이뤄낸 라모스는 특히 1982년에는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우승에 기여하며 페냐롤과 함께 3관왕에 올라 세계 무대를 평정했으며 이후 프랑스의 RC 랑스와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도 초대 월드컵 50주년 기념 대회인 1980 문디알리토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조국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16강 진출을 이뤄내는데 기여했다.

 

11위 안토니오 캄폴로

 


생년월일: 1897년 2월 7일
A매치 기록: 20경기 3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20년대 우루과이 축구의 황금기를 함께했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활약했으며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수비라인을 돌파해 득점 찬스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사벨라노 그라딘의 대체자로 페냐롤에서 12년간 활약하며 정규리그 5회 우승과 1928년에는 아르헨티나 챔피언 우라칸과의 슈퍼컵 경기인 코파 알다오에서 승리해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20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해 조국의 우승을 이뤄냈으나 협회와의 갈등으로 1924 파리 올림픽에는 나서지 못했으나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주전 멤버로 활약하며 조국의 금메달을 이뤄냈다.

 

 

10위 소일로 살돔비데

 


생년월일: 1903년 10월 26일
A매치 기록: 15경기 3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2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양발잡이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양쪽 측면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엄청난 가속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따돌리며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다.

클루브 나시오날의 일원으로 활약한 살돔비데는 정규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1924 파리 올림픽과 코파 아메리카를 모두 제패했으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리믹에서도 주전으로 조국의 우승에 공헌했으나 1930 초대 월드컵에서는 이리아르테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백업 멤버로 우승을 경험했다.

 

9위 파스쿠알 솜마

 


생년월일: 1896년 2월 7일
A매치 기록: 41경기 3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10년대와 20년대에 걸쳐 우루과이 축구의 중흥기의 기초를 닦은 선수로 2-3-5 시스템의 아웃사이드 레프트에서 활약하며 팀의 측면 공격을 이끌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전성기를 누린 솜마는 정규리그 8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에서 18회의 우승을 경험했으며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에서도 3회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뤄냈고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코파 아메리카 4회 우승을 이뤄냈다.

 

 

8위 카를로스 보르헤스

 


생년월일: 1932년 1월 14일
A매치 기록: 35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50년대와 60년대 우루과이 축구계에서 명성을 떨친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팬들에게 루초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드리블 돌파와 택배와 같이 상대의 머리로 정확히 전달하는 왼발 얼리크로스로 이름을 날렸다.

페냐롤의 유스 팀을 거쳐 1949년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보르헤스는 구단의 정규리그 7회 우승을 포함해 우루과이 무대에서 크고 작은 대회에서 20회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고 1960년에는 초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을 이뤄내는데 기여하며 팀을 대회 초대 챔피언의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호 골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스코틀랜드전 해트트릭을 이뤄내며 7-0 대승을 이뤄낸 것을 포함해 총 4골을 득점해 조국의 4강 진출에 기여했고 1956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조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7위 빅토르 에스파라고

 

 

생년월일: 1944년 10월 6일
A매치 기록: 67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70년대 우루과이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전술이해도가 높고 다재다능한 선수였는데 주 포지션인 양 측면 윙어는 물론 공격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 그리고 스트라이커까지 막힘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전성기를 누린 에스파라고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1년과 1980년에는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 코파 아메리카와 인터콘티넨탈컵도 제패하며 두 번이나 남미 무대와 세계 무대를 제패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중간에 유럽 무대의 세비야로 이적해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도 세 번의 월드컵에 참가한 에스파라고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였으나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로차의 부상으로 공격진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소련과의 8강 연장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준결승 진출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6위 산토스 우르디나란

 


생년월일: 1900년 3월 30일
A매치 기록: 20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20년대 우루과이 축구의 전성시대를 이끈 다재다능한 공격수로 주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라이트이지만 공격 진영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패스 및 슈팅은 물론 기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선수로 전해진다.

선수 생활 전부를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보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우르디나란은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과 코파 컴페텐시아 3회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해 모두 우승을 이뤄냈으며 1924 파리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조국의 우승을 이끌며 금메달을 두 번이나 목에 걸었고 1930 초대 월드컵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우승을 경험하며 자신이 참가한 여섯 번의 국제대회에서 전부 우승을 이뤄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5위 훌리오 세사르 아바디에

 


생년월일: 1930년 9월 7일
A매치 기록: 26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회갈색의 머리빛을 했기에 엘 파르도라 불린 아바디에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에스파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선수로 엄청난 가속력과 수준 높은 발재간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따돌렸으며 선수시절 초년에는 중앙으로 직접 침하며 날카로운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플레이를 즐겼으나 베테랑 선수가 된 이후에는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오른발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을 더 선호했고 당대 남미 공격수로서는 드물게 불혹에 가까운 나이까지 롱런했다.

1950 시즌에 페냐롤에서 데뷔해 6년간 활약하며 아우리네그로스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름을 날리다가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제노아로 이적해 4년간 활약했으며 이후 레코를 거쳐 다시 페냐롤로 돌아와서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5회 우승을 추가로 이뤄냈으며 196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하는 등 페냐롤에 머물면서 총 25개의 우승컵을 들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주전으로 출전해 보르헤스, 스키아피노, 미구에스, 호버그와 함께 공격라인을 이끌며 조국의 4강 진출을 이뤄냈으며 1955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4위 호세 사시아

 


생년월일: 1933년 12월 27일
A매치 기록: 43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60년대 상반기에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다재다능한 공격자원으로 WM 시스템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를 선호하지만 소속팀에서는 루이스 쿠비야나 훌리오 아바디에 같은 뛰어난 우측면 공격수들이 있었기에 주로 인사이드 포워드나 센터 포워드에서 뛰었는데 빠른 스피드를 앞세운 드리블과 센스 넘치는 볼 컨트롤로 상대 수비수의 견제를 뚫어냈으며 팀 플레이에도 장기를 드러내며 동료들과의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인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를 공략했으며 상대 골키퍼의 허를 찌르는 슈팅에도 득점에 능했으며 특히 스펜세르와 후안 호야, 페드로 로차와 같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팀의 페널티킥을 전담했을 만큼 페널티킥을 잘 찼다.

데펜소르 스포르팅과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페냐롤에 입단한 사시아는 4년 반 동안 구단에 머물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1년에는 리그에 이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내는데도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인터콘티넨탈컵 3차전에서 각자 1승 1패를 거둔 상황에서 사시아는 멀티골을 넣으며 2-0 완승을 이뤄냈으며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59 코파 아메리카 에콰도르에서 조국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2 칠레 월드컵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후자의 대회에서는 조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특히 결승전 2차전에 강했던 사시아는 196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2차전에서 파우메이라스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으며 1차전 승리를 지켜냈으며 동년에 열린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1차전 원정에서는 벤피카에게 1-0으로 패했지만 2차전에는 10분 만에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기록하며 5-0 대승에 시작을 알렸다.

 

 

3위 이사벨라노 그라딘

 

 

생년월일: 1897년 7월 8일
A매치 기록: 23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10년대 세계 축구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부업으로 대륙 단위 육상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다섯 번이나 따냈을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수비라인을 돌파해 득점하는 플레이를 선호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1916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MVP, 득점왕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괴력을 뽐냈으며 다음 대회인 191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소속팀 페냐롤에서도 7년간 활약했지만 클루브 나시오날의 전성시대에 밀려나며 리그 2회 우승에 그쳤음에도 그라딘 개인의 활약은 대단했다고 전해졌으며 그의 활약 덕택에 동시대의 브라질, 아르헨티나와는 다르게 흑인 축구 선수가 활약하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2위 루이스 쿠비야

 


생년월일: 1940년 3월 28일
A매치 기록: 38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팬들로부터 괴물이라 불렸던 1960년대 최고의 윙어 중 하나로 손꼽히며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발재간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돌파에 능했으며 신체밸런스가 우수해 상대의 견제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으며 뛰어난 양발 사용 능력을 바탕으로 오른발과 왼발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슈팅력을 자랑했던 선수였다.

페냐롤과 나시오날, 그리고 디펜소르 스포르팅에서 활약하며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에서 세 구단 합쳐서 9회 우승을 이뤄낸 쿠비야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도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62년과 1971년에는 페냐롤과 클루브 나시오날 소속으로 트레블을 경험했고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와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세 번의 월드컵에 참여해 1970 월드컵에서는 로차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공격진영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팀의 준결승 진출을 도왔다. 다만 바르셀로나와 리버 플레이트 시절에는 전성기를 구가했음에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1위 알시데스 기지아

 


생년월일: 1926년 12월 22일
A매치 기록: 12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AS 로마

 

대표팀에 한정해서는 짧지만 굵은 활약을 선보인 선수로 당대 남미 최고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빠른 스피드와 상대 수비수를 완벽하게 속여 넘기는 교묘한 발재간을 겸비한 높은 수준의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허문 뒤 날카로운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부분은 물론 골 결정력도 뛰어나 중요한 순간에는 직접 해결하는 클러치 능력도 보여줬다.

페냐롤에서 활약하며  5년간 활약하며 1949 시즌과 1951 시즌에 두 번 우승했는데 특히 1949 시즌에는 리그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 결승리그 최종전에서는 브라질을 상대로 역전골을 기록해 브라질을 무너트리고 우루과이를 우승시켰으며 이때의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이때의 일로 파울로 로시와 함께 브라질 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축구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국가대표팀 경력은 조기에 끝나는데 자국 리그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폭행해 중징계를 받자 이탈리아로 출국해서 AS 로마에서 활약하며 국가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했다. 물론 로마에서도 뛰어난 활약으로 팀은 암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지아는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로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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