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국가의 영웅들/우루과이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토르난테 2023. 2. 1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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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우루과이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우루과이 축구협회입니다.
*기록일은 2023년 2월 16일 기준입니다.

 


10위 세르히오 산틴

 

 

생년월일: 1956년 8월 6일
A매치 기록: 18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80년대 콜롬비아 프로축구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빠른 속도의 원터치플레이와 전방으로 날카롭게 찔러주는 킬패스를 바탕으로 득점 찬스를 만들었으며 강력한 지구력과 높은 수준의 전술안을 겸비해 3선 미드필더와 측면 미드필더로도 기용되었다.

자국리그의 다누비오에서 데뷔한 산틴은 자국리그에서는 별 업적을 쌓지 못했지만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과 아메리카 데 칼리에서 명성을 날렸는데 특히 후자의 구단에서는 1990년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의 16강 진출을 견인했다.

 

9위 호세 살라사르

 


생년월일: 1963년 10월 26일
A매치 기록: 29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알바세테 발롬피에

 

건장한 체격과 그에 대비되는 푸근한 인상 때문에 곰이라고 불렸던 선수로 효율적인 드리블과 날카로운 쓰루패스를 통해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강력한 몸싸움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의 압박을 잘 견뎠으며 때로는 과감하게 페널티 박스로 침투해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국 리그의 페냐롤에서 리그 2연패를 이뤄냈으며 라리가의 에스파뇰과 알바세테 발롬피에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라리가 정상급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로 평가받았는데 특히 그가 플레이메이커로 팀을 이끌던 알바테세는 팀 전체의 플레이가 유기적으로 돌아가 시계장치 치즈라 불리기도 했다.

1991-92 시즌 라리가 최우수 라틴아메리카 선수에 선정된 살라사르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83년 U-20 월드컵 대표로 참가했고 성인 대표팀에서도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8위 구스 포예트

 


생년월일: 1967년 11월 15일
A매치 기록: 26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레알 사라고사

 

1990년대 유럽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장신 공격형 미드필더로 압도적인 신장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과 강력한 헤더가 돋보였으며 공격형 미드필더답게 유려한 발밑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과감한 1선 침투에 이은 득점으로 중요한 순간에 클러치 능력을 보이는 승부사기도 했다.

자국 리그에서의 활약은 미약하지만 스페인 라리가의 레알 사라고사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1993-94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1994-95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전성기가 지난 스타들을 대거 영입했던 첼시로 이적해 1997-98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1998-99 시즌 UEFA 슈퍼컵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며 클러치 능력을 보였고 1999-2000 시즌 FA컵 4강전 선제골과 결승골을 득점하며 대회 우승에 공헌했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도 1995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지만 아쉽게도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7위 훌리오 페레스

 


생년월일: 1926년 6월 19일
A매치 기록: 22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50년대 초중반 우루과이 축구 무대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했던 선수로 빠르면서도 부드러운 드리블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를 교란했으며 빈 공간에 정확하게 주는 날카로운 킬러패스로 수많은 득점찬스를 양산했다.

라싱 몬테비데오에서 데뷔해 리버 플레이트 몬테비데오를 거쳐 클루브 나시오날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리며 하비에르 암브로이스와 함께 2선에서 활약하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총 9회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큰 업적을 남긴 페레스는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스키아피노, 기지아, 미구에스 등과 손발을 맞춰 조국의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후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스키아피노와 암브로이스에 밀려 서브로 월드컵 준결승 진출을 경험했으며 1955 코파 아메리카에도 참가했다.

 

6위 하비에르 암브로이스

 


생년월일: 1932년 5월 9일
A매치 기록: 31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50년대 중후반 남미 축구 무대 정상급 플레이메이커로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으로 상대 수비의 몸싸움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으며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정밀도 높은 패스, 그리고 강력한 슈팅을 바탕으로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5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총 11회 우승을 이뤄냈고 1955년에는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브라질의 플루미넨시와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오스에서도 활약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후안 스키아피노의 파트너로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의 4강 진출을 이뤄냈으며 두 번의 코마 아메리카에 참가해서 1956년 대회에서는 조국의 우승을 이뤄냈다.

 

5위 루벤 파스

 


생년월일: 1959년 8월 8일
A매치 기록: 45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라싱 클루브

 

1980년대 남미 프로축구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화려한 볼 컨트롤과 정밀도 높은 패싱력을 바탕으로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으며 특히 날카로운 왼발 프리킥으로 명성을 떨쳤다.

자국 리그 페냐롤에서 데뷔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내며 1981 시즌에는 득점왕에 올랐고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도 캄페오나투 가우초 3연패를 이뤄냈고 아르헨티나의 라싱 클루브에서는 전성기를 누리며 1988년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과 수페르코파 인터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고 파스 개인도 1988년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과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했으며 남미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두 번의 남아메리카 U-20 챔피언십에 참가했으며 성인 대표팀에서도 1980 문디알리토 우승과 1986 멕시코 월드컵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고 1989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4위 알바로 레코바

 


생년월일: 1976년 3월 17일
A매치 기록: 69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한때나마 호나우두와 지단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연봉 수령자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오른발을 거의 못 썼으며 낮은 수준의 체력과 압박에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화려한 드리블 스킬과 날카로운 왼발 패스, 그리고 강력한 왼발 킥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데드볼 상황에서 그의 왼발은 빛났다.

남아메리카의 지단이라 불렸던 레코바는 자국리그에서 가능성을 보여 1997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 호나우두, 비에리, 바조 등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1997-98 시즌 UEFA컵을 시작으로 세리에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각각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말년에는 자국 리그로 돌아가 클루브 나시오날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이 시절에 코너킥으로 직접 득점을 이뤄내기도 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핵심 멤버로 참가해 1997 코파 아메리카와 2002 한일 월드컵, 그리고 2007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했다.

 

3위 페드로 로차

 


생년월일: 1942년 12월 3일
A매치 기록: 52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브라질의 펠레에 대한 우루과이의 대답으로 1960년대 말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덕목을 모두 갖춘 것은 물론 우수한 신체 능력과 우수한 득점력마저 겸비해 상대팀의 목숨을 한 순간에 끊어버린다는 뜻의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으로 불렸으며 펠레는 그를 두고 "내가 붙어본 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라는 평가를 했다.

페냐롤의 황금기에 데뷔한 로차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1961년 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탈컵 트레블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끌었고 로차 개인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인터콘티넨탈 슈퍼컵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브라질 무대의 상 파울루에서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개인적으로도 1972년 브라질 세리 A 득점왕을 수상했고 1973년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4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에 올랐고 1977년에는 전국 리그 우승의 영광을 누렸던 로차는 두 구단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되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도맡았던 로차는 1962 칠레 월드컵부터 1974 서독 월드컵까지 네 번의 월드컵에 참가해 부상으로 조기에 하차한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196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경기 3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2위 엔조 프란체스콜리

 


생년월일: 1961년 11월 12일
A매치 기록: 73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CA 리버 플레이트

 

1980년대와 90년대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트레콰르티스타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깔끔한 볼 터치와 상대의 예측을 비웃는 킬 패스가 일품이었고 득점력 또한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득점왕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활약을 본 지네딘 지단은 그를 우상으로 생각했으며 프란체스콜리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엔조로 지었다.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프란체스콜리는 1985-86 시즌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석권했으며 이후 유럽으로 진출해서 라싱 파리와 마르세유, 칼리아리에서 활약했으며 1989-90 시즌에는 마르세유에서 리그 앙 우승을 이뤄냈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는 전기리그 3회 우승과 후기리그 1회 우승은 물론 1996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주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신인 선수들을 잘 통솔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프란체스콜리는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수로 출전해 소크라치스가 이끄는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에 크게 공헌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으며 198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우승했다. 그리고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을 거두며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이토록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마라도나나 지쿠를 능가하는 화려한 모습을 보였지만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수상했으며 리그 MVP에 2회 선정되었고 1984년과 1995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1위에 올랐고 1985년 구에린 스포르티보지 선정  세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고 선수 은퇴 이후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선정되었다.

 

1위 후안 스키아피노

 


생년월일: 1925년 7월 28일
A매치 기록: 21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우루과이 축구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195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창의적이면서 정확한 패싱력을 보유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번 뒤집었다.

1943년에 페냐롤에서 데뷔해 축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 후안 스키아피노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이끌며 1949 시즌,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낸 업적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과 토르네오 데 아너 7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남미 무대를 평정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두 번의 월드텁에 참가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에는 유럽 무대에 도전하며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노르달, 리드홀름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리드홀름과 함께 세리에 A 3회 우승과 1956년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7-58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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