챠비의 바르셀로나 부임으로 보는 레전드의 감독으로 복귀 후 성공 사례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챠비의 바르셀로나 부임으로 보는 레전드의 감독으로 복귀 후 성공 사례

토르난테 2021. 11. 6. 19:48
728x90
728x90

서론

 

펩의 휘하에서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챠비 에르난데스가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챠비 에르난데스는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공식경기 767경기에 나와 85골을 기록했던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라 리가에 한정하면 505경기 58골) 정확하면서도 창의적인 패싱력과 의외로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영리한 축구 지능을 앞세워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펩의 성공 사례도 있고 챠비 역시 축구 지능이 굉장히 높기에 감독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타르의 알 사드에서 리그 우승과 카타르 컵 우승을 해본 경험도 있다.

 

알 사드 감독 시절의 챠비 에르난데스



하지만 보드진의 무능함으로 팀이 적자에 쌓이며 원하는 수급이 어려운 바르셀로나의 현 상태를 극복하는데 적합한 감독인지는 아직 의문부호가 따른다. 그리고 카타르 리그보다 더 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챠비의 알 사드는 조별 예선 탈락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현재 챠비 에르난데스의 바르셀로나의 부임은 양날의 칼이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구단 레전드 선수의 감독 부임은 팬들에게 기대를 준다. 실제로 성공 사례도 다양하다. 오늘은 구단 레전드가 자신이 선수 시절 전성기를 구가한 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레알 마드리드의 미겔 무뇨스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고의 감독

미겔 무뇨스는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에서 10년간 주전 센터 하프(오늘날의 수비형 미드필더 또는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파코 헨토 등의 공격진을 후방에서 잘 보좌하며 팀에게 라 리가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끌었다.

1958년에 은퇴한 뒤 1959년 잠시 레알 마드리드에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플러스 울트라(플러스 울트라)의 감독으로 내려갔다가 이후 1960년부터 1974년까지 감독직을 맡으며 두 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과 아홉 번의 라 리가 우승을 이끌며 레알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스페인 최고의 클럽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특히 1960-61 시즌부터 라 리가 5연패를 이끌기도 했다.

 


2. 셍테티엔의 로베르 에르뱅

 

셍테티엔 그 자체

훌륭한 축구 지능과 왕성한 활동량과 뛰어난 패싱력, 그리고 견고한 수비력을 겸비한 선수로 이런 능력들을 바탕으로 15년간 셍테티엔의 하프백과 리베로로 활약한 에르뱅은 선수 시절에도 다섯 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팀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선수 은퇴 직후 셍테티엔의 감독으로 부임해 또 11년을 활약하며 네 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유러피언 컵에서 4강과 결승에 연달아 오르기도 했다.

셍테티엔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있던 26년 동안 셍테티엔은 열 번의 리그 우승 중 아홉 번이 에르뱅이 기록한 우승이었으며 1974-75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요청으로 잠시 선수로 나와서 해당 경기에서 팀의 다섯 번째 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3. 디나모 키예프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위대한 축구 과학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로바노프스키는 선수 시절 디나모 키예프에서 활약했으며 소련 탑 리그 정상급 테크니션으로 군림하며 일곱 시즌 간 주전으로 활약했다.

이후 여러 팀을 떠돌다가 샤흐타르 도네츠크에서 은퇴한 뒤 드니프로에서 성공을 바탕으로 디나모 키예프 감독으로 부임했다. 로바노프스키는 당시 비과학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에서 최초로 스포츠 과학을 도입해 선수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체력적 우위를 점하며 디나모 키예프에서 여덟 번의 소련 탑 리그 우승과 두 번의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끌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 로바노프스키는 중동으로 떠났다가 1997년에 디나모 키예프로 돌아왔으며 건강 악화로 물러날 때까지 5회 연속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격침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 명의 발롱도르 위너인 블로힌, 벨라노프, 셰브첸코를 모두 배출한 육성의 달인이며 디나모 키예프에서 총 32개의 트로피를 획득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다.

감독 로바노프스키에 관한 자세한 글은 아래 링크를 추천한다.

https://nalsunmedia.wordpress.com/2017/07/01/stanlee%ec%9d%98-%ec%a0%84%ec%88%a0-%eb%85%b8%ed%8a%b8-%eb%8d%b0%ec%9d%b4%ed%84%b0-%ec%b6%95%ea%b5%ac%ec%9d%98-%ec%84%a0%ea%b5%ac%ec%9e%90-%eb%b0%9c%eb%a0%88%eb%a6%ac-%eb%a1%9c%eb%b0%94%eb%85%b8/

 

stanlee의 전술 노트 – 데이터 축구의 선구자,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UEFA가 선정한 10대 감독 4편 –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축구 과학자(the Soccer Scientists)”   글을 쓰기에 앞서, 호르헤 발다노의 말을 인용하고 시작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종종 결과만 중요하다고

nalsunmedia.wordpress.com

 

https://dongneazesoccer.tistory.com/75

 

한 축구 과학자가 축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일까?

축구와 과학 현대 축구에서는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팀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한 팀 운영 방식이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상대 팀 분석과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위한 식단과

dongneazesoccer.tistory.com

 


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루이스 아라고네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최고의 인물

헤타페와 레알 마드리드, 베티스 등 여러 팀을 거치다가 1964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정착하며 10년간 팀의 핵심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다. 큰 발로 정확한 패스를 공급하며 시원시원한 슈팅을 보여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뽑히며 심지어는 라 리가 득점왕에 오르며 피치치상을 탄 적도 있고 팀을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올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재경기 끝에 바이에른 뮌헨에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패하며 아라고네스는 선수생활을 접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여섯 시즌 간 부임하며 한 번의 라 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기록했다.

이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총 네 번 감독을 맡으며 총 15년간 활약하며 총 한 번의 리그 우승과 세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아리고 사키의 부진으로 강등당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아 팀을 다시 라 리가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아라고네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크고 작은 트로피를 무려 12개나 들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다.

 


5.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요한 크루이프의 업적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플 것이다. 미헬스의 페르소나로 당시 사람들에겐 이상에 불과했던 토털 풋볼을 현실로 구현하며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였으며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며 발롱도르를 세 번이나 수상했다.

그러던 그가 1985-86 시즌에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비록 리그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미헬스의 토털 풋볼을 계승한 아름답고 조직적인 축구를 보여줬으며 컵 위너스 컵에서 동독의 로코모티브 라이프치히를 꺾고 우승했다. 반 바스텐과 레이카르트 같은 훌륭한 선수들을 육성한 것은 덤이다.

이후 암흑기에 빠진 바르셀로나로 둥지를 옮겨 바르셀로나의 상징인 유스 시스템 라 마시아를 출범한다. 라 마시아에서 펩 과르디올라가 승격한 그 해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완성되었으며 라 리가 4연패를 달성했으며 1991-92 시즌에는 마지막 유러피언 컵에서 구단 역사상 첫 빅이어를 들어내기도 했다.

토털 풋볼의 핵심인 점유와 압박 중 점유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그의 축구 사상인 크루이프즘은 이후 루이 반 할이나 펩 과르디올라가 계승하며 세계 축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6. 레알 마드리드의 비센테 델 보스케

 

스타를 화려하게 빛내주는 명품 조명

비센테 델 보스케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스 출신으로 16년간 활약하며 특히 1970년대 중후반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스타플레이어들의 뒤를 받쳐주며 라 리가 5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은퇴한 뒤 카스티야 감독부터 시작해서 여러 직책을 거친 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갈락티코라는 스타군단을 5년간 훌륭하게 이끌며 두 번의 라 리가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스타들을 덕으로 다독이며 그들의 플레이에 크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팀 밸런스를 훌륭하게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공격성을 산티아고 솔라리의 왕성한 수비 가담을 통해 커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구단 회장 페레즈와의 운영 방향에 관한 문제로 팀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 이후 갈락티코 1기는 암흑기를 겪었으며 결국 회장 페레즈도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델 보스케는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7. AC 밀란의 카를로 안첼로티

 

미드필더 조립의 신

아리고 사키가 밀란을 이끌던 시절 레이카르트와 함께 밀란의 중원을 담당하며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압박하고 자신이 볼 전개도 했던 다재다능한 미드필더였으며 두 차례의 세리에 A 우승과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사키 휘하에서 코치로 재직했다가 레지나, 파르마, 유벤투스를 거쳐 AC 밀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인터 밀란에서 방출되어 밀란으로 온 유망한 공격형 미드필더 피를로를 포백 앞자리에 두며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볼에 대한 집념이 강한 가투소, 상황에 따라 다재다능한 역할을 맡을 수 있던 영리한 미드필더 셰도르프와 함께 중원을 조립해 두 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한 번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끌며 명장으로 거듭났다.

밀란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미드필더 육성 능력은 항상 뛰어나서 모드리치, 크로스, 디 마리아, 티아고 알칸타라와 같은 선수들이 모두 안첼로티의 손을 거치고 한 단계 더 발전했다.

 


8. 베르더 브레멘의 토마스 샤프

 

미스터 베르더 브레멘

토마스 샤프는 1972년 11살의 나이로 베르더 브레멘 유스팀에 입단한 이후 베르더 브레멘 2군과 베르더 브레멘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특히 1군에서만 17년을 활약했으며 오토 레하겔이 감독으로 지휘하던 베르더 브레멘의 오른쪽 수비를 책임졌으며 두 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 그리고 한 번의 컵 위너스 컵 우승에 공헌했다.

은퇴한 이후 2군 감독을 거쳐 1999년에는 1군 감독으로 부임하며 부임한 그 해에 포칼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레버쿠젠과 샬케, 그리고 도르트문트의 약진에 밀려나던 베르더 브레멘을 부활시켰으며 2003-04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와 포칼에서 더블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바이에른 뮌헨을 견제했으며 유럽 대항전에서도 세리에 A팀들을 상대로 선전하며 분데스리가의 UEFA 리그 계수가 세리에를 제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장본인이다.  2012-13 시즌 사임할 때까지 41년 동안 브레멘에 헌신했으며 잠시 다른 팀 감독을 맡았다가 다시 브레멘으로 돌아와 구단 업무를 보는 진정한 브레멘의 레전드다.

 


9. 바르셀로나의 펩 과르디올라

 

펩의 바르샤

크루이프의 야심작인 라 마시아의 첫 성공 사례로 크루이프의 말로는 크루이프의 할머니보다도 느린 스피드를 보유했지만 탁월한 시야와 정교한 패스 능력을 앞세워 3선에서 바르셀로나를 지휘하며 팀의 리그 4연패와 유러피언 컵 우승에 공헌한 팀의 두뇌였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와 중동, 멕시코를 전전하다가 은퇴한 이후 바르셀로나 B팀을 맡아 인상적인 성적을 낸 뒤 1군 감독으로 승진한다.

레이카르트 시절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전성기가 지난 호나우지뉴, 데쿠를 내치고 챠비와 메시를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했으며 결국 부임 첫 해에 트레블을 달성한다. 이후 에투, 야야 투레와 같이 자신의 철학에 맞지 않거나 마르케스나 앙리 같은 노장들을 정리한 뒤 부스케츠, 챠비, 이니에스타의 중원 조합을 완성한 뒤 2010-11 시즌 아름답게 이기는 축구의 정점을 보여주며 라 리가와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한다.

펩이 이끌던 네 시즌 동안 메시와 챠비, 푸욜, 이니에스타, 아우베스 등 팀에 스타가 많았지만 그들 대신 펩의 바르셀로나라 불렸을 만큼 바르셀로나에서의 펩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지만 새로운 회장 로셀과의 불화로 결국 아쉽게 팀을 떠난다.

 


10. 유벤투스의 안토니오 콘테

 

비안코네리와 3-5-2 시스템의 부활을 이끈 역동적인 책략가

왕성한 활동량, 강한 승부욕, 타고난 리더십에 날카로운 오른발 크로스 능력까지 겸비한 콘테는 레체에서 유벤투스로 이적한 뒤 유벤투스의 레귤러 선수 중 한 명이 되며 13년간 활약하며 주장직도 역임하며 다섯 차례의 세리에 A 우승과 한 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네 번 진출해서 한 번의 우승과 세 번의 준우승을 이룬다.

은퇴한 이후 아레초, 바리, 시에나 같은 세리에 B나 세리에 A 하위권 구단에서 경험을 쌓고 두 시즌 연속 리그 7위를 기록한 유벤투스에 부임하며 피를로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하고 비달, 마르키시오와 조합했으며 팀의 실정에 맞는 3-5-2 시스템을 조합시키며 AC 밀란을 꺾고 23승 15무를 달성하며 팀의 무패 우승을 이뤄냈다.

유벤투스에서 3회 연속 우승을 하며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유벤투스의 시대를 만들었으나 2014-15 시즌을 앞두고 돌연 사임했다. 훗날 인터 밀란의 감독을 맡던 시절 유벤투스의 회장 아넬리와의 갈등 끝에 욕을 한 것을 근거로 아넬리와 의견 차이로 인한 불화로 사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결론

 

이 사례 이외에도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플라맹구의 전성기를 이끈 카르페지아니,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이끈 지네딘 지단, 선수와 감독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모두 우승해 본 디에고 시메오네, 마르세유에서 선수로는 빅 이어를, 감독으로는 리그 우승을 달성한 디디에 데샹, 바르셀로나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명장 루이스 엔리케, 나폴리의 레전드 플레이어에서 나폴리의 첫 스쿠테토를 달성한 오타비오 비앙키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이런 사례는 해당 팬들을 흥분하게 만든다.

하지만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모든 레전드가 감독으로 부임해서 성공하진 못했다. 선수 시절 때는 환호받던 레전드가 감독 시절에는 야유받는 사례도 셀 수 없이 많다.

다음 글에는 실패한 사례를 작성할 예정이라는 점을 밝히고 이 글을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블로그 박수용의 토르난테 관리자
페이스북 페이지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페이스북 Futball Creator United 회장
다음카카오 브런치 작가

박 수용

 

* 선수와 감독 사진 출처는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의 현역 시절을 제외하면 에펨네이션 유저 법정스님의 소유입니다.

728x90